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에밋! 진짜 오랜만이다.”
에밋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통에서 나오자마자 달려왔다. 이제는 더 이상 소녀라고 할 수 없는 에밋.
‘와. 진짜 잘 컸다. 잠깐 마주했을 때랑은 느낌이 또 다르네. 반년도 안 된 것 같은데.’
에밋에게서는 어느새 윗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카리스마가 조금이지만 느껴졌다.
왠지 자신의 친구가 이렇게 잘 컸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느껴질 즈음,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응? 왜 량이랑 에밋이랑 어색한 거 같지?’
“범이구나? 엄청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치? 너도 엄청 뭔가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인데? 거기에 경지는 하나 더 올랐네? 벌써 4서클이라니! 대단한데!”
생각 없이 던진 말이고, 축하하려고 하는 말이었지만 량과 에밋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것은 에밋을 수행하던 기사의 표정. 량의 뒤에 있던 칼라 님의 표정.
그리고 둘 사이의 기류. 그것이 마치 표정의 변화를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에밋. 4서클로 올랐어? 왜 말 안 해줬어. 진짜 축하해. 엄청 빠른데? 범이 덕에 받은 팔찌 때문인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량이의 표정이 뭔가 어색한 기분이었다.
“물론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지. 공작가 시련의 던전 덕분에.”
“그치? 제약서를 사용하고 들어가긴 했지만, 가문의 숙원 중 하나를 해결했으니까. 말이야.”
분명 둘 모두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둘을 오래 보아 온 자신은 이상함을 느꼈다.
“맞네! 그나저나 그 유물은 어때? 어떤 유물이야? 지금 팔찌 맞지? 어때?”
“아직도 다 알지는 못 해서. 미안. 그래도 도움은 많이 받았어. 정말 고마워.”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너무 과하게 물어봤나 보다.”
‘하긴, 아티펙트도 아니고 유물인데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겟지.’
그래도 조금 서운함이 드는 것은 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잘 부탁해. 범이 너가 활약을 할 걸 알아. 최대한 빠르게 해도 잘 수습해 볼게.”
“수습이라기 보다는, 정리지. 그리고 최대한 루트를 짜서 할 거니까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야.”
“아냐. 괜찮아. 대진(大陣)과 함께 왔으니 걱정하지 마.”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대진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에밋? 설마 그 대진이야? 군진의 바로 아래라는 그 대진?”
군진(軍陣) - 대진(大陣) - 중진(中陣) - 소진(小陣)으로 이루어진 와흐네 가문 특유의 마법대.
피의 탑이라는 이명을 만들어 낸 그들이 고작해야 중진에 불과했다. 비록 시간은 많이 주어졌다지만.
고작 중진으로 과거 시디야 왕국의 대군을 막아냈다. 아니 전쟁은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났다.
그런데 그보다 더 윗 단계의 대진을 함께 데리고 왔다는 소리는, 얼마나 큰 힘인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기에 대진에는 대장이 따로 존재하는데, 그들과 함께 이루는 공성은 그 누구도 뚫을 수 없다는 소문이 있었다.
“응. 친구잖아.”
“와. 에밋. 진짜 대단하다. 그리고 인정받고 있구나.”
“아니야. 나도 배우고 있는 걸. 대장님 곁에서 진짜 많이 배우고 있어.”
무엇인가 더 물어보고 싶어서 물을 찰나 량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좀 쉬어. 제일 좋은 방으로 배정했어, 별관을 따로 잡아 놨으니 편히 쉴 수 있을 거야. 칼라. 부탁할게.”
“네. 그럼 따라오시겠어요?”
그렇게 칼라 님을 따라서 나가는 에밋과 그 옆을 지키고 있던 기사.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거야? 좀 냉랭한 거 같은데?”
“너의 그 순수함이 좋기는 한데, 가끔 속이 터질 때가 있다. 정말. 내가 못 살아.”
“왜? 에밋은 친구잖아?”
“친구지. 친군데, 딱 거기까지랄까. 너는 수호성에 있느라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알게 될 거야 아니다 모르려나? 있어 그런 게.”
“진짜 나도 가끔 네가 너무 답답하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많나 몰라. 어쩐지 좀 냉랭하더만.”
“하튼. 그런 줄 알고 조심해. 너가 진짜 눈치도 없고 자주 바보 같아서 그렇지. 로사 같은 귀족이 많은 줄 아냐.”
“로사는 또 여기서 왜 나오는데? 뭔데? 에밋이 로사보다 낫지!”
“하. 진짜 이 고… 아니다 애새끼랑 내가. 어쩌다 진짜. 야 됐고 따라와.”
작은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도의 지도가 크게 그려진 그림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코가 왼쪽에 있는 사람의 옆모습을 닮은 그런 모습. 그중에서 자신의 마을은 뒤통수 바로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을을 중심으로 여러 선과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와. 진짜 세세한 지돈데? 뭔가 많이 짜 놨나 보네?”
“저건 그냥 이것저것이고, 자. 봐봐 이제 서도에서 지배자가 없는 마을은 단 하나 남았어.”
알려지기로 32개의 마을이 존재했다. 그중에서 주인이 없는 마을은 단 하나.
“근데 거기는 원래 지배자가 있을 수 없는 곳이라며.”
“뭐.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근데 그걸 제외하면 이제 모든 곳에 지배자가 생겼다는 거지.”
“그게 왜? 뭐가 문제가 되는데?”
“아니 별문제는 없지. 이제, 정말로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정도?”
전쟁. 전장.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단어지만, 자신에게는 조금은 그리운 단어.
전쟁이 일상이었고, 전장이 자신의 집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 곁에 없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전장에 미쳐 살았는지도 모른다.
‘전생 대로 흘러가는 사건이 하나도 없길래. 전쟁은 글렀나 싶더니 결국에는 전쟁으로 돌아오는구나.’
시디야 점령 전쟁이 일어나기 전, 자신이 아카데미에 있을 때 꽤 많은 자잘한 국지전이 있었다.
시디야 국경선 근처에서도 그랬고, 블레어 왕국의 남부에서도 영지전이 꽤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국지전도 영지전도 전혀.
조금 이상한 마음에 카인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는 답변.
량이에게 물어보았을 때는 상세한 설명과 강의가 되돌아왔다. 가장 안정적인 시대라면서.
블레어 왕국 뿐만 아니라 시디야 왕국 또한 안정기에 들어섰다면서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쟁이 일어나도 그것은 변수가 없다면, 적어도 10년이 지나야 할 것이라고도 이야기 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에 그냥 넘겼다.
평안한 서대륙에서 전쟁은 오로지 수호산맥에서만 있었다. 하지만, 느낌이 다른 전쟁.
지금 눈앞으로 다가오는 전쟁이야 말로 자신이 그렇게 평생을 살던 전쟁이랑 비슷할 터였다.
“근데. 여긴 전쟁을 어떻게 해? 아니, 좀 다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우리 범이. 꼭 이럴 때는 똑똑한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에밋을 굳이 부른 것도 있어.”
“전쟁은? 그냥 우리 병력으로만 하는 거야? 이 섬은 좀 어렵다. 뭐가 생각 이상으로 많아.”
전쟁에서는 강제로 마을 주민을 데려갈 수도 없고, 재산을 갈취할 수도 없다.
마을의 피해는 배상 및 복구해야 하며, 4할 이상의 피해를 끼치면 전쟁에 승리하더라도 지배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자잘한 제한들이 존재했다. 마치, 외지인은 외지인일 뿐이라는 것처럼.
그런 환경에서 자신들은 [맘몬]에 비해 크게 뒤쳐진 상황이었다. 지지를 받는 정도가 달랐다.
“그래도 멍청하게, 아니지 그네들에게는 당연하게 자기들이 지배층이라고 생각하면서 거리를 두었단 말이지. 우린 그걸 파고들 거야.”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아? 병력도 너무 적고.”
“그것도 대충 해결해 놨어. 너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최대한 빠르게 점령해 놓는 것. 그거야.”
설명을 듣던 도중 불현듯 량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아는 한 가장 똑똑한 사람.
“량아. 근데 나는 너무 큰 그림을 보는 거에 약한 것 같지 않아? 어떻게 해야 그렇게 큰 그림을 볼 수 있어?”
그 말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량.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했을까를 유심히 보더니 입을 연다.
“너. 권력에 관심이 생겼어? 귀족이 될 거야?”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대국을 보는 시야는, 넓게 보는 시야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어째서?”
“너무 내가 보는 시야가 좁은 것 같아서? 뭔가 일이 생기면 나는 다른 건 생각을 안하는 거 같아서.”
“그게 부족한 것 같아?”
“음. 그렇지 않아? 상관관계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뭔가 이렇게 크게 못 본다고 해야 하나?”
“넌. 이상하게 눈치가 빠르고 요상하게 머리가 돌아가서 너를 써 먹으려고 하는 건 기가 막히게 알지?”
“음. 나쁘지 않게?”
‘전생에 그렇게 이용만 당하고 살았는데 당연히 그런 눈치는 생겼지. 딱 그 정도지만.’
“그 정도면 충분해. 굳이 너가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는 없어.”
“어째서? 넓은 시야를 가지면 폭 넓게 볼 수 있잖아?”
“너가 행정을 하려거나, 전쟁의 장군이 되려면 그런 게 필요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넌 아니잖아?”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아니었다.
“네가 추구하는 길은 대장군도 아니고 권력가도 아니고 리더도 아니잖아?”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어느 순간 또 우선순위가 변해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너는 무인(武人). 그것도 사람을 이끄는 무인이 아닌 무(武) 그 자체로 정점이 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세상에 없는 비단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방직공장의 사장이 되어서 물류 하겠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
“너는 세상에 없는 비단을 만드는 장인의 길을 갈 뿐이야.”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유 하나하나가 자신의 폐부를 찌르고 마음을 벗긴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대장의 자리에 익숙해졌다. 무리를 이끌고 다녔다.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환경이 그렇게 되니 나도 그렇게 바뀐 느낌이었다.
‘진짜 순식간에 갈팡질팡하는구나. 마스터가 되었는데도 그러네.’
스승님께서 무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마음가짐이라고 하셨다.
마음 중앙에 굳게 선 의지가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이제 온전히 알 것 같았다.
‘환경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연약하구나.’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세워진다. 처음 회귀를 했을 때와 달라진 자신의 마음이 보인다.
무(武) 그 자체로 정점에 서고 싶었던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열등감을 뒤집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의 얼굴을 한 번 보자는 정말 치기 어린 생각과 섞이니 정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치기 어렸던 생각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스승님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고.
도(刀)를 배우고 무(武)를 배우고 경지를 보고 초인의 무위를 보았다.
그러다 보니 그 치기 어린 생각이 진짜 자신의 목표이자 꿈이 되어 있었다.
무(武)의 끝을 보리라.
무(武)로 정점에 이르리라.
그런데 참 연약한 것이 그 꿈이 안락함에 덮이고주변의) 세워줌에 가려졌다.
소대장이 되고 최연소 마스터가 되니 남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시선이 달라지니 나도 달라졌었다.
고민을 했다지만, 쉬운 핑계가 있었기에 자유섬으로 올 수 있었다.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야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상위세계로 올라가야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올라가리라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이제야 자신이 자신으로서 바로 선 기분이었다.
“이제 좀 내가 아는 범 같네.”
오랜만에 보는 량이의 따스한 말과 표정. 어느 순간 채찍질만 하던 량.
“좀 진작에 말해 주지 그랬어.”
“퍽이나 말했으면 알아들었으려고? 너도 너가 인정하기 전에는 절대 인정 안 하잖아. 고집은 세가지고.”
“아. 그러셔요. 누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훨씬 보기 좋다. 역시 너는 좀 무식해야 보기 좋은 것 같아.”
“무식이라니! 너 앞에서 안 무식 해 보이는 사람이 있기나 하냐!”
“그럼! 스승님이랑 카인이랑 마틴이랑 성하님이랑 몇몇 있지. 그중에 넌 없지.”
“야 이!”
다시 10대 초반의 그 시절. 자신과 량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그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자기야~ 다 하고 왔어!”
그때 문이 열리며 칼라 님이 들어오셨다.
“어머? 자기 이런 면도 있었네! 자기가 말하던 범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아니. 칼라 님 그게 아니라.”
“됐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도 이리 와. 너도 알아야지 이제.”
“흐음. 조금 질투가 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러네.”
그렇게 칼라 님과 함께 량이를 따라서 그들만의 장소로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