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일인전승의 검술 (2)
경신술을 사용해, 야영지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이 정도 위치라면 페르디난드 클래스의 교수들한테 들키지 않겠군.’
적당한 곳에서 발을 멈추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배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 눈치챈 모양이군.”
중후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체격도 건장해서, 암살자라기보다는 평범한 검사처럼 보였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자신감이 엿보였다.
“만나서 반갑군,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나는…….”
“혈검장로회의 차석 장로, 갈레시온이겠지.”
“…….”
자신감 넘치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동안 혈검장로회의 장로급 암살자를 여러 명 처치해 왔다.
혈검장로회에서도 더 이상 잔챙이들을 보낼 수는 없을 테니, 최상위권의 실력자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중에서 저런 체형을 지닌 남자는, 소설 속 묘사를 생각했을 때 갈레시온 차석 장로밖에 없다.
“크흠…….”
갈레시온이 신음 소리를 냈다.
“혹시 네 아버지한테서 들은 건가?”
“아버지?”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 말이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가주,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
그는 혈검장로회에서도 경계하는 인물이다.
“그런 거라면…….”
“내 아버지하고는 관계없다, 갈레시온.”
나는 갈레시온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내가 어떻게 네 정체를 알아냈는지,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
갈레시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소문대로 건방진 녀석이군.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와 살바토레 아틸리온을 쓰러뜨리고 더 자신감이 붙은 건가.”
“그쪽이야말로.”
나는 갈레시온에게 쏘아붙였다.
“혼자서 내 앞에 나타나다니, 자신감이 넘치는군.”
“흥…….”
갈레시온이 코웃음을 쳤다.
“네 실력은 이미 파악한 상태다. 혈검장로회의 장로급 암살자들을 연달아 해치우고,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한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와 살바토레 아틸리온까지 쓰러뜨렸지.”
“…….”
“나는 다른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그래듀에이트 상급이다. 절정급까지 쓰러뜨리는 너하고 정면 대결 해 봤자, 상대가 안 되겠지.”
그렇게 순순히 실력 차를 인정한 뒤, 갈레시온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가 너하고 정면대결을 할 필요는 없겠지.”
“…….”
“주위를 둘러봐라.”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이 퍼져 있었다.
“독술(毒術)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
독술.
혈검장로회의 암살술 중 하나다.
이름대로 독을 사용해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다.
물론, 평범하게 독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마력을 활용한다.
“이 독무(毒霧)는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갈레시온이 손을 움직이자, 안개가 꿈틀거리면서 여러 가지 형태를 취했다.
원리는 편검기와 비슷할 것이다.
마력으로 만든 ‘손잡이’를 잡고, 안개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재주로군.”
용오름처럼 하늘로 솟구치는 독 안개를 보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걸까.
오랜 세월 피땀 흘려 노력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내가 이걸 너에게 날리면, 너는 곧바로 피를 토하며 죽을 거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
“다만… 이걸로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생각은 없다.”
안개로 나를 포위하면서, 갈레시온이 말했다.
“너를 죽일 생각이 있었다면, 아까 야영지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을 때 죽였겠지.”
“그렇겠지.”
갈레시온은 독술을 사용하는 암살자다.
나를 암살할 생각이었다면, 몰래 접근하여 야영지로 독을 흘려 보내 독살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갈레시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야영지에서 이탈해 혼자 움직이자, 조용히 따라와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자신의 능력을 나한테 보여 주기까지 했다.
“에르나스, 우리는 클라우비체에게 너를 암살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미 보수는 받았기 때문에, 클라우비체가 사망했다고 해도 의뢰는 유효하다.”
“그래, 너희는 나를 죽여야만 하지.”
이건 혈검장로회 창설 이래 계속 내려온 원칙이다.
장로들이라 해도 이 원칙을 어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의뢰를 무효화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
“네가 클라우비체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 준다면, 우리는 네 암살을 포기하겠다.”
갈레시온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네 아군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아군이라.”
“나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에르나스.”
나에게 손을 내민 채, 갈레시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앞으로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권력을 손에 넣을 거다.”
“…….”
“그렇게 되면 온갖 암투에 휘말리게 되겠지. 지금이야 정면에서 상대를 꺾는 것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난세가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는 없다.
“그럴 때를 대비해, 궂은일을 해 주는 심복들이 필요하다.”
“혈검장로회가 그 역할을 하겠다는 건가?”
“혈검장로회만이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을 거다.”
“하긴, 그런 역할은 혈검장로회만큼 우수한 곳이 없겠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 온 암살자 단체다.
내가 부탁하면 아무런 증거 없이 비밀리에 정적(政敵)을 제거해 줄 것이다.
“에르나스, 우리 혈검장로회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변화라…….”
“너는 제국의 양지를 지배해라. 우리는 제국의 음지를 맡겠다.”
“…….”
“네가 긍정적인 대답을 해 준다면, 우리는 너를 노리는 걸 중단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총본산으로 데려갈 것이다.”
총본산이란 혈검장로회의 본거지를 의미한다.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혈검장로회의 우두머리와 협상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소리다.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꼭 말해 줘야 하나?”
그 순간, 나를 포위하고 있던 독 안개가 꿈틀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켜 독살할 것 같았다.
“협박을 하는군.”
“이해해 줬으면 한다, 에르나스. 이것도 네가 너무 강대한 힘을 갖고 있는 탓이다.”
갈레시온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려 주겠다. 그러니…….”
“이봐, 갈레시온.”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클라우비체가 몰락하자마자 나한테 붙으려 하는 건, 너무 추하지 않나?”
“뭐라고?”
“지금 나한테 말한 것들, 원래는 클라우비체와 함께 하려고 했던 것일 텐데.”
“…….”
원래 혈검장로회는 클라우비체를 도운 뒤 나중에 지분을 차지할 계획이었다.
클라우비체가 제국의 양지를 지배하면 혈검장로회가 음지를 차지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비체가 나한테 쓰러지면서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너희 입장에서는 클라우비체가 최선이었겠지. 칼레온 이그니아스나 브랜틀리 아그리파는 너희 같은 암살자 집단하고 손을 잡지 않을 테니까.”
“…….”
“하지만 클라우비체는 죽어 버렸고, 너희는 누구한테 붙어야 할지 다시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 그 결과… 나한테 붙는 게 가장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고.”
그동안 나와 싸우면서 혈검장로회도 느꼈을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에게 붙는 것이 가장 승산이 높다고 말이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에르나스.”
갈레시온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너한테 나쁜 얘기는 아니지 않나? 혈검장로회의 도움을 받으면 앞으로 너한테 큰 힘이 될 거다. 특히…….”
“미안하지만, 굳이 필요 없다.”
“뭐라고?”
“필요 없단 말이다, 갈레시온.”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희들 같은 놈하고 손을 잡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내 약점이 된다. 내가 왜 그런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지?”
“에르나스…….”
“너희들은 수틀리면 언제든지 나한테서 등을 돌릴 수 있는 놈들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궂은일을 맡아 줄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굳이 혈검장로회가 아니어도 된다.
나중에 클로에한테 부탁하면 알아서 준비해 줄 것이다.
“에르나스, 다시 생각해 봐라. 우리들 협력을 얻으면 이그니아스 가문이나 아그리파 가문과의 싸움에서도 유리해질 거다.”
“그거야말로 더더욱 너희들 도움은 필요 없지. 내 힘만으로 충분하니까.”
“큭…….”
갈레시온이 복면 아래에서 입술을 깨무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지만 그건 지나친 오만이다.”
“그건 네가 판단할 게 아니다, 갈레시온.”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순간.
갈레시온에게서 더 많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확인하겠다.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되겠나?”
“끈질기군, 갈레시온.”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진은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갈레시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갈레시온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독 안개를 조종해, 나를 집어삼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
안개는 나를 집어삼키지 못했다.
나를 포위하고 덮치려 하던 형태 그대로, 허공에서 정지한 상태였다.
“이게 어떻게 된… 아!”
갈레시온이 숨을 삼켰다.
방금 갈레시온이 몸에서 독 안개를 방출했듯이, 나에게서 무언가 방출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에르나스, 그 검에서 방출되고 있는 하얀 기운은 뭐냐!”
나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고, 갈레시온이 소리쳤다.
“어째서… 검에서 냉기가 발생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렇다.
지금 내가 든 검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냉기가 아니라 마력적인 냉기다.
그렇기에 마력과 결합되어 있는 독 안개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대체 무슨 수로 그런……!”
“실망스럽군, 갈레시온.”
나는 차갑게 내뱉었다.
“혈검장로회는 세계에서 가장 정보력이 뛰어난 조직 아니었나? 이 검술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
갈레시온이 흠칫 놀랐다.
내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은 모양이다.
“설마… 케르베스트 백화검술?!”
“그래, 갈레시온 차석 장로.”
순순히 인정하면서, 나는 진은검을 치켜들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 하나뿐인… 빙검술(氷劍術)이다.”
“……!”
파파파팟!
본격적으로 냉기가 발산되면서, 주위가 얼어붙었다.
울창했던 나무들조차 냉기에 뒤덮여, 마치 하얀 꽃이 내려앉은 모습이 되었다.
“윽……!”
갈레시온이 다급히 독 안개를 더 많이 방출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안개는 냉기에 의해 얼어붙어 더 이상 퍼지지 못 했다.
“대체 언제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터득한 거냐?! 지금까지 그런 모습은 전혀……!”
당황하면서 갈레시온이 단검을 뽑았다.
암살검술로 대항하기 위해 검기를 전개했지만, 칼날 위의 검기조차 얼어붙었다.
“……!”
검기가 얼어붙었다고 해서, 견고한 검강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접근하여 검으로 후려치자, 얼어붙은 검기가 산산이 깨져 나가면서 단검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갈레시온은 다급히 예비용 단검을 뽑으려 했지만, 내 움직임이 더 빨랐다.
“크윽……!”
갈레시온의 오른쪽 손목이 잘려 나갔다.
절단되는 것과 동시에 얼어붙었기 때문에, 손목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빙검술,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