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순간적으로 나타난 마법진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는 자리는 치르체였다.
‘이게 고작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진짜 드래곤들은….’
굳어있던 서클이 하나하나 활성화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움직이려고 했지만, 못 하는 것으로 보였다.
‘탑주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고, 그나저나 대단한데?’
아는 만큼 보인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말이다. 저 빛줄기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힘. 다른 이들은 못 느끼는 듯했다.
‘추방과 해방. 두 개의 선택지가 있는 이유를 알겠네. 저 정도 힘이면 뭐든 할 수 있겠어.’
치르체의 머리색이 바뀌고 눈동자의 색도 변한다. 마치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 색.
몇 번의 요동 끝에 움직임을 포기하고 입을 여는 치르체의 입술마저 붉었다.
“보아하니 추방시킬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이런 선택을 한 거지?”
“오? 대단한데. 거기서 말도 할 수 있고? 충격 요법이랄까?”
“멍청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신을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인데.”
“그다지? 북부에 있는 수많은 위신들 가운데에서도 너는…. 음 뭐랄까. 하자품? B급 위신? 위신들의 위신이니까?”
아젠스가 물어온 정보. 파슨스라는 팀장과 함께 가져온 정보는 놀라웠다.
‘신이라고 불리는 이가 사실은 하위 신이었다니. 진짜 단단히 준비했네.’
북부 대륙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서 다투고 있는 신전들. 하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게 모두 판테온의 맹약에 묶여있기 때문이라는 거지.’
아프가 아니었다면 절대 알 수 없을 일이었다. 아젠스 왜 하위 신이 있는지 모르는 것 같지만.
“하! 대단하구나. 필멸자인 주제에 꽤 많이 찾아냈어.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너도 나같이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계획한 것이 모두 어그러졌음에도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는 치르체였다.
“생각보다 담담한데? 다른 계획이 있나 봐?”
“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이 몸의 신위(神威)를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겠지.”
빛줄기가 서서히 그치고, 눈앞에 드러난 치르체는 평범했지만, 선명했다.
마법이든 무예이든 아무것도 단련하지 않은 일반인이지만,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마치 머릿속에 박히듯.
‘아무리 하위 신이라고 해도, 신은 신이다 이거구나.’
일반인처럼 보이는 저 속에 어마어마한 힘이 숨겨져 있었다. 맹렬히 돌아가고 있는 9개의 고리.
고리 전부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힘. 그럼에도 두려움이 오지는 않았다.
“그거 알고 있어? 마법진에 신기한 기능이 있다는 거?”
인간을 높이 산 것일까? 자신들의 놀이터를 만들고자 함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맞는 것 같지만.’
신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는 마법진 이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마법진.
운동장을 넘어 아카데미의 일부분마저 포함하는 투명한 구체가 생겨났다.
“호오? 실로 신기하구나.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드래곤이라는 것을 잡아보아야겠어.”
그 소리에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세상에 저런 우물 안 개구리도 없었다.
“네가? 드래곤을? 감히? 혼자서? 진심으로 하는 소리지?”
“뭐가 그렇게 우습지? 나는 태양 그 자체. 모든 것을 비추고 태울 수도 있는 존재.”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자연스러운 불길이 치르체의 온몸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만물의 위에 서 생과 사를 주관하는 존재이니라. 단지 인간뿐이 아니니라.”
“오! 멋있는데? 불길이 막 넘실대! 그런데 만물이라니 너무 자신감이 과하네.”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빛줄기가 사라지려는 순간에 이미 7개의 탑을 전부 개방하고 있었다.
불의 신전에서 경계를 넘은 동시에 열린 7번째인 칼리키아스의 탑. 영수들이 몹시 싫어했었다.
스키론의 탑과는 정반대로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 냉기와 열기가 만나서 수증기가 생겨난다.
“호오? 그것이 너의 길인가 보군. 신기하구나. 바람이라 이건가. 이 정도 기다려주었으면 되었지 않은가?”
“마치 봐 준 것처럼 말하네? 자기도 노림수가 있었으면서?”
“경지만큼이나 눈치도 빠르구나? 나쁘지 않아. 말투만 고치면 훌륭한 아이가 될 것 같구나.”
반딧불이같이 작은 불덩이들이 치르체의 주변으로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어나는 반딧불이들을 보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두 걸음 앞에서 도를 꺼내면서 휘둘렀다.
‘라니우스 1식 : 일도양단’
주변에 만들어진 반딧불이들이 휘둘러지는 도의 앞길을 막아섰다. 생각 이상의 반탄력.
“꽤 나쁘지 않구나?”
여전히 여유로운 치르체. 마치 실험을 하듯 조금씩 커지는 반딧불이들.
‘마법사는 이게 어렵단 말이지.’
생각 이상의 반탄력을 주는 반딧불이 때문에 거리가 벌어졌다.
본래는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불가능해진 상황. 틈을 찾으며 한 발씩 거리를 줄여나갔다.
“그랜드 마스터라니. 참 대단한 경지야. 그것도 꽤 젊은 나이에. 하지만 그를 넘어서면 차원이 다르지.”
참 말이 많은 신이었다. 그리고 웃겼다.
‘오히려 학장님보다 보는 눈이 없네? 거기에 여전히 화경으로 생각하고 있고 말이지.’
하지만, 그 무위는 진짜였다. 두 걸음이 계속해서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조금씩 커지는 반딧불이들이 마치 호위병처럼 길을 막는 동시에 휘둘러지는 도 또한 막았다.
오러를 더욱 불어 넣었다. 풍아 덕분에 만들 수 있었던 자신만의 도강.
‘다른 도였으면 진작에 부서졌겠지?’
손에 작은 진동이 살짝 지나가며 도강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희미하게 계속 진동하고 있는 얇은 막이 도날을 타고 새어 나온다.
“하? 그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오러 블레이드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냐?”
헛소리를 무시하고 도강이 서린 도를 잡고 발도. 첫 초식을 재현한다.
‘라니우스 1식 : 일도양단.’
처음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휘둘러지는 도를 따라서 반딧불이들이 손쉽게 꺼져나간다.
강기가 반딧불이들을 지나쳐 하나의 선을 그리며 치르체의 옷자락에 닿았다.
그러자 여유롭기만 하던 치르체의 표정이 일변한다. 반딧불이들이 사라지고 사람의 머리만 한 불꽃 덩이들이 나타난다.
“조금 봐 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머리만 한 불덩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열기가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느껴진다.
빠르게 날아드는 불덩이들을 피하며 앞으로 나갔지만,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피한 불덩이들이 지면에 닿자 폭발과 함께 땅이 녹아내리는 것이 보인다.
운동장을 넘어서 아카데미의 일부를 포함한 배리어가 있음에도, 그 여파를 막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보인다.
‘학장님의 판단이 맞았네. 그럼 조금 더.’
불덩이들 사이 사이에 불로 만들어진 창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수십 개가 넘는 것들.
빠르게 날아오는 불들을 피하고 도격을 날려도 치르체에게는 닿지 않았다.
“근데 너희가 말하는 신이 되면, 정해진 속성만 쓸 수 있다며? 그건 퇴행 아니야?”
신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이 칭해지는 것에 관련된 것만 사용 할 수 있다.
눈앞의 태양의 신은 불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게 과연 올바른 진행일까 싶었다.
“한 가지만으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그러니라. 쯧. 어리석구나.”
“그래?”
[이니티움]에 오러를 불어넣어 제약을 해지한다. 7개의 탑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서서히 하나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아직 공간은 남아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 같은 힘이 휘몰아친다. 모든 바람이 몸에 모여드는 듯하다.
“네 놈!”
당황인지 분노인지, 둘 다인지 모를 괴성을 내뱉는 사이에 잠시의 틈이 보였다.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들어가 그대로 치르체의 팔을 그었다. 옷과 함께 베어진 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신도 피를 흘리나 보지?”
“하! 보자 보자 하니.”
분노와 함께 전신에서 강렬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팔에 있는 상처는 불길이 타오르자 깔끔하게 사라졌다.
불길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바로 풍도로 자리를 옮겼다.
본래 있던 자리에 타오르는 불길. 아무런 징조도 없이 땅을 녹이는 불길이 만들어졌다.
‘이래서 신.’
이제야 진짜 신이라고 불릴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치르체. 그 모습에 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한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만드는 부지불식간의 공격. 거기에 머리 위에는 작은 태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풍아에 만들어 놓은 도강을 풀어버린다. 7개의 탑을 모두 한 번에 개방한다.
전신에 휘몰아치는 바람이 두 다리에 모이며 길을 안내해 준다. 도에는 오로지 재능만을 담는다.
변화무쌍한 바람의 길을 따라서 앞으로 나가는 동시에 치르체의 작은 태양이 속도를 붙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라니우스 1식 : 일도양단.’
자르는 것에 도움을 주던 재능을 갈고닦으니 이제는 더 많은 것을 자르게 만들어 주었다.
내려오던 태양이 반으로 잘린다. 그 열기마저 잘리는 태양.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라니우스 2식 : 면면부절’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것에는 바람이 깃든다. 아무리 작은 움직임이더라도 바람이 함께 한다.
그 바람을 쫓아가는 풍도. 불꽃이 타오르다 사라지듯 순식간에 변하는 치르체의 위치.
그 모든 위치를 따라가면서 휘둘러지는 도는 결국 닿았고 그 순간부터 끊어지지 않았다.
처음에 생긴 상처는 마치 불을 자른 것처럼 베어지지 않고 그대로 복구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길이 갈라지듯이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소리치는 치르체였지만,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쾌감과 함께 스승님의 말씀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면면부절이라는 것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뜻이니라. 하지만, 동일하게 이어지면 흐름이 안 된다. 너의 재능은 층을 쌓듯이 누르고 온몸은 바람에 맡기거라.’
단 한 번도 모든 힘을 다해서 펼친 적이 없는 2식. 받아주는 상대가 없기에 온 힘을 다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모든 힘을 다해서 펼치는 2식. 그것이 주는 쾌감, 해방감은 엄청났다.
급박해진 치르체는 마구잡이로 불길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몸을 태우듯이 화염이 공간을 뒤덮었다.
화염이 넘실거리는 공간. 살이 익어가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것보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도격에 취했다.
몸을 바람에 맡기라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몸이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
7개의 탑들. 그 안에 있는 바람들이 시시때때로 변하며 몸을 움직인다.
도에 층층이 쌓여가는 재능은 점점 공간을 가득 채운 화염과 함께 치르체를 베어가고 있었다.
6번째의 연격부터 치르체의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9번째가 되었을 때 치르체의 몸을 파고드는 상흔이 생겼다.
그리고 12번째의 도격에서 치르체의 팔이 날아갔다. 떨어지는 팔은 불길이 타오르듯 화염이 일더니 사라졌다.
숨이 점점 막히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전신에 힘을 쏟아내는 것에 한계가 다가오는 순간.
‘그리고 어느 순간 네가 알게 될 것이다. 3식을 사용할 수 있을 때를. 그때야말로 진정한 3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 말씀 그대로의 느낌이 찾아왔다. 층층이 쌓인 재능이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재능은 사선으로 그어지는 마지막 도격에 그대로 실려 쏘아졌다.
“라니우스 3식 : 단절.”
그와 함께 눈앞의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