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철혈의 잔재 (1)
철혈기사단 차석 마르타와 3석 실리온드가 쓰러졌다.
하인리히와 브랜틀리가 내 기대에 부응해 준 것이다.
‘이제 황제와 황녀를 확보하는 것만 남았나.’
우리가 철혈기사단의 수뇌부를 상대하는 동안, 페르디난드 등 교수들이 나머지 철혈기사단을 제압하고 황궁을 장악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카톨레아스가 납치 계획을 밝힌 황녀에게는 이미 안겔라를 보내 둔 상태였다.
철혈기사단의 TOP 3를 쓰러뜨린 이상, 황궁 내부에는 우리를 막을 전력이 없다.
어려움 없이 황궁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황제가 어떤 상태냐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배후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20대 후반의 여성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철혈기사단 4석, 폴티아나 클라리온이었다.
“당신, 사피아스 단장님을……!”
숨을 거둔 카톨레아스의 모습에 폴티아나가 눈을 치켜떴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까?! 역모를 꾸미기 위해 황궁에 들어왔던 겁니까?!”
“…….”
“당신의 아버지인 페르펙티오 님은 6대 검술명가의 가주들 중에서 가장 충성스러우셨던 분! 그 아들인 당신이 어째서……!”
폴티아나가 검기를 전개하며 나한테 달려들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검술은 파르티잔 심판검술의 상위 호환인 플라티노 기사검술.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실력자답게, 완벽에 가까운 동부식 검술이었다.
“윽?!”
하지만, 나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발렌티아노 클래스에서의 수업을 통해 플라티노 기사검술에 익숙한 상태였으니까.
창뢰검강을 펼쳐 받아치자, 그녀는 손에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
그녀는 자신이 검을 놓쳤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검사로서 살아오면서, 전투 중에 검을 떨어뜨린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아카데미를 졸업도 못 한 후배한테 당한 것이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뭐 하고 있지?”
“……!”
내가 던진 차가운 한마디에 그녀가 흠칫 놀랐다.
“철혈기사단 4석으로서 반역자를 처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에, 에르나스…….”
“떨어뜨린 검을 주워 들고 다시 덤벼라, 폴티아나.”
나는 사피아스의 검을 든 채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마지막까지, 철혈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해라.”
“으윽……!”
폴티아나가 검을 집어 들고 다시 공격을 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창뢰검강으로 날려 버렸다.
“에르나스……!”
그래도 폴티아나는 계속 나한테 달려들었다.
나는 창뢰신기로 폴티아나의 주먹을 피한 뒤, 그 목덜미에 칼을 들이댔다.
“역시 당신은 카톨레아스 대주교에게 세뇌당하지 않은 모양이군.”
“카톨레아스 대주교……?”
폴티아나가 흠칫 놀라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흑천마교의 대주교를 말하는 겁니까? 왜 갑자기…….”
나는 대꾸하지 않고 검을 거둬들였다.
방금, 폴티아나는 투철한 사명감에 휩싸인 채 결사의 각오로 달려들었다.
다른 기사들처럼 카톨레아스의 꼬드김에 넘어가 권력을 탐하게 된 상태였다면… 목숨이 아까워서 주춤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카톨레아스는 폴티아나는 그냥 내버려 뒀지. 여기서도 소설과 같은 건가.’
올레아나 클라리온의 딸인 폴티아나는 올곧은 성격을 지닌 정의로운 기사다.
나이도 젊기 때문에 아직 이상주의적인 측면도 있었다.
아무리 꼬드겨 봤자 음모에 가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카톨레아스는 폴티아나한테는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걸 봐라, 폴티아나.”
“무슨 짓을……!”
내가 시체의 얼굴을 칼로 그어 버리자 폴티아나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 직후 입으로 손을 가리며 숨을 삼켰다.
“사피아스 단장님의 얼굴이……!”
사피아스의 얼굴 가죽이 찢어지면서, 그 아래에 있던 진짜 카톨레아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특징 없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흑천마교에는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으로 감쪽같이 변장할 수 있는 기술이 있지.”
“그, 그렇다면…….”
“사피아스 단장은 이미 예전에 살해당했어. 그동안 너희들을 지휘했던 건 사피아스 단장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카톨레아스 대주교였지.”
“마,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런……!”
폴티아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주름살 많은 노인이 사피아스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폴티아나, 철혈기사단은 이미 카톨레아스 대주교에게 장악당한 상태였다. 차석인 마르타와 3석인 실리온드도 마찬가지였지.”
“마, 마르타 경과 실리온드 경이?!”
“많은 기사가 카톨레아스 대주교의 꼬드김에 넘어가 아카데미와 검술명가들을 짓밟고 권력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어. 혹시 짚이는 구석이 없나?”
“아……!”
내 말을 듣고, 폴티아나가 숨을 삼켰다.
기억을 되새겨 보면 분명 짚이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폴티아나, 지금은 비상사태다.”
“에, 에르나스…….”
“단장부터 3석까지 다 쓰러진 이상, 철혈기사단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건 당신이지. 그렇기에 당신이 황궁 수호의 책임자라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폴티아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이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아……!”
“그래, 황제 폐하를 지켜야 한다.”
황제 폐하.
철혈기사단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 제국의 군주.
그는 지금 병석에 누운 채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있는 상태다.
“황제 폐하에게 간다, 폴티아나.”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는 황제가 있는 제1구역으로 향하기로 했다.
* * *
“황제 폐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거니, 검은 당신에게 맡기지.”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폴티아나에게 검을 맡겼다.
어차피 더 이상 내가 검을 들고 싸워야 할 만한 적도 없었다.
“에르나스, 저도 검을 들고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는…….”
“지금은 당신이 임시 단장이야. 사피아스 단장을 대신하여 당신이 검을 들고 황제 폐하를 지켜야지.”
“아…….”
내 논리에 납득한 폴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폴티아나는 아직도 나를 100% 믿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폴티아나의 실력으로는 내가 제1구역에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없는 상황이니… 그냥 동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 에르나스 님!”
“칼데아스 사무관.”
제2구역에 발을 들이자, 낯익은 얼굴들과 마주쳤다.
칼데아스 사무관을 비롯한 궁내부 관료들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철혈기사단과 아카데미가……!”
“일단 이것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줬다.
천으로 감싼… 카톨레아스 대주교의 머리였다.
“이, 이것은……?!”
“사피아스 단장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흑천마교의 카톨레아스 대주교입니다. 철혈기사단은 흑천마교에게 장악당한 상태였습니다.”
“……!”
칼데아스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카톨레아스의 얼굴에는 아직 사피아스의 얼굴 가죽이 붙어 있는 상태다.
이건 어떤 말보다 설득력 있는 증거였다.
“칼데아스 사무관, 황제 폐하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놈들이 황제 폐하도 표적으로 삼았을지도 모릅니다.”
“아, 알겠습니다!”
칼데아스하고는 이미 신뢰 관계가 있는 상태라, 폴티아나를 설득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
궁내부의 중진 칼데아스와 철혈기사단 4석 폴티아나를 앞세운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 없이 제1구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비상사태라고 해도, 나 혼자서 제1구역으로 들어가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칼데아스와 폴티아나의 안내를 받으며 제1구역 안을 걸었다.
미로 같은 복도를 한참 걸어…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 평범한 문 앞에 도달했다.
“…….”
칼데아스가 문 앞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법적 보안장치에 암호를 입력한 것이다.
“들어오십시오.”
스륵.
문이 열리며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방 안은 황궁의 다른 공간과 마찬가지로 살풍경했다.
정중앙에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옆을 비서관과 시녀들이 지키고 있었다.
‘저 노인이…….’
침대 위에는 앙상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을 거둬 버릴 것처럼 미약한 숨소리를 내고 있는 저 노인이 바로… 이 제국의 황제였다.
“…….”
저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서는 대량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마력이 여전히 황제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저 마력이 없었다면… 황제는 이미 진작 숨을 거뒀겠지.’
역대 황제는 전부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었다.
황위에 오르는 시점에는 절정급에 도달하지 못했던 황제도, 재위 중에 반드시 절정급에 도달했다.
지금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황제도, 전성기 때는 6대 검술명가를 압도하는 최강의 그래듀에이트로 이름을 날렸다.
“황제 폐하, 비상사태이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직접 말씀드립니다.”
칼데아스가 무릎을 꿇은 채 황제에게 말했다.
“흑천마교가 철혈기사단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황궁을 활보하던 사피아스 단장도… 흑천마교의 카톨레아스 대주교가 변장한 것이었습니다.”
“…….”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황제가 잠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대답할 기력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나서서 카톨레아스 대주교를 처단했습니다. 곧 황궁의 혼란도 수습될 것입니다.”
“…….”
“그래도 혹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저희가 황제 폐하 곁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니…….”
그때였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누워 있던 황제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폐하……?”
황제의 눈동자도 나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칼데아스가 흠칫 놀랐다.
“폐하께서는… 에르나스 님과의 독대(獨對)를 원하고 계십니다.”
침대 옆에 있던 비서관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칼데아스도 폴티아나도 눈을 크게 떴다.
“독대라고 말했나?”
“네, 에르나스 님만 남고 전부 바깥으로 나가는 걸 원하고 계십니다.”
“크흠…….”
항상 황제 곁을 지키던 비서관의 말이다.
칼데아스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에르나스 님, 이건…….”
“폐하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듣고, 칼데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폴티아나도 입술을 깨물었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방에서 나갔다.
“…….”
비서관과 시녀들도 퇴실하면서, 방에는 나와 황제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황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황제 폐하.”
누워 있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혼탁한 눈동자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이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더케렌 환혼술은 불가능합니다.”
“…….”
“카톨레아스 대주교는 사피아스 단장으로 위장하여 황제 폐하를 속였습니다. 앞으로 황궁에서 저지를 온갖 만행의 허가를 얻어 내기 위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반응이 있었다.
“에르나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던 황제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그 몸에서… 흑색의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멍청이로 생각하느냐?”
휘익!
몸을 일으킨 황제가 앙상한 왼팔을 치켜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육체의 힘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마나 하트에 남아 있는 마력의 힘으로 움직인 것이다.
“비더케렌 환혼술은 실제로 존재한다, 에르나스.”
“…….”
“내가 흑천마교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나? 놈이 사피아스 본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놈을 이용하고 있던 거다.”
황제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니, 피눈물뿐만이 아니었다.
코, 입, 귀… 심지어 전신의 모공에서조차 출혈이 있었다.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채, 황제가 내 멱살을 붙잡고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놈의 협조를 얻어 ‘새 육체’를 확보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네놈이 방해해서 망쳐 놨군.”
“…….”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그 순간.
황제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황제의 오른손에 집결되었다.
“내가 스스로 ‘새 육체’를 확보하는 수밖에.”
철혈검제의 후손들에게만 전해지는 황실 전용 검술.
철혈무극검(鐵血無極劍)이 내 목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