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철혈의 잔재 (2)
철혈무극검.
그것은 철혈검제가 만든 검술 중 하나다.
대대로 황실에 전해져 내려왔으며, 철혈검제의 후손들만 익힐 수 있다.
철혈무극검의 특징은 실체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신 검사의 혈액을 마력으로 제어하여, 피의 검을 만들어 낸다.
검사의 혈맥에서 마력과 함께 흐르던 피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력 효율은 어떤 검보다 우수하다.
또한 검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고, 검을 들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를 기습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황제는 이 철혈무극검으로 기습한다면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소용없습니다.”
“……!”
파팟!
나를 찌르려던 피의 검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황제가 흠칫하는 사이, 얼어붙은 철혈무극검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네놈……!”
황제에게서 다시금 철혈무극검이 뻗어 나왔다.
카톨레아스 대주교의 천수검기처럼, 여러 가닥으로 피의 검이 날아와 나를 찌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내가 전개한 케르베르트 백화검술의 냉기가 철혈무극검을 모조리 얼려 버렸다.
“크윽……!”
황제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계속해서 공격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이런 짓을 해도 되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윽…….”
황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팔을 뻗어 받쳐 줬다.
“그만하십시오, 폐하.”
“에르나스……!”
숨을 헐떡이면서도, 황제는 나를 향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살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황제는 더 이상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진정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나는 황제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황제는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일은 하지 못했다.
“제 몸을 빼앗으려고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현재 황궁에서 전해지고 있는 비더케렌 환혼술은 불완전한 것이니까요.”
“네놈, 어떻게…….”
“폐하는 흑천마교의 지식을 활용해 비더케렌 환혼술을 보완할 생각이었겠지만, 의미 없었을 겁니다. 결국 실패했겠죠.”
소설 속의 정보를 떠올리며 얘기해 주자,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어째서 네가 그런 걸 알고 있는 거지? 설마 페르펙티오에게서…….”
“폐하.”
나는 황제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폐하는 원래 이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뭐라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킬 분이 아니셨죠. 누구보다 고결하고 위대한… 이 제국의 황제다운 분이셨습니다.”
“…….”
“폐하,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폐하의 행동은 이상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흔들린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철혈기사단에 숨어들어 온 흑천마교의 음모를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게 말이 됩니까?”
“……!”
“폐하는 흑천마교의 술수에 넘어가신 상태입니다. 안 그래도 오랜 병 때문에 심신이 약해져 있었는데, 카톨레아스 대주교가 접근하여 온갖 말로 현혹하니…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소설 묘사대로라면… 황제는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카톨레아스 대주교에게 현혹당했다는 걸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폐하.”
“네놈…….”
내가 생각하기에도 불경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분노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없었다.
황제는 내 지적을 듣고 입술을 강하게 깨물 뿐이었다.
자신이 카톨레아스 대주교의 술수에 넘어가, 냉정한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나는 입을 다문 채 기다렸다.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다, 에르나스.”
“폐하.”
“아무래도 나는…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던 것 같군.”
그렇게 말하고 황제가 길게 탄식했다.
“정말로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
“나 자신에게, 그리고 위대하신 철혈검제에게… 너무나도 부끄러운 짓을 하고 말았다.”
황제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에르나스.”
“…….”
“내가 카톨레아스 대주교에게 현혹당한 건 인정하마.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제국은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
“에르나스, 이건 네 책임도 크다.”
황제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내가 병석에 누워 바깥 상황을 살펴보지 못하는 동안,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가 너무 많이 죽었다.”
“…….”
“영묘에 들어가 있는 페르펙티오 등을 제외하면 이제 이 나라에는 절정급이 열 명도 남지 않았다.”
나, 브랜틀리, 알드바우트, 발렌티아노, 안겔라, 페르디난드, 욜스… 이렇게 일곱 명 정도라 할 수 있다.
다만 페르디난드와 욜스는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 활동 중인 절정급은 사실상 다섯 명이다.
“에르나스, 강력한 무력을 지닌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는 황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궁내부에서 네 행보를 지지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들은 흑천마교의 대주교들을 막아 주는 억지력이기도 했다.”
흑천마교의 대주교들도 절정급에 도달한 실력자들이다.
이미 아르테클라스와 카톨레아스를 쓰러뜨린 상태지만, 아직 더 많은 대주교가 남아 있다.
“그동안 너는 여러 검술명가를 패배시키고 가주들을 참살했다. 그 덕택에… 흑천마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
“이런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내가 다시금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카톨레아스 대주교가 현혹한 탓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황제 스스로 직접 나서서 제국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폐하,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뭐라고……?”
“폐하가 다시 전면에 나서서 제국을 지휘한다고 해 봤자, 흑천마교를 상대하는 건 어렵습니다.”
“……!”
황제가 직접 나서서 각지의 검술명문들에게 동원령을 내린다면,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흑천마교를 토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흑천마교는 폐하의 상태를 주시하면서 시간을 끌 겁니다. 그리고… 폐하가 다시금 한계에 도달하는 때에 맞춰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겠죠.”
“……!”
“이번 카톨레아스 대주교처럼 온갖 음모를 꾸미면서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뒤, 본격적으로 제국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할 겁니다.”
황제의 판단력이 정상이었다면, 이 정도는 내가 설명 안 해 줘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황제는 제대로 된 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지적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저한테 맡기십시오, 폐하.”
“너한테……?”
“네,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황제와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흑천마교 총본산을 토벌하겠습니다. 그러면 폐하도 안심하고 황녀 전하에게 제위를 물려주실 수 있겠죠.”
총본산.
아무도 위치를 알지 못하는 흑천마교의 본거지를 토벌한다는 소리에,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총본산을 토벌하겠다고?”
“네, 흑천마교를 이끄는 총대주교의 목을 베겠습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총본산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제가 찾아낼 수 있습니다.”
“…….”
황제가 할 말을 잃은 채 내 얼굴을 쳐다봤다.
“너는… 대체 뭐냐?”
“저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입니다, 폐하.”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 녀석하고는 다른 의미에서 이해하기 힘들군.”
“폐하,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시점에서 폐하가 뒷일을 맡기기 가장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
“제가 하겠습니다. 제국을 위협하는 모든 자를 쓰러뜨려… 황녀 전하가 통치하는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겠습니다.”
나를 쳐다보는 황제의 눈동자가 떨렸다.
전성기의 황제였다면 다른 대책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는 너무 늙고 병든 몸이었다.
결국 황제는…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황제 폐하.”
나는 황제를 쳐다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권한을 부여해 주십시오.”
흑천마교를 토벌하기 위해.
나한테는 황제가 부여해 주는 권한이 필요했다.
* * *
“황제 폐하!”
문을 열자 비서관이 가장 먼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칼데아스와 폴티아나도 다급히 황제의 상태를 살폈다.
“폐하께서는 잠드셨습니다. 많이 지치신 모양이더군요.”
“……!”
내가 말한 대로, 황제는 잠든 상태였다.
아니, 기절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나와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마력을 거둬들이자마자 정신을 잃어 버렸으니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하겠지.’
억지로 마력을 끌어올린 탓이다.
철혈무극검으로 나를 공격했고, 나하고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평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는데, 마력을 사용해 억지로 몸을 움직였으니…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으음, 확실히 안색이 더 안 좋아지신 것 같군요.”
주치의를 겸하는 비서관이 황제를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비서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십니까?”
“일단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철혈무극검을 쓰기 위해 방출한 피는 이미 다 제거된 상태였다.
여기서 나와 황제 사이에 무력 충돌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에르나스 님, 황제 폐하와 무슨 말씀을……?”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칼데아스의 질문에, 나는 차분한 표정을 유지한 채 대꾸했다.
“특히 흑천마교를 경계하고 계셨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흑천마교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다면 제국의 근간이 흔들릴 거라고 말입니다.”
“화,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저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명령을……?”
“네.”
나는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보여 줬다.
황제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작성한 명령서였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에게 흑천마교 총본산 토벌을 명한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리히테나워 기사단을 구성하여 토벌에 임할 것이며, 토벌이 완수될 때까지 리히테나워 대공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다……!
칼데아스가 명령서에 적힌 문구를 읽고 경탄했다.
“에, 에르나스 님, 이 얘기는……!”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칼데아스 사무관.”
칼데아스가 놀라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황제가 서명한 문서에서 나에게 리히테나워 대공과 동일한 권한을 부여한다고 명언했기 때문이다.
“이, 이건 황제 폐하께서 에르나스 님에게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토벌을 완수할 때까지만 그런 권한을 주겠다는 얘기입니다.”
“아니죠. 이건 토벌을 완수할 때까지는 임시 리히테나워 대공이고, 토벌을 완수한 이후에는 정식 리히테나워 대공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성공리에 토벌을 마무리할 때의 얘기겠습니다만.”
칼데아스가 흥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드디어 여기까지 오셨군요, 에르나스 님.”
“아니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어차피 내 목표는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서 승리하여, 소설 속에서 도달하지 못했던 결말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내 진짜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가 부여해 준 권한을 휘두르면서… 흑천마교를 쓰러뜨려야만 한다.
‘그리고… 황제에게서 얻어 낸 건 리히테나워 대공의 권한만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왼손의 반지를 만졌다.
그러자 유스레흐트로 획득한 능력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현재 ‘능력 재현’으로 획득한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잠정 획득 ==
[케르베스트 백화검술(SS랭크)]
[발트펠트 금강검술(SS랭크)]
[마르테리스 이륜검술(SS랭크)]
[흑천마도연공법(SS랭크)]
[철혈검마심법(SS랭크)]
== 영구 귀속 ==
[아이오니아 신속검술(SS랭크)]
[칼레시우스 창뢰검술(S랭크)]
[리히테나워 경신술(S랭크)]
[아틸리온 마력탐측술(S랭크)]
[동부식 마력연공법(A랭크)]
철혈검마심법(鐵血劍魔心法).
황제가 잠든 이후에 유스레흐트의 ‘능력 재현’으로 획득한… 황실 전용의 마력 연공법.
철혈검제가 만든 궁극의 마력 연공법이 지금 내 안에 깃든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