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범아! 나 왔어. 진짜 걱정했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게!”
“하아. 너 동대륙에 있는 거 아니었냐.”
“당연히! 너가 걱정돼서 바로 왔지! 진짜 다행이다. 너 쓰러져 있는 걸 보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탄탄하고 이기적인 기럭지를 가진, 거기에 더해서 온화하면서도 막대할 수 없는 분위기까지 풍긴다.
그런 주제에 자신 앞에서 여전히 어린애가 되는 마틴이 이해가 안 갔다.
“주교님 대행으로 있다면서 그렇게 막 와도 돼?”
“뭐야. 서운하다! 당연히 잘 알아서 하고 왔지. 진짜 고생했어. 진짜 미안해.”
왜 보는 사람마다 미안하다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낯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됐어. 왜 니가 미안하다고 하냐. 근데, 너가 여기 와도 되는 거야?”
[맘몬]의 수장이 죽었고, 대부분의 세력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재인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무사히 동대륙까지 간 뒤 흔적이 사라졌다. 량이 얼마나 분해했는지 기억이 선명하다.
실질적으로는 아직 [맘몬]이 끝났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상황. 그 상황에서 마틴이 여기에 온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전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을 테니까.’
오즈안이라는 최근 사례가 있었다. 아무리 독단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은 독단이 집단의 행동이 되는 법이었다.
‘후. 진짜 난리도 아니었다고 듣기는 했는데, 보지는 못 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나름 잘 살아왔다는 반증이었던 것 같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항의를 했었다.
마틴, 카인, 량 그리고 스승님은 나름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파울로님이 나서기 시작하자 진짜 심각해지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거기에 마르쿠스의 가문과 로사의 가문, 불스 수호 용병대까지.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거기에 한 제국의 황제가 항의 서한을 보낸 게 거의 방점을 찍었다고 봐야지.’
“뭐 어때! 가끔 나도 막 나가고 그래야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어이. 넌 중립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었냐.”
“에이.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래. 원래 다 그렇게 부딪히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지.”
“근데 뭐 물어봐도 돼?”
“응! 그럼!”
“오즈안님. 아니 오즈안은 왜 그런 거야? 갑자기?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무투의 탑]에서 보았던 오즈안은 성하를 성실하게 수종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아르데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런 일을 꾸밀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가.’
“음….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아이 때문에 그래. 결국 그녀를 살리기 위함이지.”
“아이가 누구야?”
“아! 재인의 엄마. 구역주의 이름이기도 해. 그리고 오즈안님의 수양딸이지.”
“수양딸…. 근데?”
수양딸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친자식도 버리는 마당에 수양딸을 위해서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오즈안 정도의 인생을 살아왔고, 경험을 했는데?’
“아. 나도 조금 이상하다 여기긴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럴 만도 한 것 같더라.”
마틴의 이야기를 듣고도 별로 와닿지 않았다. 정을 준 것은 알았지만, 그래야만 했을까 싶기도 했다.
‘만약에 마틴이나 카인이 그랬다면, 아니 애초에 그냥 그편에 섰겠지? 아니면 쥐어패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했던가?’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대충 말을 들어보니 아이라는 사람도 살아있는 것 같은데.”
“신력(信力)을 제한할 거야. 그리고 아마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겠지.”
“신력?”
“마틴! 왔으면 말을 해 줘야지. 왜 치사하게 범만 찾으러 가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카인! 잘 지내고 있었어? 어떻게. 키는 안 크고. 내가 잘 먹으라고 했지!”
‘카인은 왜 이 시기에 와가지고, 물어보기가 애매하게 됐네.’
카인을 시작으로 하나둘 7층에 모이기 시작했다. 알려진 비밀기지로 사용하겠다는 량의 생각아래 하나둘씩 해체가 시작되었다.
7층은 량의 지휘 아래 이미 이곳은 하나부터 열 끝까지 해체와 설치가 끝난 곳이었다.
수호대, 로사, 량, 카인 그리고 마틴까지. 또래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래서. 판을 깔아 줬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량의 한 마디에 정리가 되면서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이번 연도 마지막 날에.”
입을 열었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한 명 한 명의 얼굴들이 크게 보인다.
전생에 자신이 버려두고 나와서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던 마틴은 이제 최연소 주교가 될 예정이다.
아카데미에서 소문이 없었던 카인은 지금은 가장 잘 나가는 소식지의 창단자가 되었다.
천재라는 수식어보다 괴물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학살이라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든던 량이는 한 여자의 남자가 되었다.
블러디 제노사이더라고 불리며 처참한 불꽃 같은 인생을 살았던 마르쿠스는 이제 동년배에 적수가 없다.
후계 전쟁을 통해서 후작이 된 로사는 이제는 자신만의 길을 걷는 한 명의 검사가 되었다.
‘진짜 많이 변했구나. 정말 별거 없는 나 하나가 다시 살아간다고 이렇게 크게 변할 줄이야.’
이제는 블레어 왕국과 시디야 왕국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모두 흘러가고 나서야 다음 말을 할 수 있었다.
“이번 연도 마지막 날에 올라가려고 해. 이곳을 떠나서 상위세계로. 신청은 해두었어.”
그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막상 입에서 나오니 표정이 다양했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카인과 량, 괜찮은 척하지만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마틴.
‘로사가 가장 담담하네?’
모두가 각기 다르지만, 같은 요동함을 보일 때 로사는 기다려라 나도 간다의 표정이었다.
‘어차피 올라가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상위세계는 30개가 넘었다. 아예 새로운 곳을 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정리하고, 가기 전까지는 중앙신전에 있을 거야. 모두 그곳에서 다시 봤으면 좋겠다.”
할머니에게 잠깐 들리고 나서, 바로 중앙신전으로 갈 예정이었다.
‘시험도 미리 봐야 하고, 수호성이랑도 가장 가까우니까.’
“언제든 찾아와. 웬만해서는 중앙 신전을 떠나있지 않을 거니까.”
“난 좋아! 중앙신전 아주 좋은 선택인 거 같아!”
“전. 가시기 전까지 언제나 범님 곁에서 모실 것입니다.”
“대장! 나도 휴가 냈어! 대장 곁에서 빼 먹을 만큼 빼먹어야지!”
마틴과 마르쿠스 그리고 마니에르가 경쟁적으로 소리친 후에 다시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량의 신호에 따라서 방에는 간단한 다과와 함께 잊을 수 없는 모양의 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거? 저게 다?”
“응. 뭐. 정기적으로 받으니까. 꽤 많이 쌓였더라고.”
대충 보아도 십 수병이 보이는 술은 다름 아닌, 한 병에도 수호용병대장을 떨게 한 [포이드]였다.
“역시 대륙 제일의 부자….”
“를 스승님으로 둔 거지. 여기 있는 사람은 괜찮으니까. 어디 한 번 갈 데까지 가 보자.”
그중에서 가장 눈을 빛내는 게 마틴이었다. 사제 주제에 눈빛이 아주 초롱초롱해졌다.
수많은 흑역사를 남기면서 그 하루는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
“진짜 세상에서 가장 쪽팔리고 어색한 순간이었어. 그치?”
“….”
“너희를 내가 지켜주겠어! 나는 이제 지킬 것이 있는 남자니까!”
플라스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지만, 손쉽게 피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결코 단 하나의 결점도 없는 남자가 될 거야!”
“…죽어.”
진녹빛의 플라크스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녹빛 연기가 자욱해진다. 들이마셔 보니 독인 듯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너는 떠나지만, 내 후예들은 너를 꼭 기억할 거야. 목숨을 바쳐 나를 살린! 야! 그만해! 그건 아니지! 그만하면 될 거 아니야!”
량을 놀리다가 량이 꺼낸 포션병을 보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장난 좀 친다고, 마스터 팔짝을 떼어가는 독을 꺼내는 게 말이 되냐!”
“너가 여기서 죽으면, 그리고 그 방에 사람들을 다 죽이면 될까?”
“에이. 늦었지. 카인을 뭘로 보고. 이미 대부분은 다 알고 있을걸?”
“나쁜 새끼…. 자기도 엄청 징징댔으면서.”
“너도 뿌려. 그 날에 승자는 아무도 없잖아. 그냥 다 죽는 거지 뭐.”
“[포이드] 생각보다 더 위험한 물건이었어. 정확한 범위의 기억을 삭제하는 포션을”
“헛소리하지 말고, 할머니는 넌 왜 부르는 건데?”
“장모님께서도 이제 곧 정리될 거라는 걸 아시는 거지. 아마 승계를 원하시는 것 아닐까 싶어.”
“승계?”
“응. 승계. 초인, 그중에서도 세계를 멸할 능력이 있는 초인들에게 걸리는 제약. 그 제약을 나에게 넘기시려는 거겠지.”
“그게 가능해? 아직 너.”
“완전한 승계는 불가능하지만, 후계를 통한 순차적인 승계는 가능하지. 그러면 장모님도 다시 기회가 생기는 거고.”
“과연. 그래도 올라가시려고 할까?”
“이론이긴 한데, 아마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상위세계로만 가는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뭐. 할머니도 끝을 보실 수 있다면 좋지. 넌 어떻게 하려고.”
“나야 똑같지. 보고 분석하고, 찾아내야지.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참. 너처럼 그렇게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나에게는 선택의 문제니까. 그리고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할머니가 계시는 로즈 아일랜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오로지 속도에만 집중하는 [칼라]의 항해는 무시무시했다.
“내 새끼! 이 빌어먹을 인사가 헛지랄을 했다고 들었다. 내가 진짜.”
“할머니!”
“그래. 고생했다. 고생했어. 걱정하지 말거라. 그놈에 인사는 절대로 이 세상 빛을 못 보게 만들 것이니.”
“괜찮아요. 전 어차피 올라가니까, 다른 친구들을 조금만 보살펴 주세요.”
“아이구. 기특한 녀석. 그래 걱정 말거라. 내 조금씩은 봐 주도록 하마.”
할머니의 조금이라는 소리에 마음이 완전히 놓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할머니를 어쩔 수 있는 이는 있어 봐야 성하뿐일 것이기에 그랬다.
“할머니 그런데.”
“재능이 이상하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너를 보면 알 수 있지. 이래 봬도 초인이란다.”
“그럼 이게 정말로?”
“뭐. 출발선에는 섰다고 할 수 있겠구나. 올라가는 시기에 맞추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렇게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는데요.”
“그것이 이제 진정한 너의 재능이 되어서 그렇단다. 너와 하나가 된 것이지. 어차피 나도 중앙신전에 있으려 했으니 가기 전까지 이 할미랑 시간을 보내자꾸나.”
“할머니….”
확실한 점 하나는 다시 살면서 인복이 비교할 수 없게 풍부해졌다는 점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할머니는 량을 데리고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하시며 다음 날 아침에 돌아오셨다.
한결 홀가분해진 할머니와,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량이 대조를 이루었다.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내심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막둥이가 보물을 물어왔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네 스승이 안 말린 것을 생각해 보렴. 너에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터이니.”
“뭐. 그건 그렇지만, 복잡한 건 사실이니까요.”
“어차피 올해 말까지는 너도 카인도 중앙신전에 있거라. 잡스러운 걱정은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맡기면 되니.”
“하아. 그래야겠네요. 그 점은 또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물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답해 주지 않는 두 사람과 함께 중앙신전으로 향했다.
항해를 시작하고 할머니의 능력이 곁들여지니 [칼라]는 미친 듯이 뻗어 나갔다.
“아! 망아지도 중앙신전에 아마 도착해 있을 거다. 몇몇 데리고 온다고 하더구나.”
“불스님이요?”
중앙신전의 항구가 눈에 보이자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사실에 더욱 기대되었다.
‘모두가 이렇게 와 주는 게 진짜….’
자신과 인연이 깊은 이들이 하나같이 모두 중앙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심 가기 전까지 복잡한 심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상위세계….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