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별거 아닌 부탁이었기에 알았다고 해주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기도 했기에 괜찮았다.
“아프. 진짜 너 때문에.”
[미안하다.]
의기소침해진 아프. 하지만, 정말 큰일 날 뻔하기는 했다. 이렇게 넘어가지 않았다면, 곧바로 전투의 시작이었다.
‘대충 할만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게 도화선이었을 테니까.’
전투를 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혈로를 걷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거기에 천공의 신전이 꽤나 끗발이 날려주는 것 같고 말이지.’
아프의 설명과는 다르게 천공의 신전은 그렇게 소박하고 다정다감한 느낌이 아니었다.
거기에 신전에 관한 이야기는 리퀴두스님께서 주신 책에 나오지도 않았다.
우선은 알리오츠가 추천해준 호텔로 향했다. 푸룸 시티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 말한 것처럼 신전과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알리오츠가 말한 대로 아리오츠의 패는 프리패스였다. 가장 좋은 최상층으로 안내받았다.
방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차단막을 만들고 아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몽상가가 누구야. 뭐 하는 사람인데.”
[하프 엘프다.]
“아니! 진짜!”
[이야기가 길다! 일단 뭐라도 먹을 걸 시키고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한층 의기소침한 아프. 그 와중에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이 웃겨서 넘어가 주었다.
“그럼 다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다! 이런 호텔은 음식을 시키면 가져다 준다. 저기. 저기에 쓰면 된다.]
주문 이후에 순식간에 음식이 만들어져서 올라왔다. 아프가 원하는 대로 주문했는데, 신기한 음식이었다.
[역시. 세월이 흘러도 치킨는 진리다.]
“치킨?”
[천상의 음식이다! 이 음식을 모르다니. 일단 먹어봐라!]
‘고작해야 닭을 튀긴 거 아닌가? 닭이 닭이지 뭐.’
아프의 성화에 손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바삭함과 고소함.
“와. 미쳤다.”
[말했지 않느냐! 천상의 음식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치킨 한 마리를 끝내고, 다시 시키려는 아프를 만류했다.
“몽상가. 말해주면 시켜주지.”
[치사하다! 음식으로 이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짓이다!]
말없이 은은한 분노를 담아서 아프를 바라보자, 치킨에 흥분했던 아프가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알았다. 알았다. 대신 꼭 시켜줘야 한다!]
약속을 하고 나서야 몽상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은 불명. 도를 사용하는 도객.
여기까지는 일반적이었지만, 그 이후가 달랐다. 우선 하프 엘프였다고 한다.
거기에 인간의 기준으로 교황급의 강자. 그리고 주장하기를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것이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몽상가로 불리는 거구나.’
인간들은 강함의 척도를 신전을 중심으로 구분하게 되었다는 부연 설명까지.
“야. 또 말 안 해준 거 있지. 빼먹은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아니다! 어떻게 그걸 다 한 번에. 그리고 경험하며 깨달아야 하는 부분이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해줄 이야기는 해줬어야지. 그러면 저 7개의 별이라는 사람은.”
[아마 추기경일 거다. 인간 사회가 신전 중심의 사회가 되고 난 후에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고 들었다.]
“애초에 왜 신전 중심의 사회로 변한 건데?”
[신이 생겨버려서 그렇다. 아니, 신이라고 착각하게 되어서 그렇다고 해야 하나.]
“무슨 소리야. 신이라니?”
[불사를 넘어서 불멸을 바랐던 인간이 있었다. 근데 나도 이건 들은 이야기라 부정확할 수 있다.]
“괜찮아. 이야기해 봐.”
[왠지 치킨이 있으면 기억이 잘 날 것 같다!]
결국에 치킨을 한 마리 더 시켜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치킨 하나가 전혀 아깝지 않은 이야기였다.
“흑색거성이라 이거지.”
[나중에 한 번 가게 될 거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글쎄. 솔직히 좀 구경해 보려고 했는데, 너무 아는 게 없어. 바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다. 확실히 그곳에 가면 적응이 빠를 수도 있고.]
“그리고 알리오츠. 왠지 쎄해. 그리고 이상하기도 하고. 결코, 내 수준이 아닌데.”
[아마 권능 때문일 거다. 그 권능이 신전 사회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으니.]
“사실 아직도 그 권능이라는 게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그건 말 그대로 권능이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거다.]
“확실히 여기가 새로운 세상이라는 게 느껴지기는 한다.”
아프와 이야기하는 동안 결정된 사항은, 역시나 이곳에서 바로 판테온으로 향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우리의 계획은 바로 수정되어야 했다.
아침이 되자마자 숙소를 나와서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죠?”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오늘은 게이트가 활성화 상태로 있어야 하기에.”
“그러면 게이트가 열린 곳으로는 갈 수 없나요?”
“죄송하지만, 이 게이트가 연결된 장소는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곳이라.”
“이 패를 지니고도 갈 수 없는 건가요?”
“예. 신전의 소속이 아니라면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알리오츠님의 패라고 할지라도 어렵습니다.”
[더러운 냄새가 난다!]
“하. 그럼 이 주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딘가요?”
“가장 가까운 도시라고 하면, 그린 스킨의 영토와 맞닿은 레스 도시가 가장 가깝습니다. 그곳은 게이트가 상시 가동이기에 이런 일도 없으실 겁니다!”
사제에게 레스 도시로 가는 방향에 대해서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나왔다.
“네 말대로 이상하지? 갑자기 뜬금없이 게이트가 사용 중이라고 하고.”
[아무리 보급도시라고 하지만, 이상한 건 사실이지.]
“그치. 거기에 알리오츠도 부재중이라고 하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무것도 없지 않나! 걸어가는 수밖에]
“그래. 걸어가야지. 레스 도시까지 길이 나 있다고 하니.”
동문을 통해서 들어왔다면, 레스로 향하는 길은 북문을 통해서 나가야 했다.
“이번 세상은 적응할 때까지는 꽤 고생하겠네.”
[이번 세상은 이라니? 그 전 세상도 있었다는 듯이 말한다?]
“아? 리퀴두스님에게 못 들었어? 나 5계 출신이야.”
[뭐랏? 5계라면 가장 기본이 되는 세계? 그럼 이번이 두 번째 세상이라는 것이잖아?]
“어.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리퀴두스님 밑에서 얌전하게 배우다가 올라가고 싶었는데 말이지.”
6년. 바로 전 세상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건 사고에 휘말렸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많이 성장하기도 했지만, 오지게 힘들고 귀찮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만큼 이번 세상에서는 정말 얌전하게 수련만 하다가 올라가고 싶었다.
거기에 인도자라고 배정된 존재가 드래곤. 경지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존재라 내심 기뻤다.
[하지만! 리퀴두스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원하지 않으신다!]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밖으로 보내신 것이겠지. 거기에 다른 조건도 있었지만.”
[숲으로 가는 길을 말하는 거구나!]
“뭐야?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어?”
[나는 모르는 게 없는 영수니라! 그리고 아마 나랑 같이 갈 수도 있다.]
“너도 숲에 볼일이 있어?”
[그런 게 있다! 빨리 움직여라.]
가끔 이렇게 의뭉을 떨 때를 제외하고 아프는 꽤 좋은 동반자였다. 우선, 심심할 일이 덜 했다.
“그래서 그린 스킨이랑 접경지역은 왜 생긴 거야?”
[생겼다기보다 만들어진 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인간대로, 그린 스킨은 그린 스킨대로 써먹는 거다.]
“만들어진 거? 각자 무슨 사정이 있는데?”
[그린 스킨의 탄생이 뭔지 너는 알 거다.]
“알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지만, 드래곤들의 유희의 산물이라는 정도는.”
[그래. 그렇기에 인간들이 말하는 그린 스킨이 아니라. 진짜 그린 스킨은 소수다.]
“그러니까. 혼혈들이 대가리를 맡고 있고, 그 밑에 놈들은 그린 스킨까지는 아니라는 거지?”
[정답이다! 공부를 게을리하지는 않았군. 그래서 어린 그린 스킨들의 교육의 장이 필요한 거다! 거기에 너무 많아지는 수를 줄일 필요도 있고.]
“대충 이해했다고 치고, 그럼 인간은? 굳이 저 경계가 필요한 이유가 있어?”
[있다! 인간들도 저 경계를 훈련의 장이면서 배출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흐응. 그래서 경계에는 신전에 소속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거구나?”
빤히 자신을 바라보던 아프가 날개로 머리를 톡톡 치더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머리가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할 거냐?]
“글쎄.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이 속도로 지나가고 싶기는 한데 말이지.”
말로 하루 거리라고 하기에, 문을 나서자마자 말보다 살짝 빠른 속도로 뛰었다.
아프와 이야기하는 동안 꽤 많은 풍경이 지나쳐갔지만, 별로 관심 밖이었다.
애초에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실감한 이상, 빠르게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도 한 번 싸워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너가 싸우려고? 그러면 나야 좋지!”
[너! 너! 너! 말이다. 이 세상에 전투를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하. 그래 알았다. 알았어.”
아프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속도를 조금 줄였다. 기척을 느끼는 것은 아프가 훨씬 범위가 넓었다.
“아무래도 알리오츠가 수를 쓴 거 같지?”
[그럴 거 같았다. 그리고 자기랑은 이어지는 고리를 없앴을 것이다.]
“영수주제에 왜 이렇게 빠삭해?”
[나를 노리는 인간들이 한 둘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리퀴두스님 옆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날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하긴, 플라멘 팔코였지. 영수 중에서도 영수라는.”
[그 맥아리 없는 말은 뭐냐! 영수 중의 영수니라!]
“영수라고 그러면 뭔가 좀 신성하고 영험한 그런 느낌을 상상하는데 말이지.”
[그런데!]
“아니. 너 엄청 신성하고 영험해 보인다고. 근데 이게 권능 중 하나인 건가?”
[글쎄. 신전마다 다르고 받는 사람마다 다르다. 웃긴 건 신전에서는 쫓겨났지만, 권능이 그대로인 이들도 있다는 점이지.]
“뭐. 구린 일을 시킬 때 써먹으려고 하나 보지. 지금처럼.”
생각해 보니 참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신이 그를 사랑하여 권능을 그대로 두고 그가 돌아서기를 기다린다.
“근데 진짜 이상하긴 하네. 확실히 마법도 아니고, 여기에 술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척이 느껴지는 거리에서부터 여기까지 훑고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마나의 유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진짜 천공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만이 느껴졌다.
“흠. 생각보다 까다롭네 권능이라는 거.”
[리퀴두스님께서도 비유하자면 용언(龍言)이 그나마 비슷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권능을 내릴 신이 그렇게도 많다 이거지.”
[많지는 않다! 실제로 몇몇은 권능과는 상관없는 신전이 있기도 하니까.]
“그거야 신도들이 모르니까 상관없는 거고. 와. 이런 게 가능하다 이거구나.”
단순한 거리로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느껴지기로 500보 이상의 거리.
그 거리에서 정확하게 머리를 노리고 쏘아지는 화살을 손에 잡으면서도 감탄이 나온다.
“하. 진짜 별의별.”
화살을 잡음과 동시에 터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폭발은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 했지만, 피어오르는 연기는 혹시 몰랐다.
하지만, 그 전에 따스한 바람이 불며 손의 그을음과 함께 연기를 날려버렸다.
[손이 많이 간다!]
“오오! 영수! 대단한데?”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다! 훗!]
확실히 아프 또한 꽤나 괜찮은 전력이었다. 특히 이 치유의 바람은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 조금 빠르게 뛰어볼까?”
한 번의 화살로 저쪽도 파악한 것이 있겠지만, 저쪽을 파악하기도 했다.
이 권능이라는 것은 시야만을 제공해 준다는 것. 그러면 거리를 좁히면 될 일이었다.
[신난다! 바람이 느껴진다! 더! 더! 더 빨리 뛰어라!]
시끄러운 영수 한 마리를 어깨에 매달고 스승님께 배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이내 바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