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일인전승의 검술 (3)
‘이게 대체 뭐냐?!’
갈레시온 차석 장로는 혼란에 휩싸였다.
잘려 나간 손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은, 에르나스가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사용한 게 맞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에르나스가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사용하는 거지?!’
현재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계승한 건 아카데미의 페르디난드 교수이며, 에르나스는 페르디난드 클래스 소속이다.
그러니 에르나스가 페르디난드에게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전수받았다고 생각해야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페르디난드는 학생 교육에 관심이 없는 교수로 유명하다! 에르나스한테도 검술을 가르쳐 준 적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물론, 페르디난드가 비밀리에 에르나스에게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전수해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에르나스는 왜 지금까지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쓰지 않았을까.
‘다른 검술과는 달리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은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에르나스가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사용했다면 우리가 모를 리 없다!’
지금까지 에르나스는 혈검장로회의 암살자들을 여러 번 격퇴해 왔다.
하지만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의 흔적이 남아 있던 적은 없었다.
‘요 며칠 사이 갑자기 터득했을 리도 없고……!’
슈라이에르 가문이 항복한 뒤, 에르나스는 페르디난드와 합류했다.
그 이후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배웠다고 해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런 고급 검술을 터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예전부터 터득한 상태였다고 해도, 그걸 왜 굳이 나를 상대로 사용하는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의 첫 번째 제물이 된 것일까.
너무 당혹스러워서 갈레시온은 억울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으윽……!”
그래도, 여기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갈레시온은 호신기를 최대한 두껍게 전개하면서 왼쪽 손으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어떻게든 반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에르나스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
어느새 에르나스는 왼손으로 새로운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살바토레 아틸리온을 쓰러뜨린 뒤 손에 넣은 진철검인 것 같았다.
에르나스는 왼손의 진철검으로 갈레시온의 단검을 쳐 내면서, 오른손의 진은검으로 갈레시온의 가슴을 찔렀다.
“아…….”
가슴을 파고드는 서늘한 감각.
얼음 같은 칼날이 심장을 관통하는 걸 느끼며, 갈레시온은 피를 토했다.
* * *
털썩.
갈레시온이 쓰러졌다.
나는 칼날에 전개했던 냉기를 거둬들인 뒤, 조금 위치를 이동했다.
그 자리에 있다간 갈레시온이 방출한 독을 들이마시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얼리긴 했는데, 금방 녹아내릴 테니까.’
실제로 케르베르트 백화검술을 사용해 보면서 깨달은 거지만… 지금 내 힘으로는 장시간 냉기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갈레시온하고의 싸움에 걸린 시간은 고작 몇 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몸이 상당히 힘들었다.
‘역시 내 마력으로는 어려운 건가.’
케르베르트 백화검술의 냉기는 마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냉기를 넓게 퍼뜨리려면 그만큼 많은 마력이 필요하다.
칼날 하나만 덮으면 끝인 검기나 검강과는 달리, 넓은 공간을 커버해야 하기 때문에 대량의 마력을 써야 하는 것이다.
페르디난드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어서 충분한 마력이 있겠지만, 나는 아직 그래듀에이트 상급이라 마력이 부족하다.
‘칼레온의 이그니아스 염옥검술도, 제대로 불을 뿜을 수 있으려면 절정급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었지.’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은 염검술(炎劍術)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칼레온이 헨리 랭커스터와 싸우면서 엄청난 화염을 뿜어 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들인 루퍼스는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을 펼쳐도 그냥 불타오르는 검기를 만드는 수준일 것이다.
이것도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냐 아니냐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나도 냉기를 주위에 전개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아예 사람을 얼려 버릴 정도의 냉기를 만들 수는 없어.’
방금 전에도 나는 독 안개를 얼렸을 뿐이다.
주위의 나무들도 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 부위만 얼어붙은 거였다.
‘냉기를 칼날에 집중해 검기로 만든 뒤, 상대방의 검기를 얼려서 깨부수는 것 정도는 가능한데… 현시점에서는 실전에 활용하기 애매하군.’
상대방의 검기를 파괴하는 건 발트펠트 패검술이나 창뢰검강, 파천검강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굳이 케르베르트 백화검술을 활용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에 도달하는 게 우선인가.’
아카데미에서 암리타를 완성해서 복용하면 마력은 충분할 것이다.
문제는 마력만 많다고 절정급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건데…….
‘그때 가서 직접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
소설에서 주인공 아칸델이 절정급에 도달하는 과정을 묘사하긴 했지만, 그걸 나한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과정을 거쳐 절정급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계에 온 지 1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절정급에 도전하게 되는 건가.’
이 세계에서 절정급에 도달한 검사들은 대부분 수십 년 동안 검을 수련했던 사람들이다.
빠른 축에 속하는 욜스나 브랜틀리도 절정급에 도달할 때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나는 10배 이상 빠른 속도로 절정급에 근접한 것이다.
‘게다가 소설 주인공보다 더 빠르지.’
소설에서 아칸델이 절정급에 도달하는 건 더 시간이 흐른 뒤다.
여러 가지 요소를 잘 챙기면서 성장하다 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진짜 천재’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그래도 여기서 주춤할 수는 없어.’
이 세계는 본래의 주인공인 아칸델이 사라진 세계다.
나는 아칸델을 대신하는 검술 천재가 되어 싸워 나가야 한다.
그러니 여기서 페이스 조절을 할 필요는 없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높은 경지로 도달해야 한다.
* * *
대륙 동부.
많은 명문가가 몰려 있는, 귀족 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는 지역.
그곳에서는 동부를 대표하는 검술명가 중 하나인 이그니아스 가문의 군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문 후작 가문인 베르디에 가문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가주님.”
선두에서 말을 타고 나아가고 있던 칼레온 이그니아스에게, 말쑥한 외모의 젊은 검사가 다가왔다.
“남부에서 전해진 소식입니다.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를 쓰러뜨린 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맞다고 합니다.”
“정말인가?”
“네, 확실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도 않고 혼자서 제압했다고 합니다.”
“…….”
칼레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헛소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던 건가.
“어이가 없군. 그 녀석이 클라우비체를 쓰러뜨리다니…….”
“동감입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애송이 아닙니까.”
“확실히 다른 놈들보다 재능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을 혼자 힘으로 쓰러뜨릴 수준은 아니었을 텐데.”
“미하일 발트펠트를 쓰러뜨렸을 때는 욜스 칼레시우스와 협공했다고 했죠.”
“그래, 그 녀석은 결코 절정급을 단독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짧은 기간 동안 더 크게 성장한 걸까.
이건 이거대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에르나스는 내가 몇 년에 걸쳐서 성장한 걸… 몇 달 만에 속성으로 성장하고 있는 건가?”
“그건… 비현실적인 얘기 아닙니까?”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칼레온은 에르나스를 직접 가르쳐 본 적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카데미에 있을 때 에르나스를 따로 불러서 실력을 확인해 볼 걸 그랬다.
가까운 곳에서 살펴보고 직접 검을 부딪쳐 보면 그 실체를 보다 확실히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처음에 에르나스가 루퍼스의 좋은 경쟁자가 되어 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루퍼스 도련님의…….”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이가 커지더군. 무지막지하게 말이다.”
칼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면 칼레온도 이렇게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루퍼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에르나스를 꺾지 못한다는 게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루퍼스보다 에르나스의 재능이 훨씬 뛰어나다.”
“가주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에르나스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루퍼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만들고, 이그니아스 가문이 모든 명문가들의 정점에 올라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해 칼레온은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힘으로 다른 가문들을 제압한 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도 쓰러뜨린다.”
“…….”
“그런 상태가 되면, 궁내부도 인정하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칼레온은 미소 지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이야말로 황녀 전하를 보필하기에 걸맞은… 진정한 검술명가라고 말이다.”
“네, 궁내부에서도 루퍼스 도련님을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삼을 수밖에 없겠죠.”
“그렇지.”
루퍼스도 나이에 비하면 실력이 뛰어나다.
에르나스가 너무 뛰어날 뿐이지, 루퍼스에게 자격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루퍼스도 더 성장해야겠지.”
“네, 맞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베르디에 가문을 압박하고 있는 거고 말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그니아스 가문의 군세는 베르디에 가문의 영지로 진입했다.
하지만 넓은 평야 위에 베르디에 가문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력의 규모 그리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단순히 길을 막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가주, 칼레온 이그니아스 공작이다! 베르디에 후작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칼레온이 목소리를 높이자, 베르디에 측의 진영에서 갑옷을 입은 인물이 앞으로 나왔다.
“가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부하들을 대기시키고 혼자서 영지로 들어오시오! 그렇게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가주님을 만나러 갈 필요가 없지 않소!”
그는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이그니아스 공작! 당신은 우리 가문을 강제로 복속시키려 하고 있을 뿐이오! 그리고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져 오는 가보인 용골(龍骨)을 빼앗아 갈 생각이겠지!”
용골은 드래곤의 뼈, 특히 흉골을 가리키는 말이다.
적절한 처리를 하면 막대한 마력을 얻을 수 있는 영약이 된다.
특히 베르디에 가문의 가보는 고대룡 ‘엘더 드래곤’의 뼈여서,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실력 부족인 아들에게 용골이라도 먹여 보려는 속셈 아니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한테 상대가 안 되니까!”
그 말을 듣고, 베르디에 가문의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이그니아스 진영에서는 분노가 폭발했다.
“저런 건방진……!”
“감히……!”
다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분위기였지만, 칼레온은 손을 치켜들어 진정시켰다.
“소란 피우지 마라.”
“가주님, 하지만……!”
“저 발언은 도련님과 가주님을 동시에 모욕하는 것입니다!”
“알고 있다.”
칼레온은 그렇게 대꾸하면서 홀로 전진했다.
“너희들의 속셈은 잘 알고 있다.”
“뭣?”
“나하고 말싸움이나 하면서 시간을 끌 생각이겠지. 바스티안 가문의 지원군이 와 주길 기다리면서.”
“……!”
바스티안 가문은 동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로, 후계자인 세리느 바스티안은 현재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다.
지난번 6검 회의에서 에르나스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 줬고, 현재도 동부에서 이그니아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암약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스티안 가문의 병력이 나타나면, 우리가 그냥 물러설 거라 생각했나?”
“이, 이그니아스 공작…….”
“나도 쓸데없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 검을 부딪치는 일 없이 베르디에 후작을 설득하고 싶었지. 하지만 남부에서 클라우비체가 쓰러진 이상… 이제는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머, 멈추시오! 더 이상 다가오시면…….”
“나 혼자서 영지에 들어가는 거면 상관없다는 게 그쪽 입장 아니었나?”
베르디에 가문의 병력이 다급히 검을 뽑았다.
하지만, 칼레온은 그들의 검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일찌감치 고개를 숙이지 않은 너희들의 실수다, 베르디에 가문.”
“……!”
쿠쿠쿵!
활활 타오르는 화염이 칼레온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화염은 베르디에 가문의 병사들을 덮쳤다. 호신기조차 불태우는 마력의 불꽃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 이그니아스 공작! 이런 짓을 하다니 제정신이오?! 동부의 여러 명문가가 당신을 규탄할 것이오!”
“시끄럽게 떠들어 대 봤자, 그들에게 우리 이그니아스 가문을 막을 힘은 없다.”
“아, 아카데미가 가만히 있을 것 같소?! 북부의 발트펠트 가문이나 남부의 슈라이에르 가문을 손봐 준 것처럼, 당신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오!”
베르디에 가문의 지휘관이 목소리를 높이며 칼레온을 규탄했다.
“특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인 그 사람이라면, 반드시 동부에 나타나 당신을 저지할 것이오!”
“그렇겠지. 하지만…….”
콰앙!
타오르는 검으로 지휘관의 두개골을 분쇄하며, 칼레온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라고 해도… 내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에 대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레온의 말에 호응하듯, 불꽃의 검이 더욱 거칠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