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피의 참회동.
103. 피의 참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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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동굴 안, 보는 것만으로 미지에 대한 공포를 자극했다.
하지만 드라쿨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원시의 괴물이라, 오랜만에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겠어.”
지금 드라쿨에게 미지는 오히려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원시의 존재에 그가 이렇게 기대하는 이유는 있었다.
“과연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려나?”
바로 흡혈을 하면 그 힘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흡혈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초월자처럼 격이 높은 존재를 흡혈할 때는 그 대상의 힘을 흡수할 수 있었다.
드라쿨이 드래곤의 피를 흡수하고, 강력한 육체와 고도의 지능, 마법적인 재능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가디언인가? 왜, 안 나오나 했다.”
한참을 들어갔을 때, 드라쿨의 앞을 막아서는 슬라임들이 나타났다.
가디언, 던전을 지키는 위해서 존재하는 수호자였다.
“그나저나 저것들이 가디언이라고?”
앞을 막아선 슬라임 무리를 확인한 드라쿨은 이상함을 느꼈다.
가디언이 안에서 원시의 존재에 비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전혀 던전 수호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니, 애초에 막겠다는 의지가 없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드라쿨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뀨?』
『뀨우?』
『뀨! 뀨!』
『뀨우우!』
드라쿨이 슬라임이 있던 곳을 넘어서자, 슬라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더니 큰 원을 만들어서 드라쿨을 둘러쌌다.
녀석들은 귀여운 소리를 냈지만, 드라쿨은 그 모습에 입가의 미소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것들 뭐야?”
드라쿨은 자신을 둘러싼 붉은 슬라임을 보고 경계했다.
그가 이렇게 놀란 이유는 녀석들의 귀여운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의념을 사용해?”
그렇다, 녀석들이 전부 종을 초월했다는 증거였다.
“종을 초월한 슬라임이라······. 난생 듣도 보도 못한 일이지만, 내 힘을 시험하기에는 나쁘지 않겠구나.”
드라쿨은 슬라임들을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기본적으로 종을 초월했다는 것은 특수한 뭔가가 있다는 말이었는데, 슬라임이 종을 초월한 슬라임은 어느 힘이 있을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친히, 강자 된 도리로서 먼저 공격을 해주마.”
드라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곧바로 혈마법을 사용했다.
대략 스무 마리가 넘어가는 초월종을 상대하는 데 부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블러드 커터.”
드라쿨의 주위에서 수십 개의 붉은 칼날이 생겨났다.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초월자인 드라쿨의 기운이 담긴 마법이었다.
그 안에 있는 힘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슈욱-!
수십 개의 붉은 칼날은 빠른 속도로 슬라임들에게 쇄도했다.
서걱-! 투두두둑-!
붉은 칼날은 슬라임을 전부 베어버렸고, 공격당한 슬라임들은 전부 갈라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에 드라쿨의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그럼, 그렇지. 종을 초월한다 한들 그 본질은 달라지지······.”
의기양양하게 말을 뱉던 드라쿨은 멈칫했다.
그대로 사라져야 할 슬라임이 꼬물꼬물 움직이면서 원래 모양을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뀨! 뀨!』
『뀨우! 뀨!』
그리고는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했다.
그래 봤자, 워낙 소리가 귀여워서 위협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황을 앞에서 보는 드라쿨의 생각은 달랐다.
몸이 여러 등분으로 잘렸음에도 다시 합쳐지면서, 저런 귀여운 소리를 내자 더 기괴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 원시의 존재를 가둬둔 가디언이 그리 쉽게 쓰러질 리가 없지. 내 예상대로구나.”
드라쿨은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겉모습과는 달랐다.
‘······대체 이놈들 뭐지? 이거 잘못 들어온 거 아니야?’
드라쿨의 불안감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괜히 아까 봤던 비석의 글귀까지 떠올랐다.
하지만 살짝 불안할 뿐이었지만, 겁을 먹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사라진 걸 알면, 하온이 찾아오겠지. 그럼 뭐가 나오든 상관없다.’
그는 강하온을 믿었다.
걱정돼서 찾은 것이 아니라,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찾으러 오는 게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찾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
게다가 피의 맹약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강하온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재생해봐라, 재생하지 못할 때까지 베어줄 테니 말이다! 크하하하!”
생각을 정리한 드라쿨은 큰 소리로 당당하게 행동했다.
절대로 자신이 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지켜보겠다.”
드라쿨의 손을 움직이지, 그의 손끝이 지나간 곳에는 붉은 칼날이 생겨났다.
그러한 드라쿨의 모습은 엄청난 위압감을 풍겨냈다.
그의 손에 펼쳐지는 붉은 칼날의 수가 많아지마, 용의 비늘을 연상케 했다.
슈욱-!
붉은 칼날은 다시 한번, 엄청난 속도로 슬라임을 향해 쇄도했다.
“!!!”
그때, 드라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슈욱-!
슬라임들이 일제히 붉은 칼날을 뱉어내고 있었다.
펑-! 펑-!
그렇게 양쪽에서 쇄도하던 붉은 칼날은 서로 부딪히며 터져나갔다.
슬라임이 만든 블러드 커터가 드라쿨이 만든 블러드 커터에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다는 거였다.
하지만 드라쿨이 진짜 놀라게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스무 마리가 넘어가던 슬라임이 전부 드라쿨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모습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크하하하! 고작 그런 공격이 통할 거 같으냐?』
『우리를 보고 놀란 눈빛이군?』
『고귀한 이 몸이 친히 설명해주지.』
『우리는 고귀한 밤의 귀족!』
『뱀파이어를 이끄는 왕이다.』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게다가 말하는 것을 보니, 성격조차 똑 닮아 있었다.
“······내가 저렇게 건방졌나?”
드라쿨은 의기양양, 아니 얄밉게 쳐다보는, 자기 모습을 한 슬라임을 보고 처음으로 자기성찰을 했다.
하지만 자기성찰을 할 시간은 없었다.
『블러드 에로우, 네 놈의 몸을 꿰뚫어주지.』
『블러드 커터, 거슬리는 몸뚱이를 전부 잘라주지.』
『블러드 붐, 터지는 것만큼 아름다운 예술은 없지. 그걸 보여주도록 하지, 네 몸으로.』
슬라임들은 드라쿨의 마법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지,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면서 전부 마법을 펼쳤다.
그 마법이 얼마나 많은지, 동굴 천장까지 마법이 가득 찰 정도였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그 모습에 드라쿨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을 하면서 툭툭 뱉는 슬라임의 말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이것은 자신의 모습을 한 슬라임에게 향하는 분노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내가 저렇게 재수 없을 리가 없다.’
그는 이미 깨달았지만, 현실을 부정했다.
“전부 지워주마.”
드라쿨의 등 뒤에서 엄청난 양의 붉은 빛이 생겨났다.
정확히 슬라임이 만들어낸 혈 마법의 수와 같았다.
하지만 붉은 빛은 훨씬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강하온의 피 때문에 생긴 차이였다.
슬라임들은 드라쿨을 복사했지만, 그의 몸속에 흐르는 강하온의 힘은 복사하지 못한 것이다.
“거짓된 놈들아.”
드라쿨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렇게 드라쿨과 슬라임이 만든 마법이 서로 부딪혔다.
그리고 결과는 아까와 완전히 달랐다.
서걱-! 슈욱-! 펑-!
드라쿨의 마법은 슬라임이 만든 마법을 전부 없애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따라 한 슬라임에게 적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강하온의 힘 때문인지, 슬라임들은 재생하지 못하고 붉은 피의 웅덩이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오직 나 하나로 충분하다, 가짜 녀석들아.”
그 모습을 확인한 드라쿨은, 그제야 웃으면서 크게 웃으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자기성찰을 제대로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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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던 무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그 변화가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변화로 인해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그 존재는 태초 신이라 불리는 창조주이다.
그는 자신이 존재하고, 한동안 무에서 가만히 있었다.
『왜 내가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과연 나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아는 존재도, 대답해줄 존재도,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이 전능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전지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알지 못한다면, 대답해줄 존재를 만들어야겠구나.』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대답해줄, 그렇지 않다면 같이 생각해줄 존재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창조주는 최초의 차원, 시온을 창조했다.
이때가 원시였다.
시온은 그 뒤로 동물을 만들었고, 자신을 본뜬 존재, 신도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 원시의 존재였다.
피의 신, 블미르.
그 역시 창조주가 직접 빚은 원시의 존재였다.
그중에서도 괘 강력한 존재였는데, 그 이유는 태초 신 때문이었다.
태초 신은 신들을 만들 때, 완전히 자신과 똑같이 만들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자신의 모든 힘을 전부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태초 신은 차원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의 힘씩만 골라서 신을 만들었다.
물의 힘을 가진 신, 불의 힘을 가진 힘, 빛의 힘을 가진 힘, 이렇게 말이다.
당연히 그 구성하는 요소의 비중이 높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했는데, 피는 각자 색은 다를지 몰라도,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
창조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는 차원을 구성하는 요소 중,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였다.
이러다 보니 피의 신, 블미르의 힘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주가 이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생각하기 위해 부여한 자유의지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창조주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아가 발달하게 됐다.
“이곳은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죽고 싶은 것인가? 비켜.”
“미개한 것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회가 구성됐고, 서열이 생겨났다.
서열의 기준은 얼마나 힘이었고, 신들은 자연스레 힘을 갈구하게 됐다.
그것은 신들 사이에서도 강력했던 블미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최상의 신들 사이에서는 그 경쟁이 더욱 심했다.
신의 왕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블미르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어차피 내 힘이다, 나한테로 돌아오는 것뿐이니 억울해하지 마라.”
힘을 얻어야 한다는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먹혀버린 것이다.
그는 신들 사이에서 존재하던 금기, 살신을 하고 말았다.
신을 죽이고, 피에 담긴 힘을 흡수한 블미르는 그 힘에 취해 살신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에는 보다 못한 창조주가 나섰고, 창조주는 차마 자신이 만든 존재를 죽일 수 없었기에 참회동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가둬둔 것이었다.
『크르륵, 오랜만에 맡아 보는 피 냄새구나. 아주 향기로워.』
그런데 그러한 존재, 블미르가 깨어났다.
그를 깨운 피 냄새의 주인은 드라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