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초월의 경지 (2)
총본산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총대주교의 마력 방출에 의한 것이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무너진 틈새로 흘러나온 기척을 감지하는 것으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신속하게 현장으로 날아올 수 있었던 건 이것 때문이다.
‘위험하군.’
무너진 틈새로 들어오면서, 나는 화산이 위험한 상태라는 걸 눈치챘다.
총대주교의 각성이 지하의 마그마를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다.
언제 화산이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겔라 교수님.”
나는 안겔라를 향해 말을 건넸다.
“기사단 전원을 데리고, 이 화산에서 후퇴해 주십시오.”
“에르나스, 무슨…….”
“부탁드리겠습니다.”
“…….”
안겔라가 잠시 침묵했다.
“알겠다. 언제나 그랬듯이, 네 말이 정답이겠지.”
다행히 안겔라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안겔라는 여기 남아서 나를 돕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을 무사히 후퇴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화산 폭발에 말려들 수도 있고… 이제부터 벌어질 싸움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
“에르나스, 준비는 다 끝난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
안겔라가 씁쓸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와 다른 경지에 도달했다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 같은 구시대의 검사는 물러서 주는 게 맡겠지.”
“…….”
“건투를 빌겠다, 에르나스.”
그 말을 남기고, 안겔라가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안겔라에게 다른 사람들을 맡긴 뒤,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백발의 노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인가.”
“그렇다, 총대주교.”
소설 속 묘사대로, 총대주교는 독특한 위엄이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눈빛은 차분했고, 표정은 근엄했다.
아카데미 총장 자리에 앉아 있어도 위화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노인이 이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극악인이라는 사실을.
“알베리히를 통해, 네 얘기를 많이 들었다.”
총대주교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알베리히는 내 옆에서 계속 보고를 올렸으니까.”
“편히 잠자지 못했겠군.”
“그렇지. 그래도 네가 누구인지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말하던 총대주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알베리히가 말하더군. 너는 아무래도 흑천마교에 가까운 인물 같다고.”
“…….”
“여러 검술명가를 쓰러뜨려 입지를 확고히 해 왔지만,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하더군. 네가 원하는 건… 오로지 ‘힘’이라고 말이다.”
그건 알베리히의 분신이 내 앞에서 했던 것과 거의 같은 말이었다.
“그건 우리 흑천마교의 사상과 비슷한 것이지.”
“…….”
“먼 옛날… 인류 위에 군림하던 마인들은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천 년 전에 철혈검제가 멸망시킨 마인들을 언급하며, 총대주교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들은 국가나 조직을 거부했다. 무리를 이루는 몬스터들하고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 그들에게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강인함이었다.”
“…….”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억압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투쟁의 세계야말로, 마인들이 생각하던 이상적 세계였다.”
투쟁의 세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이뤄지는 세계야말로, 마인들이 원하는 올바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마인들의 뜻을 이어받은 흑천마교도 그런 세상을 원하고 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너하고 아주 잘 어울리는 세상 아닌가?”
“…….”
“너는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 6대 검술명가도 리히테나워 대공도 너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지.”
총대주교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서 더 강해지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너한테 어울리는 건 철혈검제의 제국이 아니라 흑천마교의 세상이다.”
그렇게 말하며 총대주교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르나스, 네 제자가 되어라.”
“제자?”
“내 깨달음을 너에게 전수해 주마. 너는 에르나스 대주교로서 나를 보좌하도록 해라.”
에르나스 대주교.
소설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는, 신선한 소리였다.
“어째서 당신한테 제자가 필요한 거지?”
“가르침을 널리 알려야 하니까.”
총대주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흑천마교의 사상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은 나 혼자만 있어서는 안 되지.”
“…….”
“나는 딱히 나 혼자서 세계의 정점에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가 자유롭게 투쟁하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길 원하고 있지. 그러니… 본보기가 되는 존재로서 네가 필요한 거다.”
총대주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우리도 에르나스 대주교처럼 강해질 수 있다!’라고 희망을 갖는 걸 원하는 모양이군.”
“그런 것이지. 나 혼자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것보다 그게 더 희망 넘치는 세상이 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총대주교가 웃었다.
“알베리히를 비롯한 대주교들은 솔직히 자격 미달이었다. 자질 자체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지. 그런 놈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
“…….”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어떠냐.”
나를 향해 손을 내민 채, 총대주교가 말했다.
“흑천마교의 일원이 되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는 역할을 해 보지 않겠나?”
“…….”
총대주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노인은 정말로 흑천마교의 세상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회체제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이가 자유롭게 싸우면서 살아가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정말로 올바른 것이라 믿고 있다.
“역시 광신도들의 우두머리답군, 총대주교.”
“뭐라고?”
“미안하지만 그건 너희들, 정확히 말하면 너 같은 극렬 마교도만이 찬동할 소리야.”
흑천마교의 신도는 주로 사회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흑천마교의 가르침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정말로 투쟁의 세계가 찾아오면 난색을 표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투쟁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능력이 없어. 사회체제가 무너지면 먹잇감 내지는 사냥감으로 전락해 버리지.”
“…….”
“원래 인류는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사회체제를 형성하여 그 비호를 받는 거지.”
마인과 엘더 드래곤 등을 물리친 철혈검제가 이 제국을 건국했을 때, 인류는 제국의 국민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건 단지 철혈검제와 부하들의 힘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만드는 체제 밑으로 들어가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대주교, 너희는 대다수의 인류에게 지옥을 선사해 줄 뿐이야. 내 존재에 희망을 느낄 사람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 절망을 느끼고 죽어 갈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뭐라고?”
“절망하여 죽어 가는 자들을 왜 걱정해야 하는 거지? 희망을 갖고 스스로의 힘을 길러 나가는 사람만을 남기는 편이, 인류에게는 더 올바른 구원 아닌가?”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광신자 상대로 대화를 해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래… 소설에서도 아칸델이 설득을 시도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소리지?”
“몰라도 된다, 총대주교.”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자, 총대주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흠, 어쨌든 너는 흑천마교에 귀의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
“그래, 전혀 생각이 없어.”
“초월적 경지에 도달하고 싶지 않은 건가?”
“초월적 경지라…….”
“절정급을 넘어선 궁극의 경지… 흑천급에 도달하려면 내 제자가 되는 편이 가장 빠를 텐데 말이다.”
총대주교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나를 제자로 삼고 싶은 모양이었다.
“알베리히한테서 이 얘기는 못 들었나 보군.”
“무슨 소리지?”
“흑천급은 정답이 아니야, 총대주교.”
“……?”
“너희 흑천마교는 절정급 너머에 있는 경지가 흑천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어.”
알베리히에게 했던 얘기를 또 해 주자, 총대주교가 잠시 침묵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됐어. 어차피 말로 해서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니까.”
이미 나는 총대주교가 말이 안 통하는 존재라는 걸 확인했다.
그러니 굳이 여기서 길게 대화를 이어 갈 필요는 없다.
“분명한 건… 내가 흑천급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야.”
“…….”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반쪽짜리 경지니까.”
그렇게 내뱉은 순간.
차분했던 총대주교의 눈썹이 꿈틀였다.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소리를 하는군,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다시 한번 말해 줄까?”
나는 총대주교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흑천급 따위로는, 이 세계의 정점에 오르는 건 불가능해.”
“흐음…….”
총대주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동안 싸워 왔던 대주교들을 기준으로 흑천급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
“대주교들에겐 흑천급에 도달할 자질이 없었다. 그래서 그 정도 힘밖에 없었던 건데… 그걸 기준으로 생각하다니, 정말 어리석구나.”
총대주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눠 봤자 무의미하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총대주교가 손을 움직였다.
“죽어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 순간.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속도의 공격이 펼쳐졌다.
* * *
흑천급은 두 가지 조건을 달성하는 것으로 도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마나 하트를 해체하고 전신의 혈맥에 마력을 충만시키는 것이다.
마나 하트는 인간이 마력을 잘 제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마나 하트 없이 마력을 운용하던 마인에 비해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마나 하트를 없애고 혈맥에 마력을 가득 채운다면, 마력을 일일이 마나 하트에서 끌어올릴 필요가 없어진다.
두 번째는 마력을 활용해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마력으로 육체 능력을 강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육체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으로, 인간의 근육이나 골격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조합을 통해 완성되는 건… 초월적인 속도다.
마력을 운용하는 것도 육체를 움직이는 것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속도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은 대응할 수 없다.
절정급이 대응할 수 있는 최대 속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이상, 절정급은 흑천급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발렌티아노가 총대주교에게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진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동부 검술의 1인자인 발렌티아노는 어떤 그래듀에이트가 상대여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총대주교의 속도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너도 흑천급의 속도에는 대응할 수 없다.’
총대주교는 에르나스가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총대주교는 에르나스가 어느 정도 경지에 있는지 완벽히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너도… 마나 하트를 해체한 상태이기는 하군.’
초월적 경지에 도달한 총대주교는 에르나스가 마나 하트를 해체한 상태라는 걸 꿰뚫어 봤다.
에르나스는 대량의 마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걸 마나 하트에 저장하지 않고 전신의 혈맥에 상시 전개하고 있는 상태였다.
놀랍게도 흑천마인대법과 거의 같은 방법이었다.
‘어떻게 네가 우리와 같은 방법에 도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하다.’
에르나스는 매우 안정적인 상태였다.
알베리히를 비롯한 대주교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네 육체는 여전히 인간의 것이구나.’
환골탈태를 걸친 육체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체다.
발렌티아노나 안겔라하고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다.
흑천급을 위해 완벽하게 변화된 총대주교의 육체하고는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내 속도에 대응할 수 없다.’
인간의 육체에서 해방된 총대주교.
인간의 육체에 종속된 에르나스.
이 시점에서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다.
움직임을 예상해서 대응한다든가, 그런 것도 통하지 않는다.
총대주교는 에르나스하고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움직여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렇게 생각하면서, 총대주교는 손을 움직였다.
흑천급에 도달한 총대주교는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검을 들고 있지 않아도, 마력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형검(無形劍)이다.’
흑천무형검술(黑天無形劍術).
흑천마교의 모든 것이 집결된 궁극의 검술이 에르나스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인간의 육체로는 절대로 대응할 수 없는, 흑천급의 쾌검(快劍).
이미 몸이 충분히 풀린 상태이기 때문에, 일격에 에르나스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깨달아라, 총대주교.”
짤막한 목소리가 들렸고.
총대주교의 무형검은 허공을 베었다.
에르나스는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
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총대주교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흑색으로 변질된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총대주교의 옷이 검게 물들었다.
“에르나스, 방금…….”
에르나스는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방금 검을 휘둘러서 총대주교의 어깨에 상처를 입힌 것 같았다.
그런데… 총대주교는 대응하지 못했다.
“어떻게… 움직인 거지?”
이건 에르나스가 총대주교보다 빨랐다는 얘기다.
인간의 육체에 종속되어 있을 터인 에르나스가, 인간의 육체에서 해방된 총대주교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도, 총대주교가 아예 인식조차 못할 정도로.
총대주교가 발렌티아노 같은 절정급과는 다른 차원의 속도를 획득했듯이… 에르나스는 총대주교 같은 흑천급과는 다른 차원의 속도를 획득한 것이다.
“어떻게 된 거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말했을 텐데, 총대주교.”
에르나스가 검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말로 해 봤자 이해 못 할 거다. 그러니…….”
그 직후, 에르나스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직접 몸으로 깨닫도록 해라.”
“……!”
총대주교의 몸에서 다시 한번 흑색의 피가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