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꽤 다양한 것을 보고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여러 동물들, 마수, 몬스터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심지어 요괴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생명체가 동물이라는 범위에서는 가장 아름답노라 단언 할 수 있었다.
“아프라고 해. 예쁘지?”
“예쁜 게 아니라, 아름다운데요?”
티 없는 새하얀 깃털, 눈에서부터 시작해서 꼬리까지 이어진 하나의 황금 선. 보석같이 빛나는 하얀 부리와 함께 녹빛의 눈동자.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것만 같은 새가 날아오더니, 리퀴두스님의 어깨에 앉았다.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나. 썩 나쁘지는 않네.]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미성. 남자의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처음.
‘어? 남자의 목소리?’
“리퀴두스님?”
그저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리퀴두스님. 설마 했다. 아니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쯧. 보는 눈은 있는데 머리는 멍청한 건가.]
“아…프…?”
[아프님이라고 해라! 위대한 핏줄을 이은 이 몸이니라!]
“리퀴두스님? 새가 말을….”
“새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른 아이란다. 영수(靈獸) 중에 하나인 플라멘 팔코란다.”
“영수라면, 그 정령계가 닫히고 정령이 깃들었다고 하는 동물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꽤 공부를 열심히 했나 본데?”
“살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자세하게 적힌 책이 있는데도 안 읽는 건 태만이죠.”
리퀴두스님께서 주신 책 중에 [발바라대륙의 간단한 역사와 종족]이라는 책이 있었다.
최근 내용은 전혀 없었지만,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전반적인 종족과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나를 위해서 써 주신 것 같단 말이지.’
그런 배려를 받았는데도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건 태만이고 예의가 아니었다.
‘사실 재밌기도 하고, 그림도 마음에 들기도 했지. 영수를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플라멘 팔코라.’
그림에 그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성격은 좀 안 좋은 것 같기는 한데.’
“꽤나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저래 보여도 인간 세상에서도 오래 살아봤으니.”
“하지만, 영수와 다니려면 계약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는데요?”
영수와 함께 다니는 인간이 극히 드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우선 영수를 찾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찾는다고 해도 계약을 맺어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수의 삶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평균적으로 1000년을 살아간다고 했지.’
거기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하느니 소멸을 선택한다고 하는 자존심 높은 생명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꼭 동반의 계약을 할 필요는 없다고 쓰여 있을 텐데?”
“가계약! 하지만.”
[내가 친히 계약을 맺어주도록 하지. 인간 주제에 영광으로 알도록!]
새끼손가락으로 딱밤을 때리는 리퀴두스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훈계를 하신 듯했다.
“어차피 이 아이도 세상에 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좋은 동행이 될 거란다.”
조금 시무룩해 하던 아프는 부리로 아양을 떨더니 날아서 어깨에 앉았다.
[흠. 나쁘지 않군. 손을 내 부리에 가져다 대면서 마나를 불어 넣도록]
가까이서 보아도 참 흠이 없는 생명체였다. 저 아름다움에 성격은 왜 그런지.
아프가 시키는 대로 부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오러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오러가 아프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새햐얀 대리석 같았던 아프의 부리가 녹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보석같이 변해갔다.
‘와….’
손등, 아니 새끼손가락에 꼬리가 뻗치며 날아가는 아프의 모습이 하얗게 새겨지는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영광으로 알도록! 비록 가계약이지만, 위대한 핏줄의 자손인 나와 계약한 것을. 그래도 마나 하나는 참 마음에 드는군.]
“그래. 그래. 영광이다.”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올려보았지만, ‘감히’라는 눈빛과 함께 날개로 손을 쳐내는 모습마저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이곳에서 공부한다고 한들, 세상에 나가는 것이 너에게는 더 좋겠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리퀴두스님의 시선이 감사하면서도 무서웠다.
‘귀한 연구재료를 밖으로 돌리는 심정이신 것 같은데.’
“며칠 정도 아프와 함께 지내면서 준비를 하거라. 너도 너무 날을 세우지 말고.”
“감사합니다.”
아무리 인도자의 역할을 맡았다지만, 여러모로 많은 베풂을 받는 것 같았다.
*
아프와 만나고 나서는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갔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진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자. 가져가거라.”
랑쿤의 손에 들린 것은 자루 하나와 도갑, 그리고 하나의 반지였다.
“이게?”
“별건 아니고, 재화들과 신분증이 들어있는 자루다.”
하지만, 자루나 반지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도갑이었다. 마치 바오우와 색이 똑같은, 팔뚝보다 조금 짧은 도갑.
허리에 차보니 허벅지 옆을 따라 감기는 느낌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도를 잠시 가져가신다고 하시더니.’
팔뚝보다 조금 짧은 그 길이임에도 도가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그리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아귀가 맞았다.
“난쟁이 녀석들이 감탄하더구나. 특히나 그 금색 금속에 말이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네가 한 번 찾아가 보거라.”
“그. 드워프라는 생명체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손재주 하나는 뛰어난 이들이니 아마 네 도를 보면 군침을 흘릴 것이다. 굉장하다고 하더구나?”
리퀴두스님께서 뛰어나다고 하면 정말 대단한 이들일 것이다. 사뭇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반지는 쓸만한 마법이 걸렸으니 잘 쓰고, 나중에 센터 시티에 가면 [지고한 바]라는 곳에 가 바텐더에게 보여주거라.”
“쓸모있는 마법이라고 하심은? 그리고 [지고한 바]요?”
“자루 안에 있으니 잘 보면 된다. 그리고 바는…. 하. 그런 곳이 있다. 괴짜가 만든. 그럼. 잘 다녀오거라.”
아프가 아련한 눈으로 리퀴두스님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리퀴두스님의 손짓에 시야가 변한다.
서둘러 허리를 깊이 굽히며 감사를 표했지만, 보셨는지 모르겠다. 허리를 펴보니 숲이었다.
“아프. 여기가 어디야?”
[씁. 리퀴두스님 이야기를 뭐로 들은 것이냐! 이곳은 푸룸 시티 근처의 숲이니라. 신분증부터 꺼내라!]
잔소리가 많고 툴툴대지만, 은근히 잘 챙겨주는 아프였다.
자루를 열어보니 수십 개의 보석과 화폐, 그리고 로브가 보였다.
‘이 세상은 로브에 새겨진 거로 신분을 표기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했지?’
이 세상은 특이하게도 로브로 신분을 나타내는 세상이었다. 로브의 길이가 길수록, 재질이 좋을수록 귀한 신분이었다.
반가면이 새겨져 있었고, 그 밑으로 이곳의 언어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수행자의 문양인 거야? 밑에 보니까 [Pantheon]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만신전이라는 의미다. 아마 인간 세상에서는 수행자로는 가장 쳐주는 신분일 거다.]
“만신전이라. 그 해안에 있다는 신전을 말하는 거지?”
[그래. 뭐 겪어봐야 알 일이니, 어서 입고 쪽지나 꺼내 봐라!]
자루에 있는 쪽지에는 딱 반지의 성능만이 쓰여 있었다. 그걸 본 아프는 괜히 시무룩해 했다.
“언어 마법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거구나.”
리퀴두스님의 레어에서는 언어에 대한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못했었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 2일 차에 생각이 나 물어봤을 때, 설명해 주신 마법이었다.
[리퀴두스님에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괜히 자기가 우쭐거리는 아프가 웃겼다. 은혜를 입었다는데 도통 얘기할 생각을 안 했다.
“어때? 좀 이 세상 사람 같아?”
[흥. 나쁘지 않군. 역시 리퀴두스님이다!]
자신의 취향에는 조금 화려했지만, 검은 바지에 하얀 셔츠. 그리고 그 위에 가죽 갑옷의 형태였다.
어깨에는 보라색이 들어가 있고 갑옷 요소요소에 금빛의 금속이 존재했다.
“마법은 진짜 대단한 거 같아. 아니, 네 말대로 리퀴두스님이 대단하신 거지.”
본래의 세계에서부터 입고 있던 가죽은 놀랍게도 그 다음 세계에서도 꽤 상위 갑옷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아닌 듯했다. 아니, 리퀴두스님에게는 부족해 보인 듯했다.
전부 가져가시더니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옷과 가죽 갑옷이 함께 할 때 최상의 방어력을 나타낸다고 하셨다.
[당연하지! 게다가 리퀴두스님 휘하에 있는 난쟁이들이 이 세계 최고의 난쟁이들이다!]
“꼭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수인을 본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어디까지 날로 먹을 생각이냐!]
“알았어. 알았어. 진짜.”
진한 회색의 로브를 그 위에 입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숲에서 난 길을 걸으며 아프에게 잔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잘 인도해야 하는 이 무거운 사명을 네가 알까.]
“솔직히 어깨에 네가 있는 게 더 무겁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괜히 한 마디 건넸다가 날개로 뒤통수를 맞았다. 사실 날개가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았다.
[씁! 고귀한 이 아프님을 어깨에 둘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그런데 이 숲에는 몬스터가 없어?”
이 세상에서 보고 싶은 것 중에 하가 몬스터였다. 특이하게도 그린스킨이라는 종족과 몬스터가 나뉘어 있었다.
[너는 몬스터 볼 일이 거의 없을 거다.]
“응? 왜?”
[당연히 이 위대하신 아프님과 함께하기 때문이지. 몬스터는 특히나 영수에 민감하다.]
“그냥 네가 좀 기척을 없애면 안 되냐?”
[감히 그럴 수 없다! 이 몸은 존재만으로 빛나는 영수이니라!]
“그래. 너 잘났다!”
그렇게 걷다 보니 숲이 슬슬 끝나는 지점에 다 와 갔다.
“그래서 푸룸 시티는 조금 작은 편이라고 했지? 이제 막 태동하는.”
[뭐. 차이는 있겠지만, 여전히 작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상상을 아무리 해봐도 어떤 모습일지 감이 안 잡혔다. 하지만 그 의문은 얼마 안 가서 풀렸다.
숲에서 아직 나오기도 전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푸룸 시티가. 아프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막 태동한? 작은? 시티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이…. 이럴 리가! 분명 150년 전에는!]
“150년 전이면 한참 전이잖아!”
[아니다! 여기는 푸룸 시티가 아닐 것이다! 정겹고 소소한 곳이란 말이다!]
“저기에 대놓고 푸룸 시티라고 거대하게 적혀 있는 건 안 보여?”
[이상하다. 이상하다. 아니다! 우선 들어가 보는 거다!]
“네가 말해준 것도 다 너무 예전 이야기인 거 아니야?”
[시끄럽다! 그리고 각오해라.]
“영수의 선택을 받은 자. 뭐 이런 거?”
[그렇다! 거기에 멍청한 인간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마치 영수의 주인을 죽이면 자기가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내가 그리 착한 편이 아니더라고.”
아프와 대화를 나누면서 푸룸 시티의 앞에 도착했다. 특이하고 거대한 푸룸 시티가 눈앞에 위용을 드러냈다.
거대한 장벽, 그 위로 드러나는 하늘을 찌를 것 같은 하나의 탑. 마치 모든 건물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