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아카데미 사변 (1)
“크윽…….”
하인리히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차 안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여기는…….”
“하, 하인리히 님!”
근처에 있던 청년이 다급히 달려들었다.
청색 2반 시절부터 하인리히를 보좌하고 있는 카밀로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몸은 좀…….”
“카밀로… 지금 어떤 상황이지?”
하인리히는 두통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흑천마교와의 싸움은……?”
“아, 그것이…….”
카밀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승리로 끝났다고?”
“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총대주교를 쓰러뜨렸습니다.”
“……!”
하인리히는 눈을 크게 떴다.
흑천마교의 우두머리를 에르나스가 쓰러뜨렸다니… 하인리히로서는 믿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에르나스가…….”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리히테나워 기사단에 총대주교를 쓰러뜨릴 만한 사람은 에르나스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카밀로.”
“네, 하인리히 님.”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지?”
“브랜틀리 님은…….”
카밀로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시신을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
“그 이후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에… 시신을 찾는 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카밀로의 설명을 들으며, 하인리히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강하게 깨물어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위대한 아버지, 브랜틀리 아그리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카밀로.”
“네, 하인리히 님.”
“다른 희생은 없었나?”
“발렌티아노 교수님이… 총대주교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렇군…….”
하인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브랜틀리뿐만 아니라 발렌티아노까지 목숨을 잃었다니, 희생이 너무 컸다.
“안겔라 교수님도 총대주교와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으셨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총대주교가… 그렇게 강했나?”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발렌티아노 교수님이나 안겔라 교수님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고 합니다.”
“그 정도였다고?”
“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그래듀에이트들도 총대주교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충격적인 얘기였다.
최고 수준의 속도를 자랑하는 브랜틀리나 안겔라의 움직임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총대주교는 그것보다 강했다는 말인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대응할 수 있었을까?”
“그, 그건…….”
“아니, 됐다.”
하인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브랜틀리 아그리파는 분명 최고 수준의 절정급이었지만, 발렌티아노나 안겔라와 비교할 때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그리파 청월검술로 반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를… 에르나스가 쓰러뜨렸다는 거지?”
“네, 다만… 어떻게 쓰러뜨렸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째서지?”
“다들 후퇴시키고 에르나스 혼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웃기는군.”
에르나스가 희생정신을 발휘한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힘이라면 총대주교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방해꾼들을 쫓아 보냈을 뿐이다.
“어마어마한 놈이군…….”
“하인리히 님…….”
“결국 내 패배가 확정된 건가.”
“하인리히 님……!”
카밀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인리히 님은 결코……!”
“아니, 이제는 인정해야지.”
이번에 에르나스는 어마어마한 공적을 올렸다.
리히테나워 기사단장으로서 흑천마교를 무너뜨리고, 총대주교를 직접 처단했다.
하인리히가 앞으로 무슨 공적을 세워도… 에르나스를 넘어설 수는 없다.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는 에르나스에게 돌아갈 거야.”
“하인리히 님!”
이번 공적으로 에르나스는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것이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로 에르나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추대할 것이다.
브랜틀리나 하인리히가 총대주교를 쓰러뜨렸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브랜틀리는 죽었고, 하인리히도 총대주교와의 싸움에 참가하지 못했다.
“젠장, 에르나스 그놈은 매번 이런 식으로 하인리히 님의 앞을 가로막…….”
“카밀로, 오해하지 마.”
“네?”
“나는 에르나스에게 패배해도 상관없으니까.”
카밀로가 눈을 크게 떴다.
“하인리히 님, 그게 무슨…….”
“이제는 큰 의미가 없어졌어.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것도, 에르나스를 꺾는 것도.”
“……!”
“딱히 자포자기에 빠진 건 아니야. 단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게… 뭐지요?”
눈을 깜박이며 묻는 카밀로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그리파 가문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래듀에이트가 되는 것이지.”
“……!”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막강한 힘을 지닌 알베리히 대주교를 상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반격에 나서던 아버지의 모습을.
“이제는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경쟁할 필요도 없어.”
“하, 하인리히 님…….”
“나 자신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면 돼.”
이건 어떻게 보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신동’이라 불리던 시절, 하인리히는 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순수히 자기 자신의 능력만 갈고닦았다.
에르나스에게 패배하면서 바뀌게 되었지만…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에르나스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나는 하인리히 아그리파로서… 브랜틀리 아그리파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으면 돼.”
“하인리히 님……!”
카밀로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인리히를 쳐다봤다.
그 충성스러운 눈빛 앞에서, 하인리히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다, 카밀로. 너에게 리히테나워 대공의 측근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카밀로가 고개를 숙이면서 소리쳤다.
“저는 하인리히 님을 존경합니다! 하인리히 님이 어떤 지위에 있든… 계속 옆에서 보좌할 것입니다!”
“그래, 고맙다.”
하인리히는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지만, 결코 예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카밀로한테 고맙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만큼… 하인리히는 성장한 상태였다.
“카밀로, 식사거리를 가져와 줄 수 있을까. 허기가 느껴져서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카밀로가 다급히 마차에서 뛰쳐 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하인리히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손을 치켜들었다.
“…….”
마차 구석에 놓여 있던 검을 향해 마력을 뻗었지만, 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직 절정급은 아니군.”
하인리히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혹시나 했는데 아직 절정급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미 하인리히는 아그리파 청월검술을 터득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일격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기에, 본래 절정급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아그리파 청월검술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곧… 절정급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르나스, 그때 다시 보자.”
절정급에 도달해 봤자, 에르나스는 더 높은 경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때가 되면 열등감이나 질투심을 느끼는 일 없이 당당하게 에르나스의 곁에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에르나스는 에르나스고, 자신은 자신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인리히는 홀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하인리히가 사라졌다고?”
“베리스리제, 혹시 아는 거 있나요?”
중부 지역으로 돌아가는 행군길.
세리느가 다가와서 묻자, 베리스리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딱히 친하지도 않은데.”
“설마 브랜틀리 님이 돌아가신 것 때문일까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받고 잠적한 거라고? 그 녀석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건 그렇긴 한데…….”
총본산의 싸움 이후, 계속 정신을 잃고 있던 하인리히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본 카밀로의 말에 의하면,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 놓고 사라졌다고 한다.
“카밀로는 뭐라고 해?”
“하인리히 님은 분명 돌아오실 거다… 그런 소리만 하던데요.”
“그러면 그 소리를 믿는 수밖에 없겠네. 에르나스를 제외하면 하인리히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게 카밀로일 테니까.”
“그런가요…….”
“내버려 둬. 알아서 잘하겠지.”
베리스리제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천마교도 멸망했고, 이제 전력 이탈을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그건… 그렇죠.”
브랜틀리와 발렌티아노가 죽었고, 안겔라도 부상을 입었다.
이 상황에서 하인리히까지 빠지면 리히테나워 기사단은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베리스리제가 말했듯 흑천마교는 이미 멸망했다.
리히테나워 기사단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도 별문제가 없다.
“검술명가들도 이제는 더 이상 싸움을 벌이지 못하는 상태고 말이지. 한동안 평화로울 것 같은데.”
“…….”
현재 제국 내부에 전쟁을 일으킬 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싸움에서 에르나스가 전부 굴복시켰으니까.
“이제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면 아무 것도 걱정할 게 없겠네. 아무도 에르나스에게 대들지 못할 테니까.”
베리스리제의 말대로, 이제 아무도 에르나스에게 대들지 못한다.
유일하게 에르나스를 견제할 수 있는 게 브랜틀리였는데, 이번 싸움에서 전사했다.
아카데미 교수들이야 에르나스 편이니… 앞으로는 에르나스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황위 계승만 잘 끝나면, 평화로운 시대가 시작되겠어.”
“평화로운 시대라…….”
“그렇게 되면, 에르나스도 누구를 진짜 반려로 삼을까 결정할 수 있겠지.”
“가, 갑자기 왜 그런 얘기가 되는 건가요?”
세리느는 얼굴을 붉히며 베리스리제를 노려봤다.
“에르나스는 리히테나워 대공으로서 황녀 전하의 약혼자가 되어야…….”
“형식적인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만에 하나 에르나스가 정말로 황녀 전하와 결혼할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중 누군가가 에르나스의 마음을 빼앗으면…….”
목소리를 낮추면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다, 그런 걸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크, 클로에?”
클로에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 우리는 그냥…….”
“뭐야, 클로에 유스부르크. 우리를 견제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고요.”
베리스리제의 말에 쌀쌀맞게 대꾸한 뒤, 클로에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방금 전, 에르나스 님이 혼자서 떠나셨어요.”
“……!”
하인리히에 이어, 에르나스도 혼자서 떠났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듣고, 세리느와 베리스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 * *
‘이제는 마력 제어에도 익숙해졌군.’
바람을 가르며 이동하면서, 나는 전신의 마력이 안정적으로 순환하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현기증도 느끼고 그랬지만, 이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마나 하트가 없는 검제급의 육체에 완벽히 적응한 것이다.
‘정신세계의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절정급 시절보다 마력 효율이 좋아졌어.’
지금 나는 경신술를 사용해 이동하고 있었다.
말이 경신술이지, 이제는 거의 비행술에 가깝다.
‘이 정도면… 며칠 안 되어서 도착할 수 있겠어.’
나는 지금 서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리히테나워 기사단은 황궁으로 가기 위해 북상하고 있지만, 나 혼자 빠져나와 서쪽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 아카데미로 가야… 선수를 칠 수 있으니까.’
머지않아 소설 전개를 앞지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수를 칠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에르나스가 암약하지 않고 있으니, 소설하고 완전히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알드바우트 총장의 포지션은 동일하겠지.’
아카데미 총장… ‘백랑검(白狼劍)’ 알드바우트.
우리가 아카데미 바깥에서 군사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줄곧 아카데미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가 직접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아카데미를 습격해야 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이제 곧 전초전이 시작된다.
이 전초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는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에 선제공격을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