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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재능으로 정점-69화 (69/217)

[69화]

황홀했고 찜찜했지만, 아직 결정을 못 내린 시간을 단장님과 보내고 방으로 향하는 동안 다시 머리를 채운 질문

‘나는 과연 상위세계에 올라가야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상위세계에 올라가고 싶은 것인가.’

‘초인이란. 그게 초인의 경지라니.’

솔직히 지금의 경지에 오르리란 생각은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빠를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한 번 디뎌 본 장소였다.

하지만 초인, 그리고 그 이상의 상상도 가지 않는 경지. 그 경지를 오르려니 두려움이 문득 생겨났다.

‘과연 내가 정점(頂點)에 오를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조차 나는 정점에 오른 것이 아니였는데.’

몇 단계가 남았는지 감이 오지 않는 곳이 정점이었다. 신의 사자를 만나고 나서는 호기(豪氣: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에 차올랐다.

현생(現生)을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관계가 쌓이자 꼭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부발 님에게 새롭게 들은 사실은 자신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짐을 정리하고 중앙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이 혼란함과 아쉬움을 준 존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

허리에 도를 패용하고 걷고 있는 길은 고요했다. 단장님의 추천과 신전의 허락을 받아서 걷는 순례자의 길.

인간의 손이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장소였다. 동물들이 다니던 길이 사람이 다니면서 작은 길이 생겼다는 변화 말고는 그대로였다.

돌아보니 홀로 이렇게 길을 느긋하게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바쁘게 달리거나 은폐, 엄폐가 일상이었는데 주변을 보면서 걷다니 신기했다.

“나. 그래도 진짜 열심히 살았나 보네.”

나무가 풍성하게 자라난 작은 오솔길을 보자 열심히 뛰어다녔던 자신이 생각이 난다.

마틴과 수레를 끌었을 그때부터 쉬어본 적이 없었다. 단련하고 단련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뛰고 휘두르고 피하고 맞고 일어서기를 매일같이 해왔다. 용병이 되었고 마스터가 되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지금 와서 소소하게 평온한 시간인데 자신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아. 좋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미뤄 두고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싱그러웠다.

햇빛이 나무 사이로 비추어 들어와 여기저기를 비추는 숲의 광경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몇 년 만의 여유인지 모를 일이었다. 전생(前生)까지 합한다면 근 30년이 넘는 세월 만에 여유였다.

아니 이 시간을 이대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반세기 만의 일인 것 같다.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고요하고 적막한 길을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급하게 생각한 것들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가라앉으면서 점차 차분 해 진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주변의 소리와 내음을 즐기며 걷는 길은 즐거웠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

눈에 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사제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중앙신전이 웅장한 자태를 어렴풋이 드러낸다.

“수고하셨습니다. 형제님. 표정이 맑아 보이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사제님. 순례자의 길. 많은 걸 배우게 해 주는 길이네요.”

“그 또한 형제님께서 준비되셨기에, 마음을 열었기에 배우신 것이지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후 이어지는 길을 따라서 중앙신전으로 향했다. 순례자의 길에서 이어지는 중앙신전은 하나의 별관이 있었다.

별관에 들어가니 작은 탁자가 있었다. 물과 싱그러운 과일이 그 위에 올려져 있었고 비어있는 책과 펜이 놓여있었다.

탁자에 앉아서 과일이 놓인 바구니 위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순례자의 길로 무사히 다녀온 형제, 자매님 수고하셨습니다. 물과 과일을 먹으며 순례자의 길에서의 일을 후대(後代)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와. 나도 이거 읽어보고 싶네. 하여튼, 신전에서 말해 준 게 이건가 보네. 보자.”

도대체 어디서 떠온 물인지 청량하기 그지없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하. 후대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거 같은데?”

차분하게 자신이 겪은 생각과 느낌을 적어 내려가니 오히려 자기 생각이 정리되었다.

과일은 끝내주게 맛있었고 물은 시원했으며 후대를 위해 남기라는 글은 오히려 정리를 선사해 주었다.

기분 좋게 별관의 문을 열고 나오자 눈에 익숙한 길이 보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중앙신전의 본관 옆으로 난 숲길. 마틴이 자신을 데리고 간 길이었다.

“벌써 몇 년이나 된 거네…”

“맞아. 벌써 몇 년이나 된 거야!! 진짜!!!”

홀로 추억을 돌아보는 사이에 자신의 등짝을 때리며 날카롭게 소리치는 사제가 보였다.

“마틴?!? 너였어??”

사제야 중앙신전에 있는 모든 이들이 사제였고, 별관으로 가는 길로 보이길래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사제가 마틴이었다.

“그래!! 너! 진짜 카인보다 못해!”

벌써 정식 사제를 넘어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 놀라웠다. 로브에 새겨진 문양에 마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마틴!!”

구시렁거리는 마틴을 무시하고 그대로 안아주었다. 순례자의 길에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표현을 안 했다는 점이었다.

“뭐. 뭔데!! 미쳤어? 너. 설마!!”

“아니야! 아니다! 뭐가 됐든 그거 아니야!”

“진짜. 어떻게 한 번을 찾아 오지를 않냐.”

“아니. 그래도 편지도 나름 열심히하고…”

“카인은! 어! 매번 방학 때마다 오고! 넌! 어! 더 가까이에!”

“아니이,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사건도 막 생기고 그래서. 미안…”

“알아. 들었어. 마무리는 됐는데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면서. 괜찮은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잘난 너님이 우리를 내비 둔 사이 우리는 친구가 되었지. 나쁜 놈.”

“하. 미안해.”

“아냐. 알아. 고민도 많지? 상위세계.”

“사제가 된 게 아니라 독심술을 배우셨나 봐요?”

“니 얼굴에 그대로 써 있는데 뭐…”

“그래서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마틴의 인도에 이끌려 그 장소에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작은 텃밭과 함께 움막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는 그대로구나”

변하지 않은 장소에 찾아오니 그 장소에 대한 추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마틴과의 대화도, 세르 할아버지와의 대화도.

‘세르 할아버지라. 교황님이 참 좋으셨는데.’

“마틴! 요즘도 세르 할아버지랑 같이 시간 보내고 그래?”

“교황 성하(聖下)? 응 종종 뵙고 그렇지. 맞다! 너 알고 있었다며!!”

“허! 너한테도 알려 주셨구나?”

“아니. 인도 사제로 서품(敍品)받을 때 뵈었는데. 진짜 식겁했자나. 나중에 나한테도 꼭 해보라고 하시더라. 재밌다고…”

“킆프프하하하. 진짜 놀랐겠다.”

이상하게도 마틴과 함께 있으면 다시금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전생을 겪기도 전의 어린 시절로.

마틴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편지로 전하지 못한 말들을 나누면서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흘렀다.

애써 주제를 피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용기가 없었던 것일 지도 몰랐다.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틴이기에 마틴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범아. 상위세계 고민돼?”

“어? 음. 그냥 굳이 올라가야 하나 싶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고, 해결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팍!’

“어!!”

“뭐가! 어!! 야! 정신 안 차려?! 고아원에서 기억 안 나? 너가 떠날 때 내가 뭐라고 했어!”

“응? 가는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오라고한 거…?”

“그래! 근데 이게 뭐야! 차라리 아카데미로 떠나던 범이가 더 대단한 사람이잖아!!”

“어?”

“그 때 자신감에 차서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던 모습은 어디 간 건데!”

그를 시작으로 시작된 진심 어린, 폭풍 같은 잔소리였다. 하지만 슬픈 건 반박할 말이 이렇다 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반박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나 말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괜한 분이 올라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는데!’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분노라고 해야 하는 감정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입을 열어서 그 분노를 토해내려는 순간.

“그리고. 나를 위해서, 카인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민한다는 소리는 하지 마. 고민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결국 우리는 곁가지일 뿐이니까.”

마틴의 그 말에 솟아오르던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싸늘함을 느꼈다.

“아. 아니”

갑작스러운 마틴의 말, 처음 보는 단호한 표정, 아니라고 외치지만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고장난 물건처럼 머뭇머뭇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너가 잘못되었다고, 서운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중요한 선택이잖아. 네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단호하던 표정이 자애롭게 변한다. 그 무엇보다 저 신뢰 넘치는 눈길이 나를 사로잡는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지 깨닫게 된다. 눈앞의 마틴은 자신이 기억하던 어리광 가득한 마틴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보다 오히려 더욱 성숙해진 마틴을 보면서 여전히 미성숙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자신이었지만, 전생의 자신과 현생의 자신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신이 왜 고민을 하게 된 것일지를 생각해보지만,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고민하기 시작한 거지?’

마틴의 말을 곱씹는 동안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마틴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마틴을 보니 기뻤지만 씁쓸했다.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던 친구가, 어리게만 보던 친구가 자신의 길을 자신의 눈으로 똑바로 직시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은 길을 잃어 방황하고 있는데, 똑바로 자신의 길을 가는 마틴을 보니 어느새 자신의 품을 떠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아니. 내 품에 있었던 적은 없지. 그냥 난 시작을 함께했을 뿐이구나.’

자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마틴은 이미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보는 것은 의외로 비참함이 먼저 다가왔다.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 나머지는 라니우스 님이랑 카인이랑 말해 봐. 그리고, 성하께서 내일 아침에 뵙자고 하시더라.”

“응? 응. 알겠어. 고마워.”

마틴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빛나는 마틴 옆에 있다가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서.

범이 도망치듯 벗어난 자리에 마틴은 범이 보이지 않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후… 후우… 후욱…”

내뱉는 호흡은 한 호흡 한 호흡이 힘겨워 보였다. 주먹이 쥐어진 손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는 얼굴은 비통해 보였다.

“이러는 게 맞는 거죠? 저. 저 잘 한 거죠?”

마틴의 혼잣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두막 안에서 나오는 이는 세르 할아버지였다.

“그래.  잘했다. 고생했구나.”

자애롭고 슬픈 얼굴로 마틴의 등을 쓰다듬는 세르 할아버지의 등장에 마틴은 이내 무너져 큰소리로 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범을 오래 보아 왔고 함께 해왔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잊은 적이 없는 소중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쉽게 해결이 되지 않을 사건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사건은 해결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친구이자 단 하나의 형제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때 자신이 발목을 잡을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서러움과 비탄이 작은 정원에 울려 퍼졌다.

*

넋이 빠진 듯 걸어가는 범이었다. 스승을 찾아서 가는 길에 본 광경이 더 넋을 빠지게 했다.

도망치듯이 나온 자리에서 자신은 먼저 카인을 향해서 갔다. 이내 도착한 [바람이 머물다 간] 여관. 그곳에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카인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고 가까이 다가가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문득 든 생각에 자신이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온다면 당연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난 마틴이, 카인이 나를 기다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 거지…?’

떠날 사람이라면서 사람들에게 경계를 그으면서도 마틴과 카인이 자신에게 주는 신뢰와 애정이 좋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당연해졌다.

‘하… 진짜… 마틴의 말이 틀린 게 없구나.’

갑자기 전신에 힘이 빠졌다. 자신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했다 여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도저히 지금 카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넋을 잃은 사람처럼 걸어서 도착한 곳은 스승님의 처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언제 나와 같은 스승님의 얼굴이 보였다.

“범이 왔…”

목소리가 들리자 실낱같이 자신을 잡고 있던 무언가마저 끊어지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으헝헝…스…승님…전…ㅆ…레…헝…”

너무 서럽고 너무 자신이 미워서 눈물이, 비통한 통곡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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