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실버 드래곤, 은순이
88. 실버 드래곤, 은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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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게아는 100년 전 정도만 해도 죽음의 땅이라 불렸다.
전부 마신룡의 강림 때문이었다.
마신룡의 강림으로 오지로 숨어들었던 마족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점 대륙을 잠식해가는 마기 때문에 땅 자체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옛말이었다.
현재의 판게아는 근래에 들어서 가장 평화로웠다.
마신룡이라는 죽으면서 마족들은 다시 오지로 숨어들었으며, 평화협정으로 인해서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판게아가 이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전부 투신이라 불린 이방인, 강하온 덕분이었다.
강하온은 단신으로 마신룡을 처치했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 황제와 진솔한 대화를 하면서 향후 50년 동안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판게아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아니 존재가 있었다.
백발의 하얀 피부, 푸른 눈동자까지.
차가운 느낌을 팍팍 풍기는 미남.
바로 중간계의 관리자, 종의 정점, 마법의 종주, 최상위 포식자, 수많은 수식어가 붙은 종족의 수장인 드래곤 로드, 아카인 라이제르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중간계를 관리하는 종족의 수장으로서, 평화롭다면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표정을 보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녀석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녀의 딸, 아이실라스 라이제르였다. 강하온이 은순이라 부르는 실버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 뭐? 상사병에 걸려? 드래곤 망신이라 망신은 혼자서 다 하고 있어.”
드래곤은 물론, 신들, 그리고 몇몇의 초월자들에게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황이다.
그의 딸인 아이실라스가 상사병에 매일 밤을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이었다.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드래곤이 사랑이라니······.”
드래곤에게 애초에 사랑이란 개념은 없었다.
그들도 결혼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오로지 번식을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물론, 간혹 드래곤 중에서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돌연변이 같은 드래곤도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아카인은 그게 자신의 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인······흡!”
무의식적으로 인간이라는 말을 내뱉으려는 아카인은 재빨리 입을 막았다.
자신의 딸, 아이실라스가 사랑에 빠진 인간은 바로 강하온, 판게아에서 누구도 강하온을 무시하는 발언을 할 수 있는 용기, 아니 미친 자는 없었다.
그것은 강하온이 원래 차원으로 돌아간 지금도 같았다.
신이나 드래곤, 초월자들이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강하온이 판게아에 있었던 시간은 빙산의 일각이었지만, 그가 그들에게 남기고 간 기억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강하온은 욕을 하면, 어떻게든 알아서 차원을 넘어 찾아올 위인이었다.
게다가 아카인은 강하온을 생각할 때마다 왼쪽 송곳니가 시큰거렸다.
강하온과의 첫 만남 때, 날카로운 송곳니가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이빨을 뽑아갔기 때문이다.
“휴······.”
아카인은 주위에 누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했다.
고작 인간에게 드래곤 로드가 겁을 먹은 것이지만, 아카인은 전혀 그것이 부끄럽거나 하지 않았다.
강하온 앞에는 모든 존재가 평등했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아카인은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는 드래곤 중에서도 천재라고 불렀다.
역대급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아카인은 고룡이 되기 전 드래곤 로드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 아이실라스, 은순이었다.
게다가 아이실라스는 다른 해츨링들과 다르게 유희를 즐긴다며 사고를 치는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효녀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아카인은 아이실라스가 하고 싶다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그게 이런 결과로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 녀석, 지금이라도 따끔하게 혼내 줘야겠어.”
이미 성룡으로 자란 아이실라스였다.
인간으로 치면 다 큰 성인인 나이, 부모가 혼내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기는 하지만, 아카인은 이번에는 제대로 훈육을 할 생각이었다.
그건 부모로서 역할이기도 하지만, 드래곤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것을 놔둘 수 없는 로드의 역할이기도 했다.
“내 당장 이 녀석을······.”
당장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아이실라스의 레어로 이동하려 했던 아카인은 멈칫했다.
“······그런데 혼낼 수 있겠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이실라스는 역대급 재능이라 불렸던 아카인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났다.
게다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투신 강하온의 옆에서 시간을 배웠다. 듣기로는 한동안 강하온의 대련 상대를 해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실 성룡이지만, 성룡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수준이라는 거다.
“일단은 상태가 어떤지나 봐야겠네.”
아카인은 곧바로 계획을 수정했다.
딸한테 맞았다는 드래곤 로드가 되기는 싫은 아카인이었다.
번쩍-!
아카인은 생각을 정하고 자신의 딸, 아이실라스의 레어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이 무슨!”
텔레포트를 사용하던 아카인은 움찔 놀라며, 재빨리 좌표를 변경했다. 원래 이동하려던 목적지의 좌표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그냥 텔레포트를 강행했다가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결국, 아카인은 재빨리 좌표를 다시 탐색해서 멀쩡한 곳으로 이동했고, 아이실라스의 레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무슨 결계를······.”
아카인은 아이실라스의 레어 근처에 있는 결계를 보고는 식겁했다. 드래곤 중에서 마법에 조예가 깊다고 알려진 그가 봐도 이해하지 못할 마법들이 중첩된 결계였다.
아카인의 머릿속에는 훈육해야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크흠, 오랜만에 딸 아이 얼굴이나 봐야겠군.”
아카인은 헛기침을 하며 레어 쪽으로 걸어갔다.
『흐아아앙! 흐흐흑!』
레어 근처에 도착했던 아카인은 멈칫했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니고, 드래곤 상태로 우는지 의념으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용언을 사용해서 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근처에 살던 녀석들이 전부 피난을 갔지.”
아카인은 왜 근처에 살던 동물이며, 이종족들이 전부 수백 년 살아가던 터전을 옮겼는지 이해가 갔다.
안전하기로 유명한 실버 드래곤의 레어 근처를 버리고 말이다.
“그나저나······, 실라가 이렇게 울 줄이야······.”
아카인은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딸이 우는 소리에 느끼는 감정은 충격이었다.
평소에 감정을 유독 드러내지 않아서, 드래곤 사이에서도 불리는 별명이 얼음 마녀였다.
그런데 저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봤으니, 충격을 받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리고 이어서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감히 내 딸을!”
그가 분노를 느낀 대상은 강하온이었다.
드래곤은 부부간의 사랑은 없어도, 자식은 애틋하게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은 강하온에 대한 공포도 이겨냈다.
아카인은 일단 딸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레어 안으로 들어갔다.
첨벙-! 첨벙-!
레아 안에는 이미 물로 가득했다.
“아이고······.”
잠시 후, 레어의 심처에 도착한 아카인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으로 우는 아이실라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레어 바닥에 있던 물은 아이실라스의 눈물이었다.
“아이실라스! 지금 이게 무슨 추태를 부리는 거냐!”
아카인은 아이실라스가 태어난 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호통쳤다. 오금이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이건 부모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아이실라스의 위한 일이었다.
서럽게 울던 아이실라스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카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울음을 잠시 그쳤다.
“그래, 이 애비다. 지금 자랑스러운 실버 일족으로서 이게 무슨 추태를 부리는 거냐! 종족의 망신을 주······.”
울음이 그친 것을 확인한 아카인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변하는 아이실라스의 분위기 때문에 말을 멈춰야했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에요!』
아이실라스는 언제 울었냐는 듯, 아카인을 매섭게 노려봤다.
아카인은 자신의 딸이었지만, 섬뜩한 눈동자를 보자 움찔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아카인은 당황스러웠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자신의 잘못이라니, 아카인은 맹세코 딸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때! 저를 가지 못하게 막았잖아요.』
“가지 못하게 막아? 설마······, 투신이 이 세계를 떠날 때 말하는 것이냐?”
『네!』
“그건 다 너를 위해서였다, 기억나지 않니? 해츨링때부터 이 아비처럼 훌륭한 드래곤 로드가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아카인은 이제야 아이실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고, 억울했다.
아카인 뿐만이 아니었다.
고룡들의 생각은 전부 같았다.
당시에 강하온을 따라가겠다는 아이실라스를 전부 말렸다.
차기 드래곤 로드가 확정된 아이실라스가 어딘지도 모를 차원으로 떠난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억울하다고해도, 어찌 딸한테 화를 내겠는가.
화를 내지 않았다, 딸의 매서운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아카인은 늦은 딸의 사춘기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달래주기로 마음먹었다.
“실라야, 지금이라도 내가 로드 자리를 넘겨주마. 그러니 이제 마음을 정리하고 어릴 때 꿨던 훌륭한 로드가 되는 게 어떻겠니?”
아카인이 드래곤 로드 자리를 내려놓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긴 하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었다.
오늘 아이실라스의 힘을 제대로 알 게 된 것도 한몫했다.
『됐어요! 그런 개뼈다귀 같은 자리는 아버지나 평생 하세요!』
“뭐, 뭐? 개뼈다귀······?”
아카인은 충격에 말을 나오지 않았다.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실라스의 입에서 그런 충격적인 말이 나올지는 생각 못 했다.
하지만 그는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놀라야만 했다.
“포탈?”
갑자기 아이슬라스의 앞에 차원이 연결되는 포탈이 열린 것이다.
『저는 잠시 떠났다 올테니까, 찾지 마세요.』
아이실라스가 스스로 차원을 연 것이었고, 그녀는 그대로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아이실라스는 2204살에 아버지인 아카인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가출을 했다.
“······대단하구나.”
딸이 떠나는 모습을 보는 아카인은 감탄했다.
마나 스트림 현상도 없이, 스스로 차원을 열었다는 것은 아이실라스의 경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높다는 거였기 때문이다.
“그래, 이왕 가는 거 잘 갔다 오거라.”
그는 딸이 더 성장해서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딸을 응원했다.
적어도 투신이 사위가 되면, 자신의 이빨을 뽑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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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밖으로 나온 은순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온에게 들은 것하고는 다르네.』
아이실라스가 강하온한테 들은 지구는 고층 건물이 존재했고, 자동차라는 물건이 달린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은 새하얀 눈에, 작은 마을이 존재했다.
『판게아랑 비슷하구나.』
아이실라스가 도착한 곳은 스위스의 알프스산맥이었다.
『인간?』
그때, 그녀의 눈에 개미같이 작은 인간이 보였다.
스위스의 헌터들이었는데, 그들은 실버 드래곤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들한테 하온에 관해 물어봐야지.』
아이실라스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 어!”
“갑자기 몬스터가 인간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아이실라스의 변화에 깜짝 놀랐다.
그것도 눈이 확 돌아갈 정도의 미녀로 바뀌었으니, 더 그랬다.
“거기 인간.”
“네? 네!”
그녀에게 지목 당한 헌터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인간으로 변했다고 하지만, 그녀의 위압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강하온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강하온? 설마 강하온 헌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헌터는 몬스터가 말하는 것에 놀라기는 했지만, 놀라는 것보다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헌터? 그건 모르겠고, 이렇게 생긴 자다.”
아이실라스는 마법으로 강하온의 모습을 보여줬다.
“맞습니다!”
헌터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서 강하온을 모르는 헌터는 없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차갑기만 하던 아이실라스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생겼다.
“그래, 어디 있느냐?”
“그게 원래는 한국에 있으신데, 지금은 세계 각지를 돌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쪽으로 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네, 조금만 기다리면 강하온 헌터가 올 겁니다.”
“잠시 기다리도록 하지.”
그렇게 어색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 강하온이 찾아온 것이었다.
“은순아!”
아이실라스는 오랜만에 듣는 강하온의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하지만 꾹 참아내며 예전과 같이 화를 냈다.
“너!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강하온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서 은순이를 안았다.
원래였으면 기겁하며 떼어냈을 은순이었지만, 이번에는 얼굴을 붉힌 채 가만히 있었다.
“그나저나 눈은 왜 이렇게 부었어?”
은순이는 강하온의 말에 멈칫했다.
“······삐삐한테 물렸다.”
삐삐, 판게아의 모기 같은 생물이었다.
깅하온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뭐라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그나저나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빨리 가자.”
“보고 싶은 사람? 알았다.”
강하온은 곧바로 은순이를 데리고 신화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모르지, 그런데 좋게 끝났다는 거로 다행이라 생각하자.”
얼어있던 스위스의 헌터들은 전부 벙찐 표정으로 사라지는 게이트를 지켜봤다.
그리고 강하온이 중국을 지원 간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