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태초 신의 파편
89. 태초 신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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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순이는 강하온이 한 말을 곱씹었다.
‘보여줄 사람이면······.’
그녀는 보여줄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한······빛나랬나? 하온의 부인.’
은순이가 판게아에서 많이 생각했던 인간이다.
그녀가 관심을 가진 두 번째 인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첫 번째는 강하온이었다.
그녀는 한빛나에게 여러 감정을 가졌다.
우선은 질투였다.
처음 강하온이 판게아를 떠났을 당시,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한빛나라는 인간이 없었다면, 강하온은 떠나지 않았을까 하면서 말이다.
그다음 생긴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드래곤이 인간을 부러워해? 다른 드래곤들이 보면 광룡이 아닐까 의심한 일이지만, 그녀는 한빛나가 부러웠다.
다른 것이 부러운 것은 아니고, 한빛나가 자신보다 먼저 강하온을 만났다는 것이 말이다.
마지막은 그냥 한빛나가 궁금했다.
과연 어떤 인간이길래, 강하온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보게 된다고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기 있네.”
“······.”
신화 아카데미로 돌아온 강하온은 나래와 레아를 가리켰고, 은순이는 두 아이를 보고는 멈칫했다.
그리고는 경멸하는 눈으로 강하온을 쳐다봤다.
“이런 취향이었나?”
은순이는 드래곤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문화도 다 알았다.
판게아에서는 지구보다 여자가 빠른 나이에 시집을 가기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13살 정도였는데, 지금 나래와 레아의 모습은 5살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거였는지도 모르겠군.”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강하온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은순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은순이는 대꾸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이어갔다.
은순이는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그냥 예쁜 것이 아닌, 엄청나게 예쁘다는 것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판게아에 미의 신이 그녀의 미모를 질투해서 지상에 강림한 것은 드래곤과 초월자 사이에서 유명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항상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수많은 신은 물론, 심지어는 초월자까지 자신에게 구애를 표현했는데, 정작 자신의 곁에 있었던 강하온은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순이는 강하온이 성불구자, 흔히 말하는 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강하온이 왜 그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온, 네가 좋아하는 취향은 저런 것이었군.”
애초에 취향이 틀렸다.
은순이는 전형적인 모델 같은 미인이었다.
“미친······, 이게 어디 잡혀갈 소리를 당당하게도 하고 있어.”
강하온은 은순이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사적으로 욕이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저 아이들은 내 딸들이야.”
“······딸들?”
은순이는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게, 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강하온에게 딸이 없었고, 강하온이 이곳에 온 지 아직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 설마 나래랑 레아를 보고 빛나라고 생각한 거야?”
“······아니다.”
은순이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강하온은 그런 은순이를 보며, 웃을 뿐 더는 캐묻지 않았다.
“가자, 아이들한테 인사하러.”
“······알았다.”
강하온은 은순이를 데리고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은순이는 걸어가면서 나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하나도 안 닮았네.“
강하온이 말하지 않았으면, 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어려웠을 거다.
나래를 확인한 그녀는 레아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저 수인 꼬마는 뭐지? 설마 다른 부인도 있었나? 설마 세 번째가 되어야 하는 건가?’
은순이는 레아가 단번에 수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을 다 하기 시작했다.
“강하온 헌터다, 그런데 옆에는 누구지? 장난 아닌데?”
“와······, 예쁘다.”
“이 세상 사람 맞나? 이 세상 미모가 아닌데?”
“모델인가? 걷는 데 품격이 느껴진다.”
두 사람이 걸어가자, 아직 남아 있던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정확히는 은순이한테 말이다.
은순이의 미모를 본 사람들은 전부 넋을 잃고 지나갔다.
“그나저나 누구지?”
“아내 아닐까? 저기 강하온 헌터의 딸 봐봐, 머리색이나 피부색이 똑 닮았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레아랑 닮았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은순이와 레아가 닮은 탓에, 사람들은 은순이가 강하온의 아내라고 생각했다.
‘닮았나?’
은순이는 그 모든 소리를 들었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오해를 받는 것이지만, 잠시라도 강하온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좋았기 때문이다.
“애들아, 잘 있었어?”
“네!”
“응!”
나래와 레아는 달려와서 강하온의 품에 안겼고, 강하온은 아이들을 보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아이들이네.’
그녀는 원래 인간 아이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강하온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이 생겼다.
두 아이는 그녀가 보기에도 귀였다.
‘그나저나 저렇게도 웃을 수 있었구나.’
그녀의 눈에는 아이들은 잠깐이었고, 강하온의 미소만이 보였다.
강하온과 10년 넘게 지낸 은순이도 처음 보는 미소였다.
은순이는 두 아이가 부러워졌다.
자신도 저런 사랑스러운 미소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 둘 다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여기는 아빠 친구, 은순이······으음.”
은순이를 소개하던 강하온은 멈칫했다.
이름은 소개했지만, 호칭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은순이의 나이는 정확히는 몰라도, 2000살이 넘어갔다.
그러면 화석, 아니 할머니라 부르는 게 옳지만, 지금 은순이의 외모를 보면 그러는 게 이상했다.
“이모라고 부르면 되겠다. 이쪽은 아빠 친구 은순이 이모야.”
결국, 이모라는 호칭으로 정해졌다.
“······너 내가 은순이 아니라고 했지?”
은순이는 강하온을 보고, 이를 갈며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강하온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은순이는, 영원한 은순이야.”“······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단호한 강하온의 대답에, 은순이는 체념했다.
“아, 아내분이 아니었구나.”
“그러게 애들 엄마인 줄 알았는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은순이가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하온은 은순이를 경계하는 두 아이를 보며 말했다.
“빨리 웃으면서 인사해봐,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알았어, 애들아 안녕? 나는 하온의 친구, 아이실라스 라이제르라고 한단다.”
은순이는 기꺼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은순이라고 말하지는 않고, 본래 이름을 말했다.
자신의 입으로 은순이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인사를 봐도, 아이들의 반응은 여전히 같았다.
의외였던 것은 나래도 같다는 것이었다.
레아는 원래가 젊은 여성을 경계했지만, 나래는 그러지 않았었다.
인사성이 바른데, 이번에는 레아처엄 강하온의 뒤에서 경계하고 있었다.
“······.”
은순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난처했다.
보통 인간이나 수인이 자신에게 이렇게 행동할리도 없겠지만, 한다면 아마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두 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하온의 딸 아이였으니까.
“얘들아, 인사해야지.”
결국, 강하온이 다시 아이들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그제야 나래는 인사를 했고, 레아도 나래가 인사하자 따라서 인사했다.
“하하, 아직 애들이 어색한가 보네. 일단 집으로 가자.”
강하온은 어색해지는 분위기에 웃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은순이와 두 아이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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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속에 있는 동굴, 그 안에는 자그마한 신전이 있었다.
신전 안에는 원탁이 있었고, 교주를 비롯한 사도가 둘러앉아 있었다. 맨 처음에는 열셋의 자리가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은 다섯 자리나 비어있었다.
“······.”
신전 안에는 정적으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게, 매번 교단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구라는 차원이 대적한 것이 아닌, 고작 인간 한 명한테 당하고 있었다.
단언컨대, 교단이 생겨난 이후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성전을 사용하기 위해, 수백이 넘어가는 광인이 희생하면서 큰 손해를 입었다.
그때, 정적을 깨며 말하는 이가 있었다.
여기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다른 옷을 입은 교주였다.
『설마 이번에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교주의 말에 전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수천, 수만 년, 아니 그보다 더 전, 기억하기조차 힘든 오래전부터 광인은 차원을 정복해왔다.
그리고 데카는 교주와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사도와 함께 시작부터 함께 해온 사도였다.
교단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라 불렸고, 지금까지 데카의 선에서 끝나지 않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강하온이라는 그자의 평가를 다시 해야 할 거 같군.』
교단의 기둥이 사라졌음에도 교주는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개의 기둥 중, 데카의 위치는 마지막이었다.
그 위에 있는 셋, 그리고 교주는 데카가 넘볼 수도 없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데카가 졌다고는 하지만 굳이 불안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 파장이 맞는 육체를 구하지 못해서였을 뿐이었다.
『그보다 지구를 지키는 성계신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그렇습니다.”
이제는 세 개의 기둥이 된, 유일하게 육체를 가지고 있는 세 번째 사도 스테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빛의 교단, 광인은 지구를 단숨에 정복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던 이유는 바로 지구를 지키는 성계신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성계신이 인간 내린 축복, 각성이 문제였다.
단 5년 만에 인간이 사도를 이길 정도의 비상식적인 수준의 힘을 내려주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네 개의 기둥을 제외하면 남은 사도 자리는 전부 갈아끼는 부품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성의 큰 문제는 광인에 빙의를 막는다는 것에 있었다.
이번에 교단에서 굳이 손해를 감수 하면서 까지, 전 세계에 SSS급 게이트를 연 이유도 혹시 모를 성계 신의 지원이 있을까봐서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태초 신의 파편을 지닌 존재가 이런 작은 차원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태초 신.
아무것도 없는 허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존재였다.
인간들이 창조주자 부르는 존재이기도 했다.
모든 시작의 근원, 지구를 지키는 성계신은 그 근원의 파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상천외한 힘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광인이 아직도 지구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바돈, 성계신의 신물은 찾았나?』
그들은 여태 지구의 성계신을 찾고 다녔지만, 어떻게 숨은 것인지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계신의 신물을 찾고 있었다.
교주에게는 그 물건에 남은 흔적을 찾아서, 흔적과 관련된 존재의 위치를 찾는 권능이 있었다.
“대략적인 위치는 찾았습니다, 현재 세계 헌터 협회장이 가지고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가신 년이 가지고 있군, 준비되는 대로 신물을 찾는다.』
“알겠습니다.”
『강하온을 처리하는 것은 그다음으로 하지, 전부 흔적을 들어내지 마라.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교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다른 사도들도 하나둘 신전을 떠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