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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20화 (120/212)

120화 클라우비체의 검 (2)

“무슨 일이냐!”

“침입자입니다! 누군가가 성벽을 올라왔습니다!”

“대체 누가……!”

부하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클라우비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카데미 측의 절정급 교수들은 전부 발이 묶여 있다.

아군의 눈을 피해 성벽을 올라와 망루를 파괴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설마…….”

“저쪽입니다!”

쿠쿵!

무너지는 망루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예상했던 얼굴을 목격하고 클라우비체는 인상을 찡그렸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살바토레를 죽인 뒤, 에르나스의 행방은 묘연했다.

아카데미가 슈라이에르 본성을 공격할 때 나타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이 타이밍에 나타난 건가.

“마지막까지 단독으로 후방을 교란시키려 하는군…….”

클라우비체는 이를 갈면서 전황을 살폈다.

지금 슈라이에르 본성에 있던 수비 병력과 바깥에 숨겨 놨던 별동대가 아카데미를 포위한 상태다.

아카데미의 절정급 교수들도 이미 클라우비체의 슈라이에르 비격검술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고… 잠시 눈을 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상대하겠다.”

“가주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너희들은 상대가 안 된다.”

그동안 에르나스에게 죽어 나간 그래듀에이트가 한둘이 아니다.

살바토레 아틸리온조차 에르나스에게 쓰러졌다.

이렇게 된 이상, 클라우비체가 직접 나서야 한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너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그렇게 선언하며 클라우비체가 검을 들었다.

슈라이에르 비격검술로 집중 공격을 해서 속전속결로 해치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

에르나스 옆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베리스리제……?”

클라우비체의 외동딸,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였다.

* * *

베리스리제는 긴장감을 느꼈다.

아버지인 클라우비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시선 앞에서는 언제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베리스리제.”

하지만, 옆에서 들려온 에르나스의 목소리가 베리스리제의 등을 밀어줬다.

“네 생각을 말해.”

“…….”

베리스리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에르나스를 막기 위해 달려들고 있던 병사들이 주춤했다.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인 베리스리제가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아버지, 베리스리제입니다.”

“…….”

클라우비체의 차가운 눈동자가 베리스리제를 향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에르나스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정신 나갔군.”

베리스리제의 대답에 클라우비체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보아하니 강제로 끌려 다니던 게 아니군.”

“처음에는 강제로 끌려간 거였지만, 중간부터 제 의지로 따라다녔습니다.”

“이유가 뭐냐, 베리스리제.”

클라우비체가 다그쳤다.

“설마 아직도 에르나스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냐.”

“…….”

“네가 어린 시절 에르나스한테 호감이 있었던 건 알고 있다. 첫 무도회에서 에르나스에게 속았다고 슬퍼했던 것도 말이다.”

베리스리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에르나스한테는 예전부터 애증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녀다운 순수한 호감이었지만, 첫 무도회에서 에르나스에게 배신당한 이후부터 변질되었다.

어떻게든 에르나스를 꺾고 싶었고, 에르나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너는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권력을 잡은 뒤, 에르나스를 손에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거기까지 알고 계셨군요, 아버지…….”

“물론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 정도는 다 알 수 있으니까.”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베리스리제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지금 클라우비체가 저런 말을 하는 건, 딸에게 ‘너는 나에게 통제당하는 존재다.’라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제가 에르나스와 함께 여기까지 온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뭐지?”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

클라우비체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에게 통제당해야 하는 딸이 의견을 말하려 한다는 게 불쾌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냐.”

“지금 슈라이에르 가문이 처한 상황과 관련된 것입니다.”

베리스리제는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바깥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아버지, 슈라이에르 가문은 지금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웃기는군. 어디가 궁지라는 것이냐.”

클라우비체가 코웃음을 쳤다.

“오늘 여기서 아카데미의 주력 부대를 괴멸시키면 된다. 그러면 아카데미와의 전쟁은 슈라이에르 가문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거죠?”

“뭐라고?”

“아카데미를 꺾는다고 해도, 아직 아그리파 가문과 이그니아스 가문이 남아 있습니다.”

“…….”

“이번에 우리 가문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그리파 가문과 이그니아스 가문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아그리파 가문은 아카데미와 슈라이에르 가문의 싸움을 지켜보며 내실을 다지고 있다.

이그니아스 가문은 동부의 중소 가문들을 포섭하며 점점 세력을 키워 가고 있다.

“그들이 우리 가문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 줄 리 없습니다. 결국 적대하게 되겠죠.”

“…….”

브랜틀리 아그리파와 칼레온 이그니아스는 이미 클라우비체와 거리를 두고 있다.

결국 제국의 패권을 손에 넣기 위해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다.

“란즈슈타인 가문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침묵하고 있는 황실에서 앞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고요.”

“그런 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베리스리제.”

클라우비체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후의 일은 내가 생각해서 대응할 것이다.”

“아니요. 아버지가 아무리 책략을 꾸며도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네까짓 게 감히…….”

“아버지, 슈라이에르 가문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동안 베리스리제는 에르나스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아카데미와 화해하는 겁니다.”

아카데미와의 화해.

그 말을 입에 담자, 클라우비체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전황이라면, 아카데미의 양보를 얻어 내면서 휴전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아카데미는 슈라이에르 본성 앞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칫하면 전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슈라이에르 가문이 먼저 휴전을 제안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한테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동맹을 맺은 채 아그리파 가문이나 이그니아스 가문과 대항하면 됩니다.”

“…….”

“아카데미와 손을 잡는다면, 이 제국에서 그 누구도 슈라이에르 가문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슈라이에르 가문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카데미와 슈라이에르 가문이 하나가 되면 아그리파 가문과 이그니아스 가문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헛소리를 하는군, 베리스리제.”

하지만, 클라우비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한테 유리한 조건이라고 해 봤자, 결국 우리도 양보를 해야 한다.”

“그건…….”

“아카데미도 야망이 있다. 놈들은 슈라이에르 가문을 그냥 들러리로 만들려 할 거다.”

“…….”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아카데미를 등에 업고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었을 때, 슈라이에르 가문은 말석에서 박수나 치고 있겠지.”

클라우비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놈들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걸 도와줄 수는 없다.”

“아버지, 그게 잘못된 걸까요?”

“뭐라고?”

“꼭 슈라이에르 가문이 정점에 올라야 하는 건가요?”

베리스리제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는 인정해야 합니다. 슈라이에르 가문은 정점에 오를 자격이 없습니다.”

“……!”

베리스리제의 발언에 클라우비체가 눈을 치켜떴다.

“아버지, 저는 제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카데미에서 한번도 에르나스를 꺾지 못했던 제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봤자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그동안 베리스리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르나스를 꺾고 정정당당하게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에르나스를 꺾지 못한 채 리히테나워 대공이 된다면…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슈라이에르 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모략으로 제국의 정점에 올라 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리스리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주제에 헛소리 하지 마라!”

“그렇다면, 다른 검술명가들의 가주들을 꺾고 제국의 정점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 주십시오.”

“……!”

클라우비체가 브랜틀리나 칼레온하고 결투를 해서 승리한다면, 정점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려 하는 클라우비체가, 다른 가문의 가주들과 정면에서 대결할 리가 없다.

“아버지, 우리가 온갖 모략으로 제국의 정점에 올라 봤자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을 겁니다.”

“…….”

“우리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온갖 모략에 의존해야 할 겁니다.”

남들을 이간질해서 서로 싸우게 만든다든가.

암살자를 보내 죽여 버린다든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을,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 지금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아카데미와 화해하고, 제국의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

“굳이 우리 세대에서 정점에 오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시간을 들여 착실히 준비한 뒤, 정정당당하게 정점에 오르면 됩니다. 분명 기회가 올 겁니다.”

에르나스는 특정 명문가가 우대받는 일 없이, 순수하게 실력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게 실현된다면, 분명 슈라이에르 가문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아버지, 그러니 부디…….”

“베리스리제.”

하지만, 베리스리제가 다시 한번 간절히 부탁하려 하고 있었을 때.

클라우비체에게서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에르나스에게 세뇌라도 당한 모양이군.”

“아버지……!”

“듣기 싫다, 베리스리제.”

클라우비체는 무서운 눈동자로 베리스리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에르나스의 책략에 속고 있을 뿐이다. 어째서 내가 그 책략에 넘어가야 하는 거냐.”

“이건 슈라이에르 가문에게 최선의 길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우리 가문을 위해……!”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올 거라고? 그런 예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버지……!”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베리스리제는 절망감을 느꼈다.

결국 그는 본인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훗날 슈라이에르 가문에게 기회가 생기든 말든 클라우비체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클라우비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좌지우지하는 것뿐이다.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제발……!”

그래도, 베리스리제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하고 싶었다.

슈라이에르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가문을 흔들어 놓을 생각인가.”

“아버지……!”

“좋다, 베리스리제.”

클라우비체의 입에서 냉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더 이상 나한테 복종할 생각이 없다면… 나도 더 이상 네가 필요없다.”

“……!”

클라우비체가 팔을 치켜든 순간.

마력에 휩싸인 장검 한 자루가 사출되었다.

냉혹한 칼날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베리스리제는 절망감을 느꼈다.

“베리스리제.”

“……!”

꽈앙!

베리스리제를 꿰뚫기 직전, 장검이 튕겨져 나갔다.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다.”

“에르나스……!”

“말로 설득할 수 없다면, 결국 검으로 해결해야겠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앞으로 나섰다.

방금 슈라이에르 비격검술을 튕겨 낸 검을 들고서.

“클라우비체, 아까 나한테 말했었지.”

“네놈…….”

“모습을 드러낸 것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

눈을 치켜뜬 클라우비체를 향해, 에르나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딸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에르나스의 검기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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