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어둡지만, 은은한 촛불로 시야가 가린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각종 신비한 음료를 마시면서 담화를 나누는 이들은 수인도 있었고 엘프도 보였다.
[저들은 대부분이 하프이다! 하지만, 하프라고 무시하다가는!]
‘대부분 경지가 초절정인데, 무시를 어떻게 해.’
거기에 영수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면서 놀고 있는 광경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자아내고 있었다.
“근데 인간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애초에 총지배인에게 이 패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넌 내 덕분에 쉽게 얻은 거다!]
“예. 예. 아주 고맙습니다아.”
[멀뚱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저기로 가라!]
아프가 아니었다면, 이 장소에서 이방인처럼 혼자 멀뚱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기에는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누구든 그랬을 거라 생각하며 바 테이블로 향했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는 엘프. 유리잔을 닦는 자세에서 장인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저 엘프한테 가서 패를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팔러 왔다고 해라!]
엘프에게 말을 하기 무섭게, 아프를 바라보면서 눈인사를 하는 엘프.
그리고서는 옆으로 나와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단상 위에 존재하는 거대한 소파. 그리고 그곳에 옆으로 누워있는 엘프.
두 명의 엘프를 보았을 때 느낀 첫인상이 ‘맑다’였다면 지금은 퇴폐적이다였다.
이상한 항아리에 호스가 이어져 있고, 호스 끝을 물고 뱉으며 연기를 뿜어내는 엘프.
빛을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머리와 그보다 더 깊고 깊어 보이는 검은 눈.
“오? 아프 아니냐. 오랜만이구나. 승천자도 실로 오랜만이고.”
“에첸트로스님을 뵙습니다. 이 세상에 올라온 범이라고 합니다.”
“그래. 들었지. 그것도 두 번째라지?”
위험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에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자연스럽게 손이 품으로 들어가 준비한 것을 꺼냈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에도 흥미가 있다고 하셔서 준비했습니다.”
공손하게 양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공을 유영하더니 에첸트로스님의 손에 안착했다.
“술인가? 어느 곳의 술이지?”
“제가 본래 있던 세상. 그곳에서 감히 제일에 있던 술입니다. [포이드]라고 합니다.”
“신기하구나. 술 그 자체에서 의지가 느껴져. 역시 장인들이란, 재밌는 이들이야.”
명검에 대장장이의 혼이 깃들 듯이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장인의 의지가, 혼이 깃들었다.
“보아하니 너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는 수준이고.”
확실히 경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좋아! 이런 선물을 줬으니. 받아라.”
손가락 크기의 작은 막대기. 푸른 빛이 가득 차 있는 막대가 손에 들어왔다.
“너. 내가 이야기에 미친 건 알고 있지?”
“흥미가 많으시다고.”
“웃기고 있네. 리퀴두스님이 퍽이나 그렇게 이야기하셨겠다.”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리퀴두스님에게 에첸트로스님은 철없는 꼬마지만,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하여간. 초창기였나? [지고한 바]를 만들었는데 오는 놈들이 없는 거지.”
그렇다고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으셔서 만든 것이 이 막대기라고 하셨다.
“지금은 꽉 차서 푸른빛이 돌지만, 다 사용하고 나면 갈색으로 변할 거야.”
위급한 상황이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호출할 수 있는 호출기였다.
“채우는 방법은 호출 요청이 왔을 때 가서 도우면 조금씩 차오를 거야.”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개인용 텔레포트와 다를 게 없었다.
“아. 그리고 너한테 말해주자면, 그 막대기 자체에 몇 가지 마법이 더 걸려있어.”
다른 이들에게는 굳이 말해주지 않는다는 마법. 대표적으로 회수와 녹화가 있었다.
주인이 죽으면 자연스럽게 에첸트로스님에게 회수가 되고, 그다음이 녹화. 그 주변을 녹화하는 기능.
“자. 이렇게 하면.”
눈앞에 갑자기 10초 전 이 장소가 펼쳐졌다. 영상을 녹화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거기에 기본적인 인식저해 기능이 들어간 마법과 함께, 신기한 기능이 많은 막대기였다.
“그래도 웬만하면 끄지는 말고. 뭐 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뒤에도 잠시 고민하시더니 다시 입을 여셨다.
“조금 거래가 안 맞는 것 같으니, 덤으로 하나 더 알려주마. 천공의 신전 애들이 널 노리고 있어. 너랑 아프랑.”
“노린다는 말씀은?”
“뭐. 나름 포섭하려는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잡아서 고문하는 분위기긴 해.”
“아프…. 때문인가요?”
“아프도 일정 부분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네가 몽상가의 후예로 알려져서 더 그럴걸?”
“네?”
“아프가 설명을 제대로 안 해줬나 보구나?”
아프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노려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슬펐다.
“몽상가. 그 이름이 인간 세상, 그것도 신전의 고위직에게는 탐스러운 이름이거든. 흠. 뭐 아프 잘못도 있으니. 자. 거부하지 말아라.”
에첸트로스님의 손끝에서 은빛의 방울이 지더니 천천히 날아와서 이마에 닿았다.
청량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몽상가라 불리는 인간의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쯧.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말을 안 해준 것 아니냐.”
“헤헤헤. 좀 그렇잖아요. 근데 저거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뇌가 녹았겠지만, 저 정도의 인간이라면 수월할 거다. 승천자라 다른 건가.”
“근데 천공의 신전은 무슨 소리예요? 걔네 갑자기 커진 것 같던데.”
“뭐. 갑자기는 아니고 서서히 커졌지. 그리고 결국에는 똑같아진 거지.”
“참. 인간이란 왜 그런 걸까요.”
“인간만 그런 게 아니란다. 너도 알게 되겠지.”
“근데 천공의 신전이 노리면 위험한 거 아닐까요?”
“저 애 정도면 괜찮을걸? 왜? 걱정되나 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오? 벌써? 깨어나려고 하는데? 조용히 하렴.”
*
“몽상가 이 사람. 엄청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네요. 천공의 신전이 노릴 만도 하고. 감사합니다.”
“호오? 조금 변했구나?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어.”
“몽상가라는 사람. 오지랖이 넓은 것 이상으로 천재인 사람이더군요.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른.”
“배운 바가 있으니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근데 너무 과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 말에 피식 웃는 에첸트로스님.
“너는 나에게 불가능한 것을 주었는데, 이 정도는 뭐. 그럼 종종 들리기나 하거라. 이야기도 들려주고.”
긴장한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만남이라서 다행이었다. 불퉁한 아프만 조금 신경 쓰일 뿐.
“왜 그렇게 뾰로통해 있어?”
[아니다! 나는 뾰로통하지 않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픈 아프를 위해서 [지고한 바]에서 밥을 해결하고 판테온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은 판테온이 아니라 이거지.”
[좀 웃기다고 생각한다. 금 하나 그어놓고 판테온, 판테온 외부 이러는 것이.]
“그래도 이곳에 살고 있다면 안전을 보장받잖아? 생각 이상으로 표정들도 밝고.”
[그건 가진 놈들이 바라는 것이 재화가 아니기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그중에 분탕을 치는 놈은 있고.]
“우러름을 받기 위해 시티를 만든다고 했지. 왕국은 아직인가.”
[그건 판테온에서 막고 있으니까 그렇다! 과반수 이상의 동의. 그것이 조건이다!]
“진짜 웃겨. 유일신을 만들기 위한 경쟁이라니.”
몽상가의 일생을 보고 난 후에 이 세상에 대해서 훨씬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천공의 신 에트라라고 했지. 음흉하기는.’
인간들이 대부분 모르는 사실까지, 아니 신전에 소속된 이들도 모르는 사실까지도.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뭘 어떻게 해. 그냥 구경하고 여행할 거야. 여기 좀 있다가 흑색거성만 들리고 바로 올라가야지.”
[흐응?]
“뭐 지들이 먼저 덤비면 상대는 해 주겠다만, 굳이 내가 먼저 나설 필요는 없지.”
[흐응. 퍽이나 걔들이 가만히 있겠다?]
“어차피 흑색거성에는 못 쫓아올 텐데 뭐.”
천공의 신전이 아니라면 귀찮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거리를 구경하고 다녔다.
하지만, 호텔에 다시 들어온 순간 자신을 귀찮게 하는 다른 곳이 생겼다.
“음…. 그러니까 이걸 주고 가셨다는 거죠?”
“예. 굉장히 예의를 차리며 건네주고 가셨습니다. 그럼.”
총지배인이 편지를 들고 오기 전까지는 편안한 공간이었는데 다시 불편해졌다.
“하아. 이걸 열어봐야 할까.”
손에 닿자마자 고급스러운 종이라는 것을 외치는 듯한 질감. 그리고 한가운데 박혀있는 불의 신전의 문양.
[빨리 열어 봐라! 궁금하다!]
“네 일이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 아니다.”
감이 외치고 있었다. 이걸 열어보는 순간 귀찮음이 밀려 들어올 것이라는 걸.
“빌어먹을 사속성 신전이 괜한 말이 아니었어.”
몽상가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몽상가가 오지랖이 넓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사속성 신전들이 끈질겼다.
은근히 사람을 부려먹는 솜씨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즐비했다.
“하아. 어쩔 수 없나.”
아예 관계가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손을 댄 상황이었기에, 편지를 열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중한 인사와 감사 인사까지는 좋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말은 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이걸 안갈 수도 없고. 진짜 빌어먹을인데.”
[왜! 정중하게 초대하는데 가야지! 심지어 그냥 객도 아니고 귀빈 대우해 준다는데!]
“너. 묘하게 신났다? 어?”
[아니다! 그나저나 불의 신전에서 귀빈 대우면 판테온을 들쑤시고 다녀도 된다!]
“들쑤시고 다녔다가 괜히 사건 사고에 꼬이는 건 별론데.”
그럼에도 판테온이라는 곳을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이미 얌전하게 다니기는 글렀는데 뭐.”
[좋아! 가자!]
쓸데없이 신나 하는 아프의 모습에 괜히 더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차라리 잘됐네. 찝찝해서 안 가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다 처리해야겠다.”
알리오츠가 준 패로 충분히 판테온에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으나,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대가 없는 호의가 아니라 찝찝함이 느껴지는 호의였기에 애초에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어떻게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귀찮지만 방법이 생겼다.
[뭐 하고 있는 거냐!]
“뭐 하고 있냐니. 씻을 준비 하잖아.”
[그러니까! 왜 나가는 게 아니라!]
“내일 갈 거야! 멍청아. 저녁인데 지금 왜 가!”
날개를 파닥이면서 난리를 피는 아프를 두고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진짜 은근히 놀려먹기 좋은 새라니까.”
아프가 아니었다면, 훨씬 재미없는 여행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거리 하나를 두고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는구나.”
평이하고 일상적이던 풍경이 거리 하나를 두고 특이하고 이색적인 풍경으로 변했다.
일상복을 입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칼을 차고 지팡이를 들고 활을 몸에 매단, 망토에 신전의 문양이 새겨진 사람들로 바뀌었다.
두 개의 건물을 제외하고 3층 높이의 건물들이 층고가 다양한 건물들로 바뀌었다.
신전의 터였던 곳도 보이고 중간중간에 무기 상점과 마법 상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
[판테온은 시티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신전들의 모임이니 더 그럴 거다!]
변하지 않은 것 하나라면, 여전히 아프와 함께 걸어 다니고 있을 때 받는 시선이었다.
다행히 불의 신전은 게이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사속성 신전이 모두 함께 모여있었다.
“신전들이 자주 바뀌나 본데?”
[사라지고 잊혀지는 신전들이 많으니까. 성전이라 불리는 전쟁이 종종 일어난다!]
“그 가운데에 이 네 신전은 바뀐 적이 없고 말이지?”
[그래서 애시당초 판테온이 세워질 때 사속성 신전을 위해서 혜택을 많이 줬었다.]
“은근히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는 새라니까.”
[새가 아니라 영수다! 멍청이!]
물, 바람, 불, 땅의 순서로 모여있는 사속성 신전이 꽤 조화롭게 지어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다시피 다가오는 인영이 눈에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수행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