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한쪽 벽을 빼곡하게 채운 책도, 신비한 빛을 내고있는 책상도, 뒤로 보이는 중앙성의 정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나가는 학생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책상에 앉아있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그것이 온 신경을 빼앗아 갔다.
‘아프야. 저 사람 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야?’
[오? 이제는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냐! 대단하다! 많이 늘었다!]
아프의 말대로 이전이었다면 몰랐을, 아니 확신할 수 없었을 차이였다.
‘내가 느낀 게 맞아? 아니, 엄청 오래된 거 아니야?’
아프가 종종 해주는 이야기 중 가장 재밌는 부분은 드래곤의 유희였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인물들이 사실은 드래곤이었다는 이야기는 퍽 흥미로웠다.
최근 해준 이야기에서 등장한 드래곤은 독투스 가문 소속의 인물.
하지만 그 인물은 중앙성이 세워지기 시작할 무렵의 인물, 그러니 거의 3000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한 기운이 흘러나온다고?’
현경에 오르고 생명체의 본질을 느낄 수 있게 되며 새롭게 보이는 세상이 있었다.
그중에서 아프는 묘한 존재긴 했지만, 다른 이들의 본질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알려주기로 눈앞에 젊은 학장에게는 드래곤의 피가 강하게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때 유희를 했던 방식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꽤 많은 드래곤과 드래코니안이 따라하곤 했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시면 조금 무섭습니다만. 학장을 맡은 테르멘이라고 합니다.”
주름 하나 없는 옷차림. 차가운 회색 코트에 하얀 셔츠를 입은 학장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범이라고 합니다. 학장님이라고 학자를 떠올렸는데. 경지에 오른 마법사이실거라 생각을 못 했습니다.”
평온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탑주들도 알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제가 조금 민감한 편이라.”
책상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오면서 자리를 권하는 학장의 눈에는 의구심이 여전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수행자. 몽상가의 후예로 알려져 있음. 영수, 그것도 플라멘 팔코의 계약자.”
따라준 차를 음미하면서 들은 내용은 상세했다. 이 세상에 나오고 모든 행적이 쓰인 듯했다.
“꽤 열심히 조사하신 것 같네요.”
‘차라리 저런 사람이 같이 일하기는 편하지.’
조사한 내용을 보면 능력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을 하니 적어도 뒤통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꽤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했답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 마치 드래곤의 유희처럼 말이죠.”
“하지만이 나올 것 같은데요.”
“저는 감이 좋은 편이라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요.”
“저는 학장님께서 거절해 주신다면 감사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하아.”
깊은 한숨을 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목까지 채워진 셔츠의 버튼을 하나 푸는 학장.
“진짜 어이없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갑자기 정중하기 그지없던 학장이 순식간에 양아치 같은 억양으로 변했다.
[본모습이 저런 가 보다! 역시 둑투스 가문이다!]
“솔직히 바디 체인지든 뭐든 해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너무하네.”
‘오? 처음인데 내 나이를 알아보는 거는.’
“나도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괴물이 있었네. 페루스님은 도대체 누굴 보내주신 거야. 인간 맞죠?”
“네. 인간입니다. 그나저나 제 나이를 대략이나마 알아차린 인간은 처음인데요.”
재밌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왜 둑스트가문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자식을 내놓지 않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번 학장은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인 38세라고 하더니, 아니었네요?”
“하! 거기까지 봤단 말이지. 진짜 너무하네. 말 편하게 해도 되나? 경지는 밑져도 나이는 많은데.”
은근히 흔들리는 저 눈동자도 재밌었다. 아카데미가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뭐. 그렇게 하시죠. 근데 나이가?”
“62세. 뭐! 웃지 마! 혈족 특성상 성장이 느린 걸 어쩌라고!”
“아니, 안 웃었습니다만. 근데 62세에 7서클이면 빠른 것 아닙니까?”
“20살에 시작했어! 엄밀히 따지면 40년도 안 돼서야!”
본색을 드러내고 나자, 더 재밌는 양반이었다.
“이럴 거면 학장 따위 안 하는 건데. 이상한 새끼가 고개를 들지 않나. 괴물을 만나질 않나.”
“그런 것 치고는 학장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요?”
“학장 자리에 딸려오는 게 어마어마하거든. 자.”
“대충 파악은 끝나셨나 봅니다?”
건네준 서류를 보자 문제가 되는 학생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치르체. 나이는 17살. 마법사로 3서클. 월반해서 8학년 재학 중. 7학년에 다녀온 수행에서부터 변화라. 탈교인은 뭔가요?”
“신전에서 벗어나서 도망쳐 온 사람을 말하는 거야.”
“부모가 탈교인이라. 근데 배경이 완벽한데요? 사속성 신전에게 문의해봤을 거고.”
부모님 중에 한 사람은 성전에서 전사. 어머니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도망쳐 나왔다고 써있었다.
“주교의 첩이었는데 자식을 낳고 나서 죽였다. 그리고 고아원에 버려졌고. 근데 왜 자식은 안 죽였을까.”
“자식이니까요?”
“그리고 그 주교는 놀랍게도 탈교 후에 죽게 되지. 사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의심도 안 했어.”
“근데 마법사라. 제가 마주할 일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아! 마검사 지망생이야. 그리고 무기는 도를 사용하지. 어때?”
“마검사. 흠. 근데 수행 후 어떻게 달라진 건데요?”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후에야 왜 문제가 되는지, 학장이 왜 나설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쯧. 나이도 많으신데 좀 참지 그러셨어요.”
“가문 특성이라고! 안 많다고! 나가!”
“그럼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들어옵니다?”
손을 휘젓는 학장을 뒤로하고 문을 열자 일전의 그 학생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큐시리라고 했지? 방으로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네. 이미 방이 준비되어있습니다만, 혹시 따로 짐은 없으신가요?”
“응. 괜찮아 어차피 가볍게 다니는 게 익숙해서.”
“교수의 정복이 준비되어있지만, 얼마든지 자유로운 복장으로 다니셔도 됩니다.”
한 층 내려가자 5개의 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모두 비어 있어서 교수님만 이 층을 사용하십니다.”
“다른 교수들은?”
“중앙성에 집을 가지고 계시거나 양 날개 건물에 계십니다.”
“나름 특별취급인가? 감사하네.”
가운데에서 왼쪽에 있는 방문을 열어주며 마저 설명하는 시큐리.
“본래 귀빈들을 위해서 만든 방이니 만족하실 겁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장소는 연무장으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고마워. 앞으로 종종 볼 것 같은데 잘 부탁할게.”
“영광입니다. 수일 내로 교수님께도 조교가 배정되니 조금만 불편하시더라도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고생했어.”
인사를 하고 나가는 시큐리가 정말 귀여워 보였다.
“너한테 엄청 관심 있는데 관심 없는 척 하려는 게 정말 애구나 싶네.”
[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나를 보면 눈이 돌아갈 거다!]
“어떻게 칭찬을 조금만 해줘도, 이러니까 칭찬을 못 해주는 거야.”
방은 생각 이상의 크기였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창문이었다.
“신기하네. 이렇게 둥글게 유리를 만들 수도 있구나.”
아카데미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창문. 하나가 통짜로 한 면을 채우고 있었다.
[문명의 수준이 적어도 100년 이상은 발전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근데 그게 평균적인 것만이라는 거지.”
[권능이라는 건 꽤 유용하기도 하니까 그렇다! 그럼에도 흑색거성의 물품들은 다 명품으로 취급된다!]
“웃겨. 이단이라고 하면서 물건은 참 좋아한단 말이지.”
[자! 이러면 된다!]
전경을 둘러보며 위치를 살피자 아프가 학장에게 받은 패를 창문에 가져다 대었다.
“온갖 신기한 게 다 있구나 여기는.”
창문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선들이 전경과 한데 어우러지며 아카데미의 지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적응하려면 꽤 걸리겠는데.”
[멍청하니까 내가 많이 도와줘야지 어쩔 수 없다!]
이내 완성된 지도는 새삼 아카데미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이제는 꽤 빠릿빠릿한데?”
“그러는 교수님도 이제는 진짜 교수님 같으신걸요?”
“치안 수반이 꿈인 녀석 주제에 어설프고, 칼질만 잘하는 주제에?”
“교수님도 교수 정복을 칼같이 입으시고 한 달이나 돌아다니셨으면서!”
“넉살은. 놓고 가라. 그리고 강의실 준비 잘 해놓고.”
“옙!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아프도 이따가 보자!”
문을 닫고 나가는 상아색 머리의 학생. 그 모습에 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인과 다르게 생겼는데, 카인이 생각난단 말이지.’
[역시 아젠스는 너에게는 너무 아까운 학생이다!]
아젠스가 놓고 간 과자를 열심히 먹으며 말하는 아프는 신빙성이 전혀 없었다.
“매번 먹을 것을 가져다 주니까 좋아하는 주제에.”
[아니다! 가끔 멍한 것 치고는 머리 돌아가는 게 엄청나다! 이건 내가 인정해 주는 거다!]
“하긴 꽤 경쟁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조교로 배정된 아젠스는 조교가 되기 위해서 유급을 선택했다고 들었다.
[외부인이니까 그런 거다! 너가 인기가 많은 게 아니다!]
“그래. 그래. 다들 널 보고 싶어서라고 하자.”
아젠스가 가져다준 서류는 치르체와 그 동아리에 소속된 인물에 대한 동향이었다.
“확실히 아카데미 정보통이란 말이지. 정보동아리를 운영할 만해.”
[심지어 학교에도 알리지 않은 동아리니, 그 나이에 대단한 거다!]
“인정. 솔직히 학장님의 확인이 아니면 제일 주의했어야 할 놈이지.”
치르체에 대한 감시와 정보제공을 미끼로 자신을 가르쳐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던 아젠스.
[아직도 그 학장의 어이없는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제압한 뒤 학장실에 끌고 가니, 독투스 가문의 방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학장 몰래 정보단체를 만들고 운용하는 잔대가리는 진짜 대단하지.”
그 이후로는 가장 쓸모 있고 믿을 수 있는 학생이 되었다.
“그나저나 점점 사람을 늘리려고 하고있는 것 같단 말이지.”
치르체의 동아리는 본래 굉장히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요즘 슬슬 확장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확실히 묘하지?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단 말이지.”
자신에게 배정된 ‘무의 이해’.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들어간 첫 수업시간에 꽤 놀랐다.
생각 이상으로 인기가 많았는지 500명 정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앞에 앉은 것이 치르체였다.
[네 느낌이 맞을 거다. 다만 방법은 나도 잘 모르겠다!]
절대 치르체는 학생이 아니었다. 풍기는 기운 그 자체가 달랐다. 다만,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냥 찍어 누르면 바로 튀어 오를 것 같은데. 나보다 낮은 경지도 아닌 것 같고.”
[하지만 어떻게 나올 줄 모르니까 문제다! 죽은 척하면 넌 망하는 거다!]
아프의 말 그대로였다. 거기에 치르체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문제였다.
“신에 대한 것만 빼면 완벽한 학생이라. 교수들이 그래서 더 안타까워한다고 했지.”
[그리고 넘어간 교수도 있다! 잊지 마라!]
아프에 말에 따라 서류를 다시 보니 넘어간 교수의 얼굴과 이름이 보였다.
“이것도 진짜 머리 아프단 말이지. 내 전공이 아닌데 이런 건.”
손에 올린 서류 한 장. 그 안에는 골치 아픈 이름이 적혀있었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