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표정이 어느새 풀린 량은 입을 열었다.
“마니에르. 너도 확실하게 생각하고 정해. 네 마음은 알지만, 너는 진나라는 이름을 당분간 버리기로 했잖아?”
그 말에 오이겐이 놀랬다. 정말 서로서로 놀라는 현장이었다.
“아니. 그건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 목이 절대 구부러지지 않는 양반이.”
“오이겐은 이제 내 밑에서 배우며 같이 일하게 될 동료니까 잘 대해주고.”
“오이겐이 동료라고? 아니 그보다 네 밑으로 들어왔다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량이 아닌 오이겐이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구역주님께 배움을 받는 말도 안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요.”
“갑자기 오이겐은 왜 존대를 하는 건데?”
“구역주님의 친우분이시니 제가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전혀 모를 일이었다.
“진짜. 머리 아프다 아파. 뭔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겠다.”
그 가운데 가만히 있던 카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신을 잡아끈다.
“범아! 우리 숙소로 잠시 같이 가야 해. 너한테 줄 게 있어!”
그 말에 량의 눈이 빛난다. 마치 선물을 뜯어보고 싶은 어린아이의 눈빛이었다.
“나도 가야 해. 사제(師弟)가 그 처음은 무조건 주인이 봐야 한다고 해서 나도 못 봤단 말이야.”
결국,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그 선물로 바뀌었고 카인의 뒤를 따라 [바람이 빼앗아 간]으로 향했다.
“난 저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 알지.”
“나도 알지!”
이름이 바뀐 것으로 량을 한 번 놀려준 후에 별관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떨린다.
별관에 들어가자 익숙한 실루엣의 거대한 상자가 중앙에 놓여있었다.
“저거 설마?”
“응. 가장 최근에 만든 상자야. 그래도 아무렇게 놀 수는 없잖아?”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량이 나서며 단봉으로 상자를 열어주었다.
그 안에는 긴 직사각형의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상자를 잡으니 심장이 더 빠르게 뛴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서 위에 올려놓고 숨을 한 번 내 쉰 후에 상자를 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풍아]는 완전히 변한 상태로 찾아왔다.
유백색의 하얀 자태를 드러내던 도가 이제 반으로 나뉘어 윗부분은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정이 되었다.
도파(刀把)의 끝에서부터 시작된 황금색의 문양이 도신의 아랫부분을 살며시 감싸며 문양을 나타낸다.
도를 잡는 순간, 이 도는 평생 함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손을 위해서 만든 듯한 손잡이.
약간은 더 묵직해진 듯, 도를 잡았을 때 손에 쥐어지는 그 느낌이 딱 알맞았다.
손에 도를 쥐자 느낌이 달라졌다. 오이겐과의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재능을 도에 담는다.
짧은 순간 진동을 하던 도가 이내 잠잠해진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가 느껴진다.
‘재능이 도 안에 머무른다? 길을 만든다? 이게 뭐지?’
오이겐과의 생활로 재능을 더 깊이 탐구한 결과 훨씬 자유로운 운용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재능이 부여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한 순간부터 달라진 점이었다.
그만큼 재능을 민감하게 느끼고 알 수 있었는데, 도 그 자체에 재능이 길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주변에 누가 있는지 까먹고 있었다.
“그래서? 어때? 사제 말로는 자신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더라. 그리고 너만 알 수 있는 게 있을 거라고 하던데.”
주위를 둘러보니 알아도 될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편히 입을 열었다.
“우선 쥐자마자 딱 알았어. 이건 내 도다. 이런 느낌? 그리고 진짜 신기한 게, 도 안에서 재능의 길을 만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설프고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다행히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존재했다.
“사제가 말했던 게 그거구나. 이 도는 사람에 따라서 무궁하게 변할 거라고 하더니. 말도 안 되는 걸 만들어냈네.”
“재료를 만든 량이 대단한 거 아니고? 근데 그게 무슨 소린데? 왜 너랑 범이만 알고 있는 건데? 재능이 무기에 담긴다는 건 처음 듣는데?”
“그치? 그래서 대단하다고 한 거야. 범이 재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리고 성장할수록 도도 같이 성장해나가겠지.”
새로운 형태의 무기에 모두의 시선이 도에 머물고 있을 때, 오이겐이 놀라 본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 설마 저 금색 금속. 바오우입니까? 설마 그렇지 않겠지? 그럴 리가 없지. 아니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뭐가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바오우는 또 뭔지 모르겠다. 다만 일반적인 금이 아니라는 것은 재능을 발현했을 때 알았다.
“바오우? 그게 뭐야?”
카인조차 모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직 량만 이채를 빛내면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오우. 전설의 금속. 아니 그냥 사람들이 만들어낸 줄 알았는데. 연금술의 목표를 가장 가까이 다가간 금속이 아닌 물질. 그것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혼이 나간 듯이 말하는 오이겐의 말이 빨랐다.
“순수한 금을 만들고자 했던 한 연금술사의 시도. 그것이 지금의 연금술 하나의 맥이 되었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순수한 물질은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만 드러났지.”
마치 꿈에 빠진 듯,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도를 바라보는 오이겐.
“오직 이 세상에 가장 순수한 형태의 물질은 마나가 아닐까 가정만 하고 있던 상태에서 나타난 바오우. 실패라고 생각한 물질이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질.”
손을 뻗어 도에 금색 부분을 만지려고 하자 자신도 모르게 도를 뒤로 숨긴다.
“연성 과정에서 극도로 순수한 금이 탄생했고, 마나와 결합하여 태어난 것이 바오우. 그 속성상 흩어지려고 해서 고정할 수 없는 물질이라고 알려졌는데.”
오이겐이 만지려고 했던 금색 부분을 만져보자 따스한 열감이 느껴진다.
“어떻게 저렇게 형태로 있는 거지? 아니야 저게 바오우가 아닐 수 있지. 얼마든지 레플리카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아니면 열화판인가?”
오이겐의 말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지만, 그 말을 순간에 자른 것은 량의 대답이었다.
“바오우 맞아. 스승님께서 언제나 제자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거이자 목표 같은 거지.”
담담하게 말하는 량, 하지만 담담하게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듯 오이겐은 경애를 넘어 경외심이 담긴 눈동자로 바라봤다.
“도대체 파울로님의 연금술은 어느 경지에까지 이른 것인지. 상상이 안 가는군요.”
‘금속이 따스한 열감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스승님께서도 고작 병에 게 다야. 그래서 도를 보러 오시기까지 하셨고. 지금도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하고 계시지.”
의자에 앉아 도를 뉘이고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스승님께서도 도를 보시고 사제에게 야금술은 나를 아득히 넘어섰다고 말씀하셨지. 사제는 운이라고 내 금속 때문이라고 하긴 하지만.”
질감이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유백색의 그 부분은 여전했다.
“무궁과 함께한 순철을 바오우가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상생한다고 한다는데.”
살짝 차가운 금속 특유의 냉기와 함께 느껴지는 단단함.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는 듯한 예기.
“사실 사제의 야금술이 말도 안 되는 거지. 나에게 주어도 저런 결과물은 못 만들어내.”
검은 부분은 단단하기 그지없지만 색을 빨아드리는 그 느낌은 여전히 특이했다.
그리고 도파 부근을 조금 넘어가면 있는 금색의 부분. 열감이 느껴지면서도 순철과 무궁의 느낌이 함께 느껴진다.
‘진짜 아름답다. 손길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것만 같아.’
“나도. 나도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될까. 만져보면 재능을 도우는데 도움 될 것 같은데.”
오이겐의 간절한 말이 귓가를 울린다. 하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결국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오우가 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형태.”
눈알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보기도 하고 손을 조심스럽게 만져보기도 하는 그 행태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이제 슬슬 돌려줘도 될 것 같은데?”
마치 빼앗기는 듯한 억울한 얼굴로 자신에게 도를 돌려주는 오이겐이 어이가 없었다.
“진짜 탈해님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려. 아니 내가 꼭 찾아뵙고 말씀드릴게.”
“아! 사제가 그러더라 다음에 볼 때도 도가 그대로라면 진짜 실망할 거라고. 그리고 가져갔던 도는 그냥 가지라고 그러더라.”
[풍아]가 자신의 품에 돌아온 순간이었다. 어서 도를 휘두르고 싶을 뿐이었다.
“할망, 아니 로즈님의 저택으로 가자. 그곳은 훔쳐볼 이도 없고, 무기도 많고.”
자신의 마음을 알았는지 말을 꺼내는 오이겐이 조금 기특해 보였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마니에르의 눈동자는 거의 풀려있었다.
“도를... 나도 도로 바꾸어야 하나. 영감의 인생의 역작이라니.”
“마니에르 너도 가자. 량도 카인도 다 같이!”
그렇게 할머니의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허리에 맨 도를 끊임없이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
눈앞에 오이겐이 검을 들고 서 있지만,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의 감각이 온몸을 지배한다.
오이겐과의 훈련으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 재능은 자신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재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큰 변화였다.
그 변화로 손을 쓰는 것처럼 자유로워졌고,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민감해졌다.
민감한 감각이 도에 깃들어 가는,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머리에 그려지듯 보여준다.
무궁이 있는 부분으로 타고 들어가 바오우를 거쳐 순철에 깃든다.
그 과정이 마치 물이 정수되듯 정제된 재능이 날에 서리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개운함을 관통시킨다.
“처음부터 시작하자.”
말과 함께 꽤 큰 조약돌들을 발밑에 떨어트리는 오이겐. 그리고 발로 하나하나 차기 시작한다.
빠르게 날아오는 것이 아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조약돌.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도를 부드럽게 잡았다. 힘을 주는 것이 아닌 그저 선을 그린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조약돌을 자른 것이라 생각 들지 않는 선이었다. 소리조차 없었다.
바닥에 둘로 나뉘어 떨어지는 조약돌만이 베어졌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그 기묘한 광경은 조약돌이 더이상 없어질 때 가지 이어졌다.
그 기묘한 광경에 모두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 오이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은 전혀 검을 들고 공격을 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 오이겐이 들고 있는 것은 연검. 하늘거리는 검이 출렁이면서 다가오고 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끝부분이 보였다.
‘이 훈련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도움을 받았다고 그랬지.’
문득 드는 상념이지만 순식간에 지우고 도를 베어 올린다. 빠르지 않고 천천히, 마치 도(刀)로 선을 그리는 듯이.
천천히 올라가는 도가 하늘거리는 검 끝을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고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느낌이 좋아.’
수를 세지 않고 그저 반복하고 반복한다. 어느새 검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간다.”
새로운 연검을 든 오이겐. 그 연검에는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는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에 자신의 도는 오러라고는 없는 상태. 오롯이 자신의 재능을 벼리고 벼린다.
‘이번에는 될 것 같다. 후우. 가자.’
다시 앞으로 나서면서 다가오는 검을 향해서 도를 휘두른다. 아래에서 위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도가 길을 알려준다. 아니 도에 서려 있는 재능이 길을 알려주고 자신은 그저 그 길을 그대로 간다.
마치 쭉 뻗은 도로를 곧게 걸어가는 것처럼 재능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었다.
어깨에 완전히 힘이 빠지고 팔에 힘이 빠진다. 오로지 손목만으로 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까딱이는 움직임에 도가 따라 움직인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겨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눈을 뜬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