[205화]
오로지 치르체에게 집중되었던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운동장의 바닥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건물들도 녹아내린 흔적과 베인 흔적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운동장의 중심부터 배리어의 끝까지 생겨난 깊은 도격.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치골까지 깔끔하게 잘린 치르체의 흔적을 따라 땅속 깊게 가로질려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순간 감겨있지 않았던, 생기가 사라진 치르체의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잘린 치르체의 상체가 점차 떠오르더니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탐이나는 필멸자로구나.”
달랐다.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눈치도 빠른 것이 정말 보고 싶어졌어. 알리오츠가 괜히 칭찬한 것이 아니야.”
“에트라님?”
“맞다. 하늘의 주인인 천공의 신이니라.”
잠깐씩 끊어지는 듯한 목소리. 그럼에도 느껴지는 분위기에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저게 진짜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힘인가.’
치르체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 본신이 아닌데도 느껴지는 존재감이 달랐다.
“쯧. 드래곤의 마법은 성가시군. 일전에도 끊기더니.”
어느새 다시 자세를 잡고 기세를 피워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네게 명하노니 나를 보러 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명에 두고 하는 선언이니. 그렇지 않다면 흑색거성의 인간들은 앞으로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니라.”
푸르기 그지없는 하늘이 조금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치르체의 상반신. 그 동시에 배리어가 사라졌다.
[조금 이따 이야기하자! 이거 좀 심각하다.]
아프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기점으로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르젠에게 눈짓을 보내고, 앞서 약속한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
“괴물인가. 아니,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군.”
“과연 내가 9클래스에 오른다고 해도 저 광경이 가능할지 의문이군.”
땅이 녹아내린 자국, 단면이 너무 깨끗하게 잘린 자국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교수님. 뭔가 숨기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배리어가 사라지고 나서도 격전의 중앙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끓고 있는 대지에 손을 대면 베일 것만 같은 단면들이 주는 두려움이 있었다.
주변에 있는 곳들, 심지어 배리어 밖에 있는 건물과 땅에도 상흔이 나 있었다.
그중에서 격전이 있던 곳 가장자리에 나 있는 것이 가장 시선을 잡아끌었다.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이 움직임이란 말이지.”
이후에는 눈으로 쫓아가지도 못 한 움직임이었지만, 처음 몇 번의 움직임은 볼 수 있었다.
움직임의 가장 첫발을 내디딘 장소에 도착하자 깊게 박힌 교수님의 발자국이 보였다.
발자국을 보면서 움직임을 떠올려보려는 순간에 귓가에 들어오는 소리.
“그래! 아젠스! 네가 교수님 조교지!”
그 말에 다양한 시선들이 아젠스를 향해서 쏟아졌다. 걔 중에는 아젠스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때맞추어 나타난 학장님. 그리고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동아줄이 되었다.
“신이란! 이런 위협입니다. 실제로 있는 위기이자 우리의 적입니다.”
학장님의 연설을 귀에 담으면서도 여전히 눈은 격전의 흔적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본래 무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아젠스였다. 마스터.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본 신화적인 싸움에 자연스럽게 동경이라는 감정이 피어났다.
그런 동경은 훗날 제국의 기틀에 큰 영향을 주게 되며 철혈의 황제가 탄생하는 씨앗이 되었다.
*
방에 돌아온 후에 처음으로 듣던 아프의 진지한 이야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뭐가 심각하다는 거야?”
치르체와의 격전을 수습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미룰 만큼 아프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일종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주? 뭐 아까 그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그게? 그게 말이 돼?”
하늘을 가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데, 그것이 흑색거성의 범위로 일어난다는 말이었다.
[마법을 얕보지 마라! 그들이 행하는 마법은 진짜 권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권능이라는 게 그런 정도야?”
[너도 알지 않냐! 치르체라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넘어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치르체를 추방이 아니라 상대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 그것이 방금 아프가 말한 것이었다.
“확실히. 권능으로 마치 경계를 넘은 것 같은 힘을 내게 해주기도 한다면야. 그래도…. 하늘을 가리다니. 그건 좀 너무 하잖아?”
[잘 생각해 봐라. 어떤 말이었는지.]
곰곰이 천공의 신이 한 말을 되돌려보니, 생각하는 문구가 있었다.
“흑색거성의 인간들은 이라는 말이구나. 근데 그조차도 괴물 아니야?”
인간들로 한정한다 하더라도 수백만 명. 그들에게서 하늘을 앗아가는 것만으로 이미 인간을 넘어섰다.
[너무 크게 생각하지는 마라! 너도 수백만을 서서히 죽이려면 죽일 수 있지 않나!]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여전히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갑작스럽게 무겁게 다가왔다.
“너무 내가 무시하고 있었나.”
신이라고 칭하기에 무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무시했던 것 같다.
[그건 네가 신이라는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올바르게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들을 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네 벽을 넘은 이들이라고 생각해 봐라!]
아프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 위치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만날 거라고 생각을 안 해서 그랬지. 이렇게 꼬일 거라고 생각이나 했나.’
너무 편하게만 생각했던 듯싶었다. 랑코님에게 배운 사실이 마음을 너무 놓게 만들었다.
*
“신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신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게 불리는 거죠. 물론 인간들에게는 진짜 신처럼 보이겠지만.”
화경이라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감히 신에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인간들 사이에서 신으로 불리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의아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거죠?”
“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대략 15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죽지도 않으니까요.”
이어진 설명에서 어떻게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탄생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이들은 아니니까요.”
“세상에 있는 게 아닌가요?”
“아니죠. 세상에는 있지만, 제약이 있어서요. 언제나 사도에는 제약이 따르는 법이랍니다?”
세상에서 활동하려면 신앙을 소모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불멸을 위한 신앙을 소모할 수 없다는 거네요. 말씀하신 신성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나요?”
“네! 정확합니다. 신성이라는 것이.”
*
랑코님께서는 거의 확신하듯이 말씀을 해 주셨지만, 그보다 내 악운이 더 강한 듯했다.
‘분명히 만날 일이 없다고 하신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되는 건데? 계속 지고 다녀야 하는 거야?”
[신명을 걸어서 더 골치가 아프다. 신명을 건 이상 아마도….]
“신명이라는 건, 치르체랑 다르지 않다는 건가.”
치르체는 본명을 사용했다. 가명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임에도 말이다.
이름은 존재의 규명이라고 배웠다. 그만큼 중요하지만 상대적이기도 한 것. 하지만 신들에게는 또 달랐다.
우러름을 받고 숭배를 받는 그 이름이기에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런 이름을 걸고 말 한 것이니만큼 벗어나는 것이 매우 곤란해졌다는 의미이리라.
[네가 경지를 넘어서게 된다면 모르겠지만, 네 성격상 그때까지 두고 볼 수 있을까 싶다.]
안 그래도 하늘이 조금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
“흑색거성이라면 이곳에 있는 전부를 말함이겠지. 진짜 괴물 같다.”
[일단 보아하니 반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면.]
“사람들이 자각 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민감한 사람이라면 아마 그전에도 느낄 거다. 경지가 높은 사람도 그렇고.]
“지랄 났네 진짜. 바로 떠나야겠네.”
그렇다고 바로 천공의 신을 보러 가자니 목숨을 헌납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싫어할 뿐이지 목숨을 바치는 성자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저주를 벗을 방법이?”
[아니다! 그건 적어도 영왕 이상의 존재가 아니면 힘들다.]
영왕이라는 소리에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다.
“그럼? 어차피 여기 보낸 것도.”
애시당초에 이곳에 오게 된 이유 또한 불의 영수들의 왕 부탁을 받고 온 입장이었다.
[그런데 아마 그러면 네 저주만 풀릴 거다.]
“내 저주가 풀리면 다 해결 되는 거 아니야? 뭐가 또 있어?”
[너에게 걸린 저주는 사라지겠지만, 흑색거성에 걸린 저주는 사라지지 않을 거다.]
“신이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영역의 차이이다! 그리고 네가 신이라고 불리는 인간들을 너무 낮게 보는 것도 사실이고.]
“리퀴두스님은.”
[이유가 없다! 그리고 약속에 어긋나기도 하다!]
“하아. 진짜….”
쉽게 쉽게 가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건 사고가 몸에 자석처럼 붙는 것 같았다.
“네가 말하는 방법은 뭔데?”
[신이라고 불리는, 위신들이 권능을 나누어주는 건 알고 있지?]
신전에 있는 사제들이라면 공통으로 받는 권능도 있었고, 상위의 권능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위신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권능을 받는 이들이 있다!]
“추기경 정도 되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특별한, 가령 7개의 별과 같은!]
“알리오츠같은 사제들을 말하는구나?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능은 말 했던 듯이 정수와도 같다. 자신의 권능을 떼어서 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해가 안 가네. 권능이라는 걸 내가 잘 이해를 못 하겠어서.”
[위신들에게 일반 신도들이나 사제들이 신성을 채워주는 역할이라면, 그 정수를 받은 이들은 위신의 대행자라고 볼 수 있다!]
권능에 대해 설명해준 뒤에야 아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런 정수를 지닌 이들을 사냥한다면, 저주가 약화 될 거다!]
“우선은 그 방법밖에는 없나. 진짜 그것도 머리 아픈데.”
[그 정도는 사속성 신전에서 해줄 거다! 아마 기쁘게 해줄 거다!]
“결국에는 내가 뛰어다녀야 하는 거잖아. 남 좋은 일 시켜주는 기분이야.”
[어차피 너도 훈련한다고 생각해라! 아마 치르체가 가장 약했을 거다!]
“에이. 설마? 우리 알리오츠를 만나고 온 건 기억하고 있지?”
[치르체를 보고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냐!]
“제발. 쉽게 좀 가자. 진짜로.”
아프와 함께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학장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 있었다.
“가자. 말씀드려야지.”
[소집이다! 소집! 과연 넌 어떤 취급을 받을까! 궁금하다!]
홀로 신난 아프와 다르게 걱정을 안고 올라갔다.
“천고의 역적일 것 같은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