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외부 활동 (3)
오크 챔피언 그리고 오크 타이런트.
두 종류의 상위종이 출현한 오크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우리는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왔다.
이동 수단으로는 마차를 사용하는데, 평범한 말이 아니라 ‘바이콘’이라는 이름의 몬스터를 길들여서 마차를 끌게 한다.
바이콘은 일반적인 말보다 우수한 육체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마차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라는 설정이다.
‘실제 중세의 마차 기준으로 속도를 설정하면 이동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스토리 전개에 지장이 생기거든.’
그래도 목적지까지는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유베스터 남작이라는 지방 귀족의 영지에 오크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일단 유베스터 남작부터 만나게 되었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유베스터 남작은 바로 튀어나와서 우리를 맞이해 줬다.
요새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많이 수척했다.
“평소 오크가 나타날 때는 기껏해야 대여섯 마리 정도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산속에 수십 마리가 자리를 잡아서… 놈들이 마을로 내려올 때마다 피해가 막심합니다!”
유베스터 남작은 저 멀리 보이는 산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주위에 원군까지 요청해서 토벌대를 구성했는데, 별 성과도 없이 괴멸되었습니다! 그래서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에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떠들어 대던 유베스터 남작이었지만, 갑자기 멈칫했다.
“저기, 그런데…….”
“왜 그러시지요?”
클로드가 묻자, 유베스터 남작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살펴봤다.
“이게 전부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카데미에서 와 주신 병력이… 이게 전부입니까?”
클로드와 마테우스.
나와 하인리히.
이렇게 네 명이 전부인지 확인하면서 유베스터 남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게다가 두 사람은… 아직 어린애 같은데.”
“남작님, 못 미더워하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클로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십 명을 모아 토벌대를 구성해도 소용없었는데, 고작 네 명이서 오크들을 토벌하겠다니 영 신뢰가 가지 않으시겠죠.”
“아니, 꼭 그런 얘기는 아니고…….”
“그런데 남작님, 토벌대에 그래듀에이트는 몇 명 있었습니까?”
“그래듀에이트?”
유베스터 남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두세 명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어느 정도 경지였습니까?”
“외부에서 빌려 온 병력이라 정확히는… 저는 검술에는 문외한이라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제 추측이지만, 아마 그래듀에이트 초입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래듀에이트 초입…….”
변방에서 그래듀에이트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검사들은 대부분 그래듀에이트 초입이다.
그래듀에이트 하급만 되어도 더 번듯한 곳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하고 여기 있는 마테우스는 그래듀에이트 중급… 그들보다 두 단계 높은 경지입니다.”
“그래듀에이트 중급…….”
“그리고 여기 있는 학생들은…….”
클로드가 나와 하인리히를 힐끔 쳐다본 뒤 말했다.
“자세히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이름 높은 명문가의 자제들입니다. 그들은 이 나이로 벌써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그래듀에이트 하급이라면…….”
“토벌대에 참가한 그래듀에이트들보다, 여기 있는 학생들이 훨씬 강할 겁니다.”
“……!”
유베스터 남작이 우리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
“조교수님, 언제까지 시간 낭비를 할 겁니까.”
바로 그때, 하인리히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일일이 설명을 해 주는 것보다, 직접 가서 놈들을 해치우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만.”
“……!”
하인리히의 건방진 태도에 유베스터 남작이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클로드도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조교수님.”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작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이렇게 네 명만 도착해서 오크들을 토벌하겠다고 하면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죠.”
“으음…….”
“그러니, 남작님이 안심하실 수 있도록 빨리 가서 처리합시다.”
그렇게 얘기하며 마테우스에게 눈짓을 하자, 마테우스가 다급히 서류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토벌에 나서기 전에 계약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작님, 일단 이 서류에 서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유베스터 남작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서류를 작성했다.
서명까지 마친 뒤, 우리는 본격적으로 오크들이 머무르는 산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남작님.”
출발하기 전, 나는 유베스터 남작한테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랭커스터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까?”
“랭커스터 가문…….”
서부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검술명가의 이름을 언급하자, 유베스터 남작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랭커스터 가문은 내부에 좀 문제가 있는 듯해서… 주위 가문들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레스터 랭커스터가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자, 가주인 헨리 랭커스터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 한동안 모든 병력을 본가에서 대기시켜야 한다.
‘서부에서 왕 노릇을 하던 랭커스터 가문이 침묵하면, 안 그래도 안 좋던 서부의 치안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지.’
서부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면, 서부에 위치한 아카데미에도 영향이 생긴다.
여러 가문들도 그 혼란을 틈타 움직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끄러워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오크들이 모여 있는 산으로 향했다.
* * *
“저놈들, 돌과 흙을 쌓아서 산성(山城)을 지어 놨군.”
클로드가 나무 위에서 산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망원경을 사용한 것처럼 잘 보일 것이다.
“그 산성을 오크 챔피언이 지키고 있었으니, 평범한 토벌대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었겠지.”
그렇게 말하며 클로드가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전투는 두 단계로 진행될 거야. 첫 번째 단계는 오크 챔피언이 지키는 산성을 돌파하는 거고…….”
“두 번째 단계는, 산성 안쪽에 자리 잡고 있을 오크 타이런트를 해치우는 거군요.”
내가 말을 대신하자,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솔직히 오크 챔피언과 오크 타이런트만 해치우면 다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야. 나머지 놈들은 그냥 잔챙이 오크들이니까.”
일반 오크들은 그래듀에이트 초입 수준만 되어도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
그래듀에이트 중급과 하급인 우리들 전력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 오크 챔피언을 해치우고 산성을 돌파하는 것부터 생각하지.”
마테우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오크 챔피언은 완력이 강하지만 지능은 형편없습니다. 산성을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여 오크 수비 병력을 분산시킨 뒤, 오크 챔피언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기습하는 겁니다.”
“흐음… 오크 챔피언은 지능이 떨어지는 편인가?”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내 말을 듣고 클로드와 마테우스가 생각에 잠겼다.
“지형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작전인 것 같은데…….”
“정면 돌파보다는 낫긴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두 사람 앞에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크들을 분산시키는 역할은 클로드 조교수님과 하인리히가 맡아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듣고 있던 하인리히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내가 미끼 역할을 해야 하는 거지?”
“기동력은 네가 더 우수하니까.”
하인리히는 아카데미 학생들 중에서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한다.
오크들은 둔한 편이고, 쉽게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산성 위에서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놈들을 혼란시켜 줘.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
“으음… 어쩔 수 없군.”
하인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녀석… ‘네가 더 낫다.’라고 말하면서 살살 구슬리면 부탁을 들어준다.
소설에서도 그랬으니까.
“클로드 조교수님도 경신술이 뛰어나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지요?”
“너희한테는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용케도 알고 있군.”
클로드가 곱슬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러면, 너하고 마테우스가 오크 챔피언을 상대하는 건가?”
“네,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만.”
“좋아. 상황 봐서 우리도 도와주도록 하지.”
작전은 정해졌다.
이제 실행에 옮기는 것만 남았다.
“그러면… 움직이자.”
“네, 조교수님.”
우리는 경신술을 사용하여 산으로 접근했다.
먼저 클로드와 하인리히가 각각 좌우로 움직였고, 나하고 마테우스는 조금 느리게 정면으로 접근했다.
“카아악!”
“카아아아악!”
이윽고 산속에 오크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클로드와 하인리히가 산성으로 뛰어오르며 놈들을 혼란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오크 챔피언은 산성을 공격한 침입자를 격퇴하려 하겠지만, 양쪽에서 종횡무진 움직이고 있으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키에에엑!”
“크에엑!”
오크들의 비명 소리도 연달아 들려왔다.
간격이 짧은 걸 보니 하인리히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오크들의 목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테우스 조교수님, 저희도 움직이죠.”
“아, 그래, 알겠다.”
마테우스가 내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는 클로드나 하인리히와는 달리, 조용히 성벽을 기어올라 잠입했다.
‘저기 있군.’
다른 오크들보다 2.5배 커다란 몸집을 지닌 근육질 오크.
손에는 그 몸집에 걸맞은 대검(大劍)을 지니고 있었다.
조잡한 만듦새의 검이지만, 그 무게만으로도 사람 하나 정도는 일격에 짓이겨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카아악! 누런 살색 놈들……!”
흉측한 녹회색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오크 챔피언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지금 오크들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부하들에게 맡기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클로드와 하인리히의 경신술을 따라잡는 건… 오크 챔피언의 굼뜬 움직임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앞장서겠다. 따라와라, 에르나스.”
마테우스가 먼저 나섰다.
명색이 조교수이니, 학생보다 앞장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카아아악!”
하지만 그 직후.
접근을 눈치챈 오크 챔피언이 눈을 치켜뜨며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거대한 몸집으로 휘두른 대검이 마테우스를 덮쳤다.
“크윽!”
쿵!
굉음과 함께 마테우스가 뒤로 밀려 나갔다.
검기로 방어했기에 망정이지,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면 큰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 오크 챔피언……!”
마테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오크 챔피언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크 타이런트 때문입니다.”
“뭐?”
“오크 타이런트의 지배력이 오크 챔피언의 전투력을 극대화한 거죠.”
“에, 에르나스,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당혹스러워하는 마테우스를 내버려 둔 채, 나는 앞으로 나섰다.
“마테우스 조교수님, 다른 오크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에르나스, 지금 무슨…….”
“카아아악!”
휘익!
오크 챔피언이 나를 향해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테우스 때처럼 되지는 않았다.
내가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사용해 이미 이동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카아악?!”
내 검이 오크 챔피언의 옆구리를 스쳤다.
하지만 출혈이 조금 있었을 뿐이다.
오크 챔피언의 두툼한 근육을 뚫기에는 이 정도 공격으로는 부족하다.
‘하인리히도 지금 실력으로는 오크 챔피언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워.’
스피드를 활용해 자잘한 부상을 입힐 수는 있겠지만, 숨통을 끊기 위한 결정적인 한 방을 꽂아 넣지는 못한다.
그걸 알고 있기에, 나는 하인리히에게 미끼 역할을 맡긴 것이다.
“이 누런 살색… 카아악!”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포효하면서, 오크 챔피언이 나한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나한테는 닿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도약한 상태였으니까.
‘본래 오크 챔피언은 무기를 잘 다루는 전사로서의 측면도 갖고 있어.’
하지만, 지금 오크 챔피언은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대검을 휘두르고 있다.
머리가 나쁘고 다혈질이라, 우리들 작전에 넘어가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빈틈투성이라면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지.’
공중에서 몸을 틀며 자세를 잡았다.
지난번에 마테우스를 제압했을 때처럼, 리히테나워 경신술에 발라하일 중검술을 조합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걸로 끝이 아니다.
‘여기에… 칼레시우스 창뢰검술도 조합한다.’
극대화된 마력이 칼날에 전개되면서, 검기가 푸른색으로 번쩍였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오크 챔피언을 향해, 전광석화 같은 참격(斬擊)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