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흠. 탑주님. 저래서야.”
연무장이 보이는 방 들 중에서 가장 높은 방이 있는 장소. 그곳에 탑주가 옆에 공손히 서 있는 이와 함께 하고 있었다.
“글쎄다. 여전히 섣부르구나. 어떻게 변하질 않누.”
“아. 아닙니다! 신중하고 신중합니다. 오죽하면 제가 숙고(熟考)한 지팡이겠습니까!”
“쯧. 다들 널 모르는 게지. 숙고는 개뿔이나. 지금도 함부로 단정 짓는 거 아니냐.”
“하지만, 탑주님. 이번 애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키워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들었다면 기겁할 대화. 저 혼나고 있는 중년인의 정체가 예비대의 교관이었다.
감찰대의 대장을 역임하다 돌연 은퇴하고 교관을 맡고 있는 이. 벌써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전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갓 용병이 된 신입처럼 각을 잡고, 술병을 공손하게 들고 있었다.
“뭐. 그 말이 맞기도 한데, 조금 달라질 것 같단 말이지.”
“아니. 9연승도 충분히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제 새끼들을 감당하기에는 벅차지 않을까요?”
“호? 호오. 한 번 보려무나.”
중년인이 고개를 다시 돌려 연무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가 갈리며 미간이 찌푸려진다.
“흐음. 자알 키웠구만. 자알 키웠어. 쯧. 꼭 저답게 키웠구만.”
얼굴이 붉어진 채로 노려보는 중년인의 시야에는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이들 사이로 뛰어드는 도전자가 들어왔다.
‘이 새끼들이. 어떤 상황에도 방심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이를 악물다 못해,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이 깨져 나간다.
“야 이노무 시키야!!”
*
당황하는 얼굴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이럴 때가 가장 좋은 법이었다.
“치사하게!”
“응. 원래 치사해.”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치며 도를 위로 쳐올린다. 그리고 피하는 순간 그대로 도를 잠시 놓아준다.
“잠시 쉬고 있어.”
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도와 다르게 왼손으로는 피한 목을 잡고 오른 주먹을 그대로 목에 꽂아 넣는다.
한 명, 그것도 리더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떨어지는 도를 손에 쥔다.
‘하나. 처리했고. 근데 얘네 의외로 엉성한데? 누가 가르친 거지?’
가르친 그 사람이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 다음 타깃으로 간다.
예비대에서 가장 약한 이를 한 번 본다. 그리고 잠시 앞으로.
‘진짜 정직한 애들이네.’
한 명이라도 더 잃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잠깐의 움직임에 모두 그를 향해 달려간다.
‘이렇게 족족 걸리네. 이게 나였단 말이지. 진짜 멍청했구나.’
진형을 위해서 리더의 가장 먼 곳으로 향하던 이가 실제 타깃.
앞, 뒤를 압박하는 진형이었는지 그는 또 다른 완숙한 익스퍼트였다.
은밀하고, 소리를 죽이고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서 그를 향해 간다. 필요한 건 단 몇 초.
‘그 시간이면 전장에서는 몇 시간이랑 다를 바 없지.’
다들 눈치를 채지만, 이미 자신은 그 타깃 앞에 도착. 그대로 도를 거꾸로 쥐고 명치에 꽂아 버린다.
눈을 뒤집고 기절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무시한다.
‘와. 얼마나 멍청하게 싸운 거지? 진짜 힘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네.’
너무 멋있고 있어 보이게만 싸우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다.
‘그 철가면도 무슨 짓을 한 건지. 쯧. 진짜 멍청했어. 자칫하면 내가 당할 수도 있었는데.’
간당간당하기는커녕 압도적이었다. 각개격파를 당하는 예비대의 모습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이의 손을 부수고, 창을 사용하는 이의 다리를 부셔버린다.
가장 효과적이고 깔끔하게, 죽이지 못한다면 차선을 택하면 될 일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예비대의 대원들이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울려 퍼지는 것은 오로지 사회자의 목소리. 이 상황에서 꿋꿋이 진행을 하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충격 그 자체입니다!! 가장 뛰어날 거라고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예비대! 말 그대로 압살을 당합니다!”
정적이 흐르기를 십몇 초, 미친 듯한 환호성이 대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
부상(副賞)을 받기 위해서 안내받은 곳은, 전투 전 오즈안 님을 만난 그 방이었다.
자신의 사회를 보아주던 이가 자신을 안내하면서, 눈을 빛내며 말을 거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방 문을 열어 주고 조심스럽게 사라졌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오즈안 님과 그 뒤에 한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와. 마스터가 이렇게 흔하디 흔한 존재였나?’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더구나.”
순간 보이는 존재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다가, 오즈안 님의 물음에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아. 네. 제가 너무 주제 파악을 못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푸하하하! 그건 주제 파악이 아니라 교만함을 내려놓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즈안 님이 만족스러워 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씀해 주시니, 자신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나저나 예비대 녀석들은 어떠하드냐. 뭐. 처참하게 깨진 것은 보았다만.”
“그게.”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오즈안 님이 탑주이기 때문이었다. 결코 좋은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괜찮다. 어차피 책임은 그놈 아들을 가르친 녀석이 져야 하니. 상대해 본 네 진실된 소감을 듣고 싶구나.”
오즈안 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꺼냈다. 후회 할 줄도 모르고.
“우선. 너무 정직해요. 생각이 없다? 아니다. 임기응변에 너무 약해요. 그냥 주어진 대로 움직이는 느낌?”
“호오? 섣부르다 이거구나? 숙고(熟考)함이 전혀 없다는.”
왜 그 말에 뒤에 있는 중년인이 움찔하는지 전혀 모르고 말을 이었다.
“사실 전장에서, 즉각적인 전투에서 숙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그때그때 변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그도 평소에 많은 숙고를 통해서 실제 전투에 드러나는 것 아니더냐?”
“그렇게 말씀하시면. 맞는 것 같아요. 네. 그냥 주입받은 대로 움직이는 느낌이었어요.”
“호오. 그리고? 또 있더냐?”
“네. 가장 눈에 띄는 건 자만심. 자신들이 무조건 이길 것이라는 자만. 상대를 살피지 않는, 보이는 그것대로 믿는 어리석음.”
“흐음.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서 말해 보렴.”
흥미로운 듯이 말씀하시는 오즈안 님의 태도에 말이 술술 더 나온다.
“우선은, 오즈안 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감사해요. 덕분에 제가 깨달았습니다.”
“허허. 떠먹여 줘도 모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앞에 두면 잘 받아먹는 놈이 있는 법이지. 그건 잘 받아먹은 놈의 능력이다.”
쑥스러웠다.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더욱 진솔하게 입을 연다.
“물론. 지쳐 있던 건 사실인데 그렇게까지 지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정말 단순한 움직임, 호흡에 그대로 속아 넘어가던데요?”
그리고 계속 말한다. 그만해야 했는데.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차분함이 결여된 느낌? 아니면 주위의 말에 너무 붕 뜬 느낌? 그런 느낌이었어요.”
오즈안 님은 계속 경청해 주셨다. 다만, 뒤의 중년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의아했다.
“물론 그런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의미가 없다 생각해요.”
“거기에 리더로 보이는 아이는 제가 도를 놓자마자 반응했어야 했는데, 멍을 때리던데요?”
그렇게 이야기가 계속 되면 될수록 오즈안 님은 웃음을 참는 표정이 되어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성이 들려왔다.
“나다! 내가 그 아이들을 가르친 교관이다!! 윽!”
고함을 지르듯이 말하는 중년인, 하지만 끝은 비명으로 마무리했다.
“지금 누구 앞에서 뭘 잘 했다고 소리를 지르누. 쯧 도대체가.”
어느새 때린 것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마에 혹이 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저 곰방대는 도대체 언제 꺼내 드신 거지? 불은 언제 붙이셨지?’
여전히 약하고 티끌 같은 자신이 느껴진다. 움직임도, 변화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원래 그런 것이었던 듯한 변화.
하지만, 그보다도 귓가를 울린 고성이 마음에 걸린다.
‘잘못 말한 건가? 아니. 뭐 그렇게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넌 얼마나. 아니 넌 잘났지만 네가 키우는 애들은 얼마나 잘난 거 같으냐!”
그다지 꿀릴 것이 없었다. 오즈안 님이 중립인 이상 자신이 밀릴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요? 제가 용병이던 시절에 소대원들을 데려다 놓으면 팔 하나만 쓰라고 해도 이길 거 같은데요?”
‘뭐. 다들 익스퍼트여서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니냐! 네 소대원이라고 말해도, 불스용병단의 일원일 터 전원 익스퍼트일 것 아니냐! 네가 키운 놈이 익스퍼트에 오른 적이 있기냐 하냐!”
맞는 말인데. 참 기분 나쁘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 분 같다.
“네. 있어요. 혹시 아실지 모르지만 마르쿠스라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익스퍼트를 넘어 경계에 다다랐을 걸요?”
“익. 익!”
“푸하하하. 제대로 당했구나. 그러니 조금 더 신중해 지라고 누차 말하지 않더냐.”
“스승님! 그런데 왜!”
딱 하는 소리가 아닌 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곰방대는 분명 가만히 있는데 어느새 더 커다란 혹이 옆에 생긴 중년인.
“이노무 시키가! 꼭 제 맘에 안드는 일만 있으면 스승님이지! 탑주님 탑주님 이러던 녀석이!”
불만이 한가득해 보였지만, 고통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는 듯해 보였다.
“그리도 불만이 많더냐?”
대답을 듣지 않고 표정만 보아도 어떤 대답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내기 한 번 해볼 테냐?”
오즈안 님께서 자신을 보았을 때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솔직한 중년인.
“범아. 네 아이들이 있지 않더냐. 너가 한 번 도와주련? 대신 참가하는 것 만으로도 괜찮다.”
“아닙니다. 무엇을 주시지 않더라도 오즈안 님의 부탁이면, 망설임 없이 들어드리겠습니다.”
“쯧. 보고 배워라 이놈아!”
한 번 중년인에게 호통을 친 오즈안 님은 다시금 인자한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네 아이들과 예비대를 대결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 음. 기한은 3개월 뒤로 하자꾸나.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씀하는 오즈안 님.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네! 충분합니다.”
“우선. 참가하는 것만으로 한 번 도와주마. 벽이라고 생각할 때 찾아오렴.”
그 말에 중년인도 자신도 크게 놀랐다. 참가비가 너무 거대했던 탓이다.
“스승님!”
“뭐 이놈아! 조용히 해! 그리고 만일 이긴다면, 내가 한 번 봐 주도록하마.”
오즈안 님에게 두 번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
‘애들한테도 말 해주면, 죽자고 달려들겠네.’
강해지기 위해서 들어 온 이들이니만큼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설마. 이것까지? 근데 너무 차이가 심한데.’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이들은 거의 익스퍼트의 경계에 다다른 이들. 거기에 경험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네 아이들은 10명으로 제한을 두도록 하자. 어떠하냐?”
소름이 돋는다. 몇 명인지도 알고 계시는 것을 보니. 천리안이라도 있으신가 싶었다.
“네. 좋아요.”
“그래. 그럼 손님이 있는 것 같아 보이니 나가 보거라. 그리고 처음 만난 접수원에게 안내를 부탁하면 은고(銀庫)로 데려다 줄 것이다. 잘 찾아보거라. 웬만하면 밤에 찾아가 보독 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오즈안 님.”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나왔는데, 방 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나가라고 하신 말씀이었나?’
약간 의아해 하는 사이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바람이 머물다 간]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여관 앞에 도착해서, 손님이 오즈안 님에게 온 것이 아닌 자신에게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오즈안 님은 이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지?’
“범 님!!”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렸다는 듯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에게 달려오는 인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