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클라우비체의 검 (5)
문득, 마지막으로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클라우비체가 페르펙티오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15년 전의 6검 회의였다.
그때 클라우비체는 다른 검술명가의 가주들을 이간질해 6검 회의를 파행시키려 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페르펙티오였다.
클라우비체는 어떻게든 페르펙티오를 꼬드기려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면서, 클라우비체는 섬뜩함을 느꼈다.
페르펙티오의 눈동자는 광기에 가까운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후 클라우비체는 되도록 페르펙티오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어떤 모략도 통하지 않을 상대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이번에 클라우비체가 자신 있게 궐기할 수 있었던 것도… 페르펙티오가 철혈검제의 영묘에 틀어박혀 바깥일에 관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 아들에게 당할 줄이야…….’
페르펙티오의 아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6검 회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설마 에르나스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6검 회의가 끝난 뒤 직접 나서서 죽여 버렸을 것이다.
‘아니, 소용없었을까.’
직접 나서서 죽이려 해 봤자… 반격당해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버지인 페르펙티오와 마찬가지로, 충돌해서는 안 되는 놈이었다.
에르나스와 적대하게 된 이상, 이 결말은 확정적이었…….
“아버지……!”
추락하는 클라우비체의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위쪽을 확인해 보니, 베리스리제가 절박한 표정으로 팔을 뻗고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제가 지금……!”
“…….”
그러고 보니,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베리스리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카데미와 화해하는 결말이다.
아카데미와 동맹을 맺고 에르나스를 지원해 준다면, 훗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차기 황제 밑에서 권력을…….
‘아니,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지.’
아카데미와 화해한다는 건,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걸 인정하고 그 밑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런 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 승승장구하는 에르나스를 보면서 굽신굽신하고 있는 건… 절대로 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클라우비체는 베리스리제의 손을 뿌리쳤다.
베리스리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어째서……!”
“흥…….”
여기서 베리스리제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는다고 해 봤자, 클라우비체를 기다리고 있는 건 굴욕적인 패전 처리다.
아카데미에 굴복한 슈라이에르 가문은 발트펠트 가문과 마찬가지로 팔다리가 잘려 무력화될 테고, 클라우비체는 두 번 다시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모든 걸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에르나스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
그런 건 절대로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슈라이에르 가문 따위는… 너한테 넘겨주마, 베리스리제.”
“……!”
숨을 삼키는 외동딸의 얼굴을 영혼에 생기면서.
클라우비체는 무너지는 성벽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 * *
슈라이에르 본성이 함락되었다.
클라우비체가 쓰러진 이상, 아카데미를 막는 건 더 이상 불가능했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려던 검사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 검을 내려놓았다.
베리스리제가 나서서 설득한 덕분이었다.
“그러면… 베리스리제가 임시 가주가 되어서 슈라이에르 측의 무장을 해제시킨 거군요.”
“그래, 덕분에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지.”
나는 오랜만에 세리느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세리느는 현재 욜스 클래스의 수련생이다. 욜스를 따라 전투에 참가하여 상당한 공적을 올렸다고 한다.
이번 공성전에서는 후방에서 별동대의 공격을 잘 막아 냈다는 것 같았다.
“베리스리제도 많이 상심했겠네요. 아버지를 잃었으니.”
“그렇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도 아니고,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었으니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클라우비체가 베리스리제의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래, 맞아.”
“왜 그런 짓을…….”
“패배자로서 살아가는 게 싫었던 거겠지. 뒷일은… 베리스리제에게 떠넘기면 되는 거고.”
클라우비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다.
굴욕을 견디며 가문을 재건하느니,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너무한 얘기네요.”
세리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베리스리제를 동정할 수밖에 없네요.”
“베리스리제 앞에서는 그런 기색 보이지 마. 화만 낼 테니까.”
“알고 있어요.”
세리느는 그동안 베리스리제하고 룸메이트 생활을 했다.
그러니 나름 베리스리제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에르나스, 베리스리제는 일단 아카데미에게 최대한 협조해 주기로 한 거죠?”
“그래, 아카데미의 요구를 거의 다 받아들이겠다고 했어.”
“하지만… 아카데미에 돌아오는 일은 없겠네요.”
“그렇겠지.”
베리스리제는 앞으로 가주가 되어 슈라이에르 가문을 재건해야 한다.
아카데미에서 학생 생활을 할 여유는 없다.
“아쉽네요. 그동안 베리스리제한테 많이 자극받았었는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세리느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을 때.
옆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베리스리제……!”
베리스리제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세리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 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없으면 너희들 입장에서는 더 좋지. 안 그래?”
“베리스리제, 저는…….”
“나 없이 잘해 보라고. 이제 너희들 경쟁자는 하인리히 정도일 테니까.”
“…….”
베리스리제 말대로, 이제 아카데미에서 우리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건 하인리히밖에 없다.
레스터와 고르트는 이미 탈락했고, 베리스리제는 슈라이에르 가문을 이끌어야 하고, 루퍼스는 아버지를 따라 동부로 갔으니까.
“에르나스, 하인리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하인리히를 지지하는 학생들도 꽤 많이 남아 있으니,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
“걱정해 줘서 고맙군, 베리스리제.”
“따, 딱히 걱정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야!”
베리스리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화를 냈다.
그 모습을 보며 세리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베리스리제는 에르나스하고 예전보다 사이가 좋아진 것 같네요.”
“사, 사이가 좋아지긴 무슨!”
세리느의 지적에 베리스리제가 얼굴을 붉혔다.
“나는 이 녀석하고 조금도 사이좋게 지낼 생각 없어!”
“흐음…….”
“왜 그렇게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로 보는 건데! 에르나스! 너도 뭐라고 한마디 해 줘!”
베리스리제가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솔직히 나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어쨌든, 베리스리제.”
세리느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과도 위로도 하지 않을게요.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는 분명히 저희들의 적이었으니까.”
“세리느, 너…….”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무엇보다 저는…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세리느의 발언에 베리스리제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베리스리제도 속으로는 세리느에게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베리스리제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여학생은 세리느 정도였으니까.
“앞으로 제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바스티안 가문의 후계자로서 하는 얘기?”
“아니요, 세리느 바스티안이라는 당신의 친구로서 하는 얘기예요.”
“…….”
베리스리제는 잠시 세리느를 쳐다본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너한테 도움을 부탁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 기억해 둘게.”
“네, 기억해 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세리느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부담스러웠는지, 베리스리제는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그런데 말이야.”
“네?”
“너한테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베리스리제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세리느 너, 에르나스가 정말로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황녀 전하와 약혼하면 어떻게 할 거야?”
“네?”
“에르나스가 다른 사람과 약혼해도 상관없는 거냐고.”
“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요?”
베리스리제의 질문을 받고 세리느가 얼굴을 붉혔다.
“저는 에르나스와의 약혼을 파기했어요. 그러니 에르나스가 누구와 약혼하든…….”
“아버지하고 얘기한 뒤에, 생각한 게 있는데 말이야.”
세리느가 말하는 걸 무시하면서, 베리스리제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에르나스, 황녀 전하와 약혼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황녀 전하와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그렇게 반문하자, 옆에서 세리느가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베, 베리스리제,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리히테나워 대공은 아직 어린 황녀 전하를 보필하기 위한 자리야. 황녀 전하와 결혼해서 일심동체가 될 사람이니까, 리히테나워 대공의 힘이 곧 황녀 전하의 힘이라는 논리지.”
“그래서요?”
“하지만 황녀 전하가 성인이 되고 황권이 안정화되면 굳이 리히테나워 대공도 필요 없어져. 정확히 말하자면, 리히테나워 대공과 결혼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지.”
“……!”
숨을 삼키는 세리느를 내버려 둔 채, 베리스리제가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에르나스, 네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제를 추진하면 황권은 더 강해질 거야. 네가 굳이 리히테나워 대공으로서 황녀 전하와 정식으로 결혼할 필요는 없어질 거라 생각하는데… 내 말이 틀렸어?”
“…….”
“흥, 반응을 보니 알겠네. 역시 내 생각이 맞구나.”
베리스리제가 팔짱을 끼며 미소 지었다.
“너는 황녀 전하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였어.”
“베리스리제.”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런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마라.”
“알고 있어. 이런 얘기를 떠들고 다녀서 좋은 건 없겠지.”
이 얘기가 궁내부 귀에 들어가면 난색을 표할 것이다.
결격 사유로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에르나스.”
“뭐지?”
“훗날 황녀 전하와의 약혼을 취소하고, 네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되면…….”
베리스리제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네 결혼 상대로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
“뭐?”
“베, 베리스리제!”
내 옆에서 세리느가 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아버지도 나하고 에르나스의 정략결혼을 고려한 적이 있었어.”
베리스리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나는 슈라이에르 가문을 재건해야 하는 입장이야. 그러니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는 없어.”
“……!”
“그런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에르나스만큼 좋은 상대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베리스리제는 내 얼굴을 쳐다봤다.
“어때, 에르나스.”
“베리스리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훗날 얘기야. 그리고 이런 걸 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딱히 지금 당장 결론을 내려 달라는 건 아니야.”
베리스리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고려해 달라는 거니까.”
“…….”
그렇게 말한 뒤, 베리스리제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 나는 이만 가 볼게.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서.”
“베리스리제, 당신은…….”
“세리느, 말해 두지만 나는 가주 역할을 하면서도 계속 검술을 수련할 거야.”
베리스리제가 세리느를 쳐다보며 말했다.
“언젠가 너를 확실히 꺾어 줄 테니까, 그때까지 너도 열심히 해 봐.”
“…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느를 보며 베리스리제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
베리스리제는 나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잠시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정리한 것처럼 고개를 돌린 뒤, 바로 자리를 떴다.
‘베리스리제…….’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복잡한 심정에 휩싸였다.
소설에서 베리스리제는 에르나스에게 이용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캐릭터였다.
에르나스는 베리스리제가 오래전부터 자신한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걸 꿰뚫어 보고 있었는데, 그걸 이용해 베리스리제를 마음대로 조종했다.
결국 베리스리제는 비참하게 죽게 되지만, 에르나스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 죽음을 비웃는다.
‘연재 당시에는 독자들이 베리스리제를 동정하면서 에르나스를 엄청나게 욕했었지…….’
소설과는 달리, 이 세계에서 베리스리제는 죽지 않았다.
앞으로 베리스리제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에, 에르나스.”
상념에 잠겨 있었을 때, 세리느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정말로 황녀 전하하고는 결혼을…….”
“세리느, 그 얘기는 하지 말자.”
“하, 하지만…….”
세리느는 나한테 이 부분을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때 기척이 느껴졌다.
한쪽 눈에 단안경을 낀 교수… 페르디난드였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밀회라도 하고 있는 건가?”
“미, 밀회라뇨! 저희는 그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교수님.”
“흥, 얼버무리기는…….”
페르디난드는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에르나스, 잠깐만 와 줬으면 한다.”
“왜 그러시죠?”
“클라우비체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집무실을 뒤지고 있는데, 특이한 것을 발견해서 말이다.”
“특이한 것……?”
“이거 아무래도…….”
그 순간, 페르디난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암리타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
암리타.
엘릭시르 이상의 효과를 지닌, 고대인들의 영약(靈藥).
페르디난드는 그것을 예전부터 계속 연구해 왔다.
‘만약에 암리타를 복용할 수 있다면…….’
그래듀에이트 절정급.
그 경지에 도전하기 위한 마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