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73화 (172/212)

173화 초월의 경지 (4)

아카데미에서 기초 검술을 배울 때, 심기체(心技體)라는 개념을 배운 적이 있다.

이건 현실 세계의 무술에서 말하는 심기체하고 비슷하면서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래듀에이트로서 성장하려면 정신적 요소인 심(心), 기술적 요소인 기(技), 육체적 요소인 체(體)를 함께 성장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기와 체를 성장시키는 법뿐이었다.

기를 성장시키기 위해 검술을 수련시키고, 체를 성장시키기 위해 체력 단련을 시키고, 마력 연공법을 가르쳤다.

심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마음가짐만 가르쳐 준 뒤, 그 이후는 검사 개개인의 성장에 맡겼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정신을 성장시키는 스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많은 사람이 기와 체의 영역에서 한계에 도전했다.

예를 들어 브랜틀리 같은 검사들은 평생에 걸쳐 검술을 수련했다.

그들은 기의 영역에서 거의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총대주교 같은 마교도들은 체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닫고 흑천마인대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 흑천급에 도달하여 체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기와 체는 명확히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유스레흐트로 복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자신보다 우월한 기와 체를 지닌 존재에게 무릎 꿇게 된다.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고 했을 때, 절세 검술과 평범한 검술이 부딪치면 평범한 검술 쪽이 패배하는 게 당연하다.

평범한 인간은 흑천마인대법으로 마인의 육체를 갖게 된 흑천급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고, 흑천급 또한 그 이상의 육체를 지닌 존재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와 체가 우월한 격상(格上)의 존재에게 승리하는 방법이 있다.

심의 영역에서 상대를 능가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결코 지지 않겠다고 투지를 불태우는 것도 여기에 해당되지만, 결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기 위한 교활함도 해당될 테고, 심리전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인 강인함도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궁극적인 심의 영역은 결국 자신의 뜻을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의지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극대화된 의지가 정신세계를 초월하여 물질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

사실 그래듀에이트들은 이미 절정급 단계에서 이 이치의 일부분을 습득했다.

육체를 검과 일체화하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이다.

현실에서 육체와 검은 엄연히 별개의 존재다.

아무리 마력을 뻗는다고 해서 일체가 될 수는 없다.

육체와 검을 일체화하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물질세계에 작용하여, 본래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신검합일을 구현한 것이다.

그 본질적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절정급을 넘어선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나는 이 결정적인 깨달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을 실제로 구현하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약했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강해져야만 했다.

유스레흐트로 타인의 검술을 연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창안하여 기의 성장을 이루었다.

막대한 마력을 얻고 철혈검마심법과 흑천마인대법을 조화시켜 체의 조건을 충족했다.

심의 각성에 기와 체가 따라올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 그러니…….’

내 육체에 흐르는 것은 철혈(鐵血)의 마력.

마나 하트를 없애고 혈맥 전체에 마력을 전개하면서, 전신이 균일하게 철혈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제 신검합일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철혈로 가득 찬 나 자신이 한 자루의 검이니까.

‘그리고… 내 마음에도 검을 만든다.’

마음속에 한 자루의 검을 만든다.

그것은 무엇에도 꺾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불굴(不屈)의 검이다.

어떤 존재도 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불패(不敗)의 검이다.

그렇게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검을…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검과 동기화시킨다.

‘마음의 검으로, 마음속의 적을 벤다.’

정신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물질세계처럼 속도의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검으로 마음속의 적을 베는 것은 한순간에 끝난다.

이것을 물질세계와 동기화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이 바로… 의념의 검인 심검(心劍)이다.’

정신세계의 속도를 물질세계에 구현하는 경지.

이것이 바로 절정급을 넘어선 곳에 있는 검제급(劍帝級)이다.

“크아아아……!”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총대주교가 절규했다.

총대주교는 이미 내가 펼친 푸른색 검기에 완전히 관통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총대주교는 이미 인간의 육체를 버린 상태다.

흑천급에 도달한 총대주교는 가슴에 구멍이 뚫려 봤자 죽지 않는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총대주교가 방금 전에 펼쳤던 흑천무형검 절기 ‘흑천종언’은 파훼되었다.

하지만 총대주교는 그 마력을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아티팩트가 없어도 흑천급의 경지로 다시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마력을 다시 제어하여, 이번에는 무수히 많은 무형검을 날렸다.

“흑천굉우(黑天轟雨)……!”

폭음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수백 개의 무형검.

초고속으로 날아오는 검의 폭우 속에서, 나는 정신세계로 진입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제8식…….”

소설 속에서 욜스 칼레시우스는 학생들이 격상의 존재를 쓰러뜨릴 수 있도록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개발했다.

비록 욜스는 일찍 사망했지만, 주인공 아칸델이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계승하여 진화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강적과의 싸움을 거쳐, 아칸델은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완성하게 된다.

정신세계에서 적을 찢어발기는 푸른 번개를… 현실 세계에 구현하면서.

[칼레시우스 창뢰검술(S랭크)의 이해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S랭크)의 성장과 함께 영구 귀속이 진행됩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SS랭크)의 영구 귀속이 완료되었습니다.]

내 몸에 새겨져 있던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이 최종 단계로 진화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짧게 읊조렸다.

“창뢰검형(蒼雷劍形).”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제8식 창뢰검형이 펼쳐진 순간.

내 전신이 한 줄기 번개가 되었다.

창뢰신기(蒼雷迅氣)로 가속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속(神速)의 번개.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백 자루의 무형검을 뚫고, 총대주교에게 솟구친다.

방금 전까지 총대주교는 내가 접근하면 도망쳤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쳐 봤자 나에게서 거리를 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

소리 없이 절규하면서 총대주교가 팔을 치켜들었다.

이미 그 팔은 한 자루의 검처럼 변형된 상태다.

마인들처럼 무기에 의존하지 않는 몸이 되었을 텐데,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격상의 존재와 싸울 때, 인간은 검을 들어야 하는 법이니까.

흑천급의 육체를 최대한 활용해, 총대주교가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총대주교.”

나는 짧게 중얼거렸다.

“내 승리다.”

총대주교의 마지막 공격은 허공을 갈랐고.

창뢰검형으로 휘두른 나의 공격은 총대주교의 전신을 일도양단했다.

* * *

화산이 본격적인 폭발을 시작했다.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지상을 내려다보며, 총대주교는 중얼거렸다.

“그런 것이군…….”

아까 에르나스가 말한 대로다.

몸으로 경험하니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물질세계는 유한(有限)하나, 정신세계는 무한(無限)… 정신세계의 속도를 물질세계에 구현할 수 있다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이 가능한 건가.”

“…….”

“그러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되겠군. 아무리 강대한 생물과 맞서더라도… 정신의 힘으로 능가하면 되는 것이니까.”

물질세계에서 코끼리와 개미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세계에서 코끼리와 개미는 대등하다.

만약 상대가 동일한 경지에 도달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정신세계에서 개미의 의지가 더 강하다면, 승산이 생긴다.

“이렇게 하면… 격하(格下)의 존재가 격상(格上)의 존재를 꺾을 가능성이 생기는군.”

그래듀에이트는 격상의 존재를 꺾기 위한 경지.

그 궁극적 도달점은, 정신세계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흑천마교가 추구한 것처럼…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육체라는 한계에 갇혀 있기에, 정신의 세계에서 무한한 힘을 추구할 수 있는 건가.”

총대주교는 탄식했다.

그동안 흑천마교는 인간이라는 나약한 생물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아무리 육체의 한계를 극복해 봤자, 결국 물질세계의 유한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흑천마교는 물질세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정신세계의 무한성에 착목해야 했다.

정신세계의 무한성으로 물질세계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진정한 정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계속… 흑천급은 정답이 아니라고 말했던 거군.”

“그래, 총대주교.”

에르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너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켰을 뿐, 스스로의 정신을 더 높은 경지에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

“인정한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흑천급에 도달하기 위해 대량의 생명을 희생시키며 인체 실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모든 대주교들과 함께 화산 안에 틀어박혀 백 년 동안 명상을 하는 편이 더 나았다.

대주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계속 고민했다면… 정답을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졌다. 흑천마교의 패배다.”

총대주교를 흑천급에 도달시키기 위해 흑천마교는 모든 역량을 소모했다.

마교도들은 모조리 괴인이나 소마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알베리히 등 대주교들도 전부 죽었다.

총대주교 홀로 남아 흑천마교의 이상을 실현할 생각이었지만, 이래서는 불가능하다.

지금 이곳에서 흑천마교의 비원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너희들의 승리다.”

“…….”

“하지만…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알고 있나?”

총대주교는 에르나스를 응시하며 물었다.

“우리 흑천마교가 추구하는 투쟁의 세계를 저지해 봤자…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철혈검제의 세계다.”

흑천마교의 모든 지식을 계승한 총대주교는 알고 있다.

동쪽 바다 너머의 영묘(靈廟)에 잠든 철혈검제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네 아버지는 영묘에서 철혈검제의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네가 흑천마교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위령제는 위령제로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다.”

“…….”

“천 년 전부터 철혈검제가 꿈꿔 왔던 이상이 실현된다면… 이 대륙은 투쟁의 세계보다 더욱 가혹하고 잔혹한 세계가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흑천마교는 최대한 빨리 제국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사회체제를 붕괴시키고 자연 그대로인 투쟁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세계에서 철혈검제가 추구하는 이상은 성립할 수 없으니까.

“투쟁의 세계는 철혈검제의 세계를 막기 위한 대책이기도 했다. 너희가… 철혈검제의 세계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걱정하지 마라, 총대주교.”

에르나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

“그걸 막기 위해,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다.”

그 말을 듣고.

총대주교는 비로소 깨달았다.

에르나스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에르나스야말로 진정한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그렇군.”

총대주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싸워 온 건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여.”

“…….”

“좋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나도 할 말이 없다.”

이제 총대주교도 한계에 도달했다.

더 이상 존재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총대주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에르나스에게 말을 건넸다.

“지켜봐라, 너의 세계를.”

새로운 검제(劍帝)에게 격려의 말을 던진 뒤.

총대주교의 잔해는 끓어오르는 용암 속으로 추락했다.

흑천마교 최후의 순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