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재인이 저렇게 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분명히 저거 분탕 칠 텐데. 저 인간도 그걸 모를 리 없고. 하. 진짜.’
“이 일. 절대 당신 홀로의 책임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신전과 분리를 시작할 것입니다.”
“감히! 성하께서 파울로를 몇 번이고 봐주었는데!”
“스승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신전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주셨고요. 더 이상 신전에게 끌려갈 이유가 없습니다.”
“네가! 파울로의 제자라고 막 가는구나!”
“근데. 그래서 불만입니까? 하.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입니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나도 빨리 힘을 키워야 해. 내 힘이 부족하면 다른 힘이라도.’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억압으로 점철되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진다. 부탁을 구걸하는 분위기가 된다.
“아니. 왜. 그대가. 후.”
“왜. 저는 이 자리에 등장하면 안 되나 보죠? 막말로 통신구가 없었다면, 저는 제 제자를 [맘몬]에게 잃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그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 마시지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충분히 들었습니다만.”
“내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성하께 정식으로 항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제자에게, 그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상처가 생기는 순간. 전 미쳐 돌아버릴 것 같습니다. 알아서 하시지요. 량아.”
“네. 스승님.”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신전에 호구로 보인 모양이다. 이러니 그렇지. 이후에 다시 이야기해 보자꾸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억압하던 이가 졸지에 수호자가 된 이 순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대체 할 수 없는 힘이 있어야 해.’
그때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확률은 최대한으로 올리기는 했지만, 범아….’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순간 정신을 잃었다. 너무 서둘렀던 걸까. 역으로 당해서 회오리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목을 노렸지만, 도리어 턱과 가슴을 맞고 눈을 떠보니 회오리 밖이었다.
‘회오리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저거.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별다른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자연스럽게 밀려 나온 듯했다.
회오리가 점점 약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의 오러로 이루어져 있기에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단 한 번의 기회. 아니 확실히 몇 번 남지 않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니.’
회오리의 앞에 섰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진다. 꽤 신선했다.
도를 심장 앞에 세운다. 중단세. 참 지겨우면서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기본자세.
처음 도를 배웠을 때, 스승님께 수도 없이 혼나면서 만든 자세였다.
도날에 집중한다. 가진 모든 재능을 도날에 세우고, 세우고, 또 세운다.
분명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있는 그대로 쥐어 짜낸다. 도날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다. 단 한 번. 이렇게 준비할 시간이 있는 기회.
‘후우.’
준비를 마치고서 오러와 기세를 갈무리한다. 그 즉시 점점 약해지는 회오리.
바람 사이로 보이는 아르데오는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눈에서 나오는 피눈물과 유리색의 눈동자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온몸에서 햐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푸석해지고 점점 몸이 말라가고 있는 듯했지만, 근육은 그대로였다.
‘그대로 한 번에.’
회오리가 온전히 사라지기 이전에 앞으로 나섰다. 아르데오도 같은 생각인지 앞으로 나오는 것이 보인다.
‘아르데오를 베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벤다는 느낌. 앞의 모든 것을 벤다는 느낌으로.’
묘한 느낌이 온몸을 관통한다. 재능을 일깨우고 남다르게 보이던 세상이 순간 환하게 변한다. 마치 재능이 없던 그때처럼.
어떻게 베어야 하는지 알려주던 본능도 사라진다. 무엇을 베어야 하는지 보여주던 실금들도 사라진다.
두렵고 떨려야 하는 순간이지만, 너무도 평안한 마음이 든다. 확신이 있었다.
그대로 도를 내리그었다. 회오리가 잘린 듯한 착시가 보인다. 흩어지는 회오리 안에는 아르데오가 오연하게 서 있었다.
‘실패인가…. 꼭 상위 세계로 가고 싶었는데.’
하염없이 흔들리고 흔들리던 마음을 이제야 다 잡고 진심으로 상위세계를 가고 싶었다.
그저 정점이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진짜로 도의 끝을 보고 싶었다.
자신의 재능의 끝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뭐. 량이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괴물을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온몸에 힘이 빠지고 자연스럽게 무너지는 몸이 느껴진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몸이 무너지는 한순간이 길게 느껴진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아니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떻게 다시 태어났는데, 이 자리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지금 무너질 수 없었다.
무너지는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어디든 힘을 줄 수 있는 곳에 힘을 주었다.
무너지던 몸을 한 다리로 지탱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괜찮았다. 넘어지지 않고 한 무릎만 꿇린 상태가 되었다.
도를 땅에 박으면서 어떻게든 일어났다. 전신이 떨려오지만, 다시 두 손으로 도를 잡고 아르데오를 바라보았다.
오연하고 권태로워만 보이는 아르데오였는데, 이제는 오연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뭔지 몰라도 다시 회복한 듯싶었다. 순간 고개를 드는 절망감을 발로 밟고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하. 진짜 무심하시기도 한 분이시지. 안 그러나? 왜 꼭 이렇게 되어서야 깨달음을 허락하시는 걸까.”
개소리라고 소리치기에는 무언가 분위기가 묘했다. 자신에게 미물이라고 소리치던 아르데오가 아니었다.
“참. 한(恨) 많은 인생이었어. 왜 그리도 아집에 사로잡혔을까. 아쉽구만.”
흰자위가 온통 붉었던 것이 점차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변수라. 기회였나 보군. 아쉽네. 아쉬워. 그대는 꼭 끝을 보게나. 대단한 재능이야.”
말이 끝나는 동시에 미끄러지듯이 상체가 대각선으로 잘려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응? 상체가 왜 미끄러져? 뭐지?’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싶었다. 새로운 능력인가 긴장을 하고 있다가 이내 깨달았다.
“내가…. 내가…. 이겼어? 이겼어! 살았어!”
억지로나마 힘을 주어서 일어서 있던 몸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았지만, 기쁘지 그지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나갈 걱정을 하다가 의식이 사라졌다. 그대로 기억이 끊겼다.
*
눈을 떠보니, 똑같은 천장이 자신을 반기고 있었다.
‘기절했어? 그나마 누구도 안 내려와서 다행이긴 한데. 어?’
바닥이어야 했을 곳이 무언가 파져 있는 것처럼 들어가 있었고, 익숙한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범아! 범아! 일어났구나! 살아났구나! 다행이다. 다행이다!”
자신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카인! 너 전쟁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있어?”
“멍청아! 일주일이나 기절해 놓고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데!”
“일주일?”
멍하니 있는데, 저 멀리서 쭈뼛거리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넌 또 왜 그러고 있는데?”
“미…. 미…. 미….”
“뭐. 아파? 왜 그래?”
“미안하다고!”
“무슨 사과를 사랑 고백하듯이 하냐. 됐어. 이게 니 탓이냐.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도. 진짜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했어.”
“어차피 다시는 안 그럴 것도 알고 나도 각오한 거니까 진짜 괜찮아. 그나저나 나 나가도 돼?”
“잠시만.”
쭈뼛거리던 량이 온통 붉어진 얼굴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는 목에 손을 얹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은, 아니 오히려 더 몸이 좋아진 것 같은데.’
더욱이 신기한 점은 이제 더 이상 선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언제나 달고 다니던 선이 사라지니 세상이 더 밝아졌다.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리 조절을 해도 실금은 살짝 보였는데, 이제는 안 보인단 말이지.’
그렇다고 재능이 사라지거나 퇴화한 것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베면 벨 수 있다는 것을.
‘가기 전에 할머니께 꼭 여쭤봐야겠네.’
“좋아. 몸 상태가 훨씬 좋아졌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저거 뭔데?”
“응? 뭐가. 나 지금 일어났어. 아무것도 모르는데 말하면 아냐?”
“저거.”
량의 손을 따라 올라가는 시선이 이내 정지된다. 눈에 박히는 도흔(刀痕)이 걱기에 있었다.
“저게…. 뭐야?”
천장에 박힌 도흔은 눈을 사로잡을 만했다. 아니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도흔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나뉘어져 있다는 듯이 난 도흔. 도흔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보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본래부터 갈라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매끈했다. 아니 그사이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너가 물어보면 어떡해. 아르데오는 반 토막 나 있지. 저 도흔이 새겨져 있지. 내가 나중에 저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저걸 내가 한 거라고? 진짜로?’
오러도 없이 벤 결과가 저것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얼마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싸우는 내내 아르데오가 점차 이상해지던데?”
“역시! 효과가 있었구나.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응? 뭐를 했는데 그렇게 변한 거야?”
“나도 처음에는 확신한 건 아니었어. 오즈안 그 인간이 말을 하니까 한 거였지.”
‘오즈안? 이제는 님이라고 않는 걸 보니, 완전히 돌아섰구나.’
“그런데 스승님께 여쭈어보니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더라. 너가 생각하기에 아르데오의 능력이 뭐였던 것 같아?”
그런 것을 생각할 새도 없었다. 살아남기 급급했다. 입을 열면 이상해졌다.
‘가만. 입을 열면? 설마. 에이. 그런 능력이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해 보았다. 말을 하면서도 믿겨지지 않았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
“그런 능력이 있으면, 못 하는 게 없게? 하긴. 진짜 알기 힘들기는 하지.”
이어지는 량의 설명도 충분히 사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정확하게 보는 능력이 그렇게 변하는 게 말이 돼? 도대체 선천 재능은 뭐지?’
어떤 방식인지 모르지만, 상대의 가장 깊은 곳을 보고 선천 재능을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었다.
‘뭐라고 장황하게 설명은 하는데,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확 되는 부분은 있었다.
‘제약 같은 건 있으니까 그나마 사람 같기는 한데, 그래도 충분히 괴물 같은데.’
선천 재능을 아래로 흐르는 길을 보고 열어주는 것 모두 아르데오가 담당했다고 한다. 아르데오가 아니면 할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선천 재능의 연결이 일어날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끊어지면서 아르데오의 재능 자체에 타격이 가는 거라는 설명이었다.
‘솔직히 진짜 선천 재능이라는 건 뭔지 알 수가 없네. 이해할 수가 없어.’
아무리 사람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선천 재능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 싶었다.
‘파도를 일으키는 할머니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건데.’
알면 알수록 이 선천 재능이라는 것이 너무 신비하고 이상했다.
‘관리자님께 꼭 물어봐야겠다.’
“아! 너가 기절해 있는 동안 완전 난리 난 거 알아?”
“응? 무슨 일이 또 있었어?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기는 앞으로 우리 아지트 겸으로 사용하려고.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아. 진짜. 잘 산 거 같은데 왜 도대체 주변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