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할머니의 저택에 돌아왔을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모 삼촌들뿐만 아니라 각 대대의 대장들, 구역주들 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엄청 무거운 분위긴데? 내가 아는 해적들의 분위기가 아니네.’
이 자리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대놓고 티 내지는 못하지만, 경직되어있는 이들이 보였다.
‘할머니 표정도 썩 좋지 않으신데.’
바다의 황제로 불리지만, 황제라기보다 대모이자 동료로 보였던 모습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의 분위기는 자신이 보아왔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왔구나. 딱 맞춰서 왔으니 슬슬 시작할까?”
량은 남아 있는 하나의 자리에 가 앉았고, 자신과 카인은 할머니의 뒤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차라리 이렇게 벽에 붙은 의자에 서서 보는 게 마음 편하겠다. 너는 몰라도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그치? 저 한 가운에 있으면 진짜 숨도 못 쉴 거 같은데, 량이는 어쩌냐.”
“근데 자식들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는 범이 네가 유일하게 여기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치면 네가 여기에 있는 것도 엄청 이상한 거지. 할머니는 왜 너랑 날 여기에 부른 거지?”
약간의 의문과 함께 회의 아닌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선 것은 5대대의 대장이었다.
“대모님. 여기에 저희를 따로 소집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왜? 그래서 불만이니? 아니면 혹시라도 내가 다시 나설까 걱정이니?”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여는 5대대장이었지만, 보기 싫었다.
‘간신배 같은 인간은 어디에나 있구나. 웃는 게 저렇게 보기 싫은 사람이 또 있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있습니까? 저희야 대모님께서 전면에 다시 나서신다면 영광일 뿐입니다.”
“그 저희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네?”
아차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그 찰나를 놓칠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저희라면 우리 모두를 말하는 것임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모님을 위해서라면.”
“됐고. 은퇴를 번복 할 생각은 없다.”
그 말에 정말 다양한 미세한 표정들이 나타나는 이들이 보인다. 역시 완벽한 조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카인과 량이 가르쳐준 게 영 꽝은 아니었네. 대충은 보이는구나.’
사람의 표정을 분별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려고 무진장 애쓴 둘이었다.
‘진짜 재미없었는데, 지금 보면 은근히 쓸모가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을 보던 중, 다시 할머니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 은퇴를 하는 마당에 내가 준 것들을 거두어가야 하지 않겠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모두가 바뀌어있었다. 아니겠지 하는 표정들이 모두 무너진다.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 1대대 아이들이 너희 배의 기를 거두고 있을 거다.”
“대모님! 그것은 선물이 아니셨습니까? 거두어가신다니요!”
대표적으로 나선 이는 역시나 5대대장이었다. 다급한 목소리에 그 깃발이 무언가 있나 싶었다.
“선물이었지. 너희의 선대가 나의 슬하에 들어왔을 때 내가 준. 하지만, 이제는 내 슬하가 아니지 않니?”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없다면 뭐? 그 정도도 하지 못하면서 감히 해적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 생각하니?”
할머니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듯이 조용해지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를 상징하던 패도 다시 거두어 갈 것이니. 나갈 때 두고 가도록.”
“너무하십니다! 그 패는 저희를 상징하는!”
“너무하다. 너무하다라? 감히 나에게 너무하다고 표현하는 거니?”
할머니의 좋지 않던 표정에 기세가 더 얹어지니 더욱 무겁게 가라앉는다.
“너희가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이가 누군지 망각하고 있는가 본데.”
할머니의 기세가 점점 무거워진다. 탁자들과 의자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황제의 앞에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습니다.”
탁자의 가장 끝. 할머니와 가장 떨어진 장소에 있던 이가 힘겹게 일어나 무릎을 꿇으며 말하는 것이 보인다.
‘존재감이 엄청 희미한 사람인데, 생각 이상으로 강한데?’
특이한 연공법을 익혔는지 자신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뻔했다.
‘마스터라. 진짜 해적은 괴물들이 많은 곳이라니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절로 일어나는 존재감이 있다. 그런데 무릎을 꿇은 사람은 그 존재감마저 희미했다.
“프라츠. 역시 너는 언제나 입속의 혀 같구나. 그것이 진심일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기세가 조금은 줄어든다. 하지만, 여전히 공간을 짓누르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1대대~3대대까지는 중립이다. 그러니 상선들의 호위를 모두 이들에게 맡길 것이다.”
그 말에 퍼그님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 이상으로 찌푸려지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각자가 따로 계약한 상단은 알아서 하도록 하고, 거기에 더해서 10대대는 해체할 것이다.”
눈을 빛내는 이, 그럴 줄 알았다는 이, 안타까워하는 이. 다양한 표정이 그려진다.
“뭐. 이 정도려나. 아! 그리고 동도는 어떻게 한다고? 네가 온 것을 보니 확정이 된 것 같은데. 말해 보렴.”
한 제국 특유의 복장을 한 이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입을 연다.
“저희는 이 전쟁에서 어떠한 간섭도 지원도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저 동도는 동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좋아. 그리고?”
“또한 해적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구역주로서만 있을 것입니다. 후일 정해지는 해적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알았어. 확실히 처리해 줄게. 그럼. 먼저 나가 보렴. 나중에 따로 보자.”
할머니의 말에 깊게 숙인 인사를 다시 한번 한 뒤 조심스럽게 나간다.
“그럼 서도의 구역주들은 어떻게 하려나?”
가장 먼저 일어선 것은 량이었다. 한 무릎을 꿇고 가슴을 손에 댄 채로 이야기한다.
“블라우의 구역주로. 그리고 하나의 해적으로 이 경쟁에 발을 들일 것입니다.”
그 자세 그대로 있는 량이. 그리고 할머니께서 다른 구역주를 바라보자 모두 일어나 량이와 비슷한 자세를 한다.
세 사람 모두가 자신들은 구역주로 경쟁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 모습에 신기했다.
‘확실히 량이 말 대로 진행이 되는구나. 진짜 소름 돋는다.’
“그래.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질문 있으면 말하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으로 너희의 대모로 있는 순간이니.”
그 말에 5대대의 대장이 바로 입을 열어서 질문을 던진다.
“후일 경쟁이 완료된다면 1대대와 2대대 그리고 3대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하? 그것이 무슨 상관이지?”
“하지만, 경쟁이 끝난 후일에도 그들이 만일.”
“그 말 자체가 네가 해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도대체가.”
할머니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5대대의 대장.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시고 계속 말을 이어가신다.
“내가 은퇴를 한다고 했지, 언제 승자에게 내 자리를 물려준다고 했지?”
그 말에 움찔하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도대체가 너희는 해적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바다의 황제라는 이명이, 자리가 물려 줄 수 있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냐!”
말을 하던 할머니께서 점점 감정이 격해지셨는지,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셨다.
“도대체 해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도대체가! 하. 아니다. 되었으니 모두 패를 두고 나가거라.”
혀를 차는 8대대의 대장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가 나갔다.
‘와. 이런 것도 가능해? 진짜 섬세한 운용인데.’
자신의 발을 살며시 잡고있는 물방울들이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저는 왜?”
“네가 아니면 내 분노를 받을 이가 없으니 말이다. 참 여러모로 귀찮구나. 따라오거라.”
순식간에 사라지는 할머니. 그리고 물방울들이 위치를 알려주듯 방울져있었다.
“하아. 진짜 또 구르고 구르겠네.”
작은 한숨을 내쉬며 물방울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간다. 그리고 도착한 장소는 몹시 익숙한 장소였다.
“할머니. 여기는 좀 너무하신 것 아닌가요.”
“아니다. 연해로 할 것이니 알아서 잘 피하고 막고 하거라. 아마도.”
황급하게 도를 쥐었다. 그리고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깨우기 시작했다.
“왜! 도대체! 어찌해서 이렇게 변한 건지!”
할머니가 말을, 아니 소리를 지를 때마다 물방울들이, 파도가 자신에게 짖쳐든다.
“해적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가만히 있었나?”
할머니의 단순한 화풀이에 바다가 요동친다. 이것도 심지어 조심하시는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진짜 위험하다는 건데. 진짜 잘못 하면’
점차 생각할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잘 막는다 싶었는지 더욱 빨라 진다.
‘그래도 내 정면에 집중이 되어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물방울이 물줄기가 되어서 날아오고, 파도가 자신만을 노리며 다가오는 기괴함.
그런 주제에 강도가 상상치도 못할 정도였다. 자신의 재능을 담아야 겨우 자를 수 있었다.
쌓인 것이 많았는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할머니는 여전히 화풀이 중이셨다.
‘오러가 담겨있는데도 답이 없구나. 할머니.’
“진짜! 확 다 쓸어버릴까 보다!”
그 순간 마지막으로 보이는 외침이 들렸다. 기뻐하려는 순간 눈앞의 광경에 모든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건 파도야 뭐야. 내가 벨 수 있을까.’
미친듯한 속도의 높이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도 아닌 파도.
지금까지 날아오던 것들과 조금 더 진한 색으로 보아서 힘 조절을 살짝 못 하신 듯했다.
풍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재능을 담고 그 위에 오러 블레이드로 감싼다.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극한의 집중 상태에서 보이는 미세한 길. 그 길을 따라서 그대로 도를 휘두른다.
“후우. 시원하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아름답네. 파도가 산산이 흩어지는 걸 본다는 건. 막내는 그새 또 성장했구나? 종종 불러야겠는걸?”
“할머니. 저 죽어요. 지금도 어떻게 살아있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의 말에 긴장이 풀렸는지, 탈력감이 몰려온다. 이토록 오래 긴장을 하고 있던 것이 언제인지.
“엄살은. 살살 해 주었잖니. 그래도 이토록 완벽하게 받아주는 이는 오랜만에 보는구나.”
“쌓인 게 엄청 많으신가 봐요. 근데 뭐라 하셨는지 중간부터 기억이 안 나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상관없단다.”
새삼 량이 말 해 주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자신이 힘이 두렵다는 할머니의 말이 조금 이해가 간다.
‘이것조차 신경을 쓰시면서 화를 내신 거라는 거지.’
“후우. 이번 기회에 오랜만에 [무투의 탑]에 들려야겠구나. 그럼 들어갈까?”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자신과는 영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 위치에 올라야지. 그런데 할머니가 전력을 다하는 건 어떤 모습일까.’
세상을 상대 할 수 있는 초인 중의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 할머니.
하지만, 그 전력을 본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상대한 지금만으로도 대부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할머니. 방금 그건 할머니의 어느 정도인 거에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할머니의 곁으로 가서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진다.
“흐음. 어느 정도라니? 내 힘을 말하는 거니?”
“네. 할머니가 낼 수 있는 전력의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요.”
그 말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할머니는 잠시간의 고민을 하시더니 말을 하셨다.
“글쎄. 전력의 얼마라고 하기에는, 단순한 투정이라고나 할까. 감정의 투사라고나 할까. 그래서 말하기 어렵구나.”
“투정이요? 감정의 투사요?”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탈력감이 있었지만, 이젠 금방 털어낼 수 있었다.
“와. 할머니 정도 경지가 되면 그 정도인 거네요.”
“그래도 적어도 꽤 되지 않을까 싶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애매하긴 하네.”
새로운 질문을 들었다는 듯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할머니를 보며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불균형 때문에 이러지 않을까 싶구나. 감당하지 못할 힘이기에 감정에 따라서 그리 쉽게 나오는 것이겠지.”
“감당할 수 없는 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