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외부 활동 (2)
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흑색 6반 시절에는 수업이 없는 날이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수련생은 주중이나 주말의 구분이 없다.
주말이라고 해도 클래스의 담당 교수가 오라고 하면 가야 한다.
‘오늘은 클래스와 관계없는 행사가 있는 날이지만.’
아침부터 다섯 명의 수련생이 기숙사 앞에 집합했다.
2차 시험 직후에 주어져야 했던 ‘특전’을 뒤늦게 지급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색 엘릭시르…….’
나는 교관에게서 받아 든 푸른색 물약을 살펴봤다.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지만, 지난번에 받았던 적색 엘릭시르보다 정순한 마력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걸 복용하면 정체 상태였던 내 마력을 다시금 성장시킬 수 있다.
“흠, 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마력을 연공해야겠군.”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루퍼스. 아직 하나 더 남았어.”
베리스리제가 루퍼스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무기를 받아야 하잖아.”
“아, 그랬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교관들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자루의 검을 보고, 세리느가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항상 진검을 휴대하고 다니게 되는 거군요.”
2차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은 진검을 갖고 다닐 수 있다.
그래듀에이트는 목검을 써도 얼마든지 사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진검 휴대를 금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씩 골라라.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걸 선택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교관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은 검을 고르기 시작했다.
세리느와 루퍼스는 무난한 스타일의 장검을 골랐고, 베리스리제는 가늘고 뾰족한 레이피어를 집어 들었다.
한편 하인리히는 평균보다 길이는 길면서 두께는 얇은 검을 골랐다.
“하인리히, 그렇게 얇고 긴 검으로 적을 벨 수 있겠나?”
“내 검기면 가능하다, 루퍼스.”
루퍼스에게 차갑게 대꾸한 뒤, 하인리히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뭘 꾸물거리지? 빨리 골라.”
“음…….”
사실 나는 고민 중이었다.
어떤 검이 좋은 검인지 꿰뚫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생긴 검이라도 완성도 차이가 있을 텐데, 구별하기 어렵단 말이지.’
이런 안목은 유스레흐트의 능력으로도 갖출 수 없다.
나는 여러 검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고민했다.
‘그나마 이게 느낌이…….’
결국 나는 손에 들었을 때 느낌이 괜찮은 검을 골랐다.
모양새는 세리느와 루퍼스가 선택한 장검과 비슷했지만, 길이는 조금 더 길었다.
“흐음.”
옆에서 지켜보던 하인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무게중심이 그립 가까이에 있어서 길이에 비해 다루기 쉽겠지. 네 손목 힘을 생각하면 그게 낫다.”
“…….”
아무래도 잘 고른 모양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외부에서 별도의 검을 반입해서 사용하는 것도 허락된다. 그럴 경우에는 지급된 검은 반납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해산해라.”
교관들이 자리를 떴다.
이제부터는 자유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휴식을 취할 수는 없다.
청색 엘릭시르에서 마력을 흡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바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빨리 엘릭시르를 복용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았다.
“에르나스, 한동안 나가 있어라.”
하지만, 방에 들어가자마자 하인리히는 나를 내쫓으려 했다.
“네가 있으면 마력 연공에 방해된다.”
“내가 그렇게 해 줄 이유는 없지.”
“뭐라고?”
완벽주의자인 하인리히는 아무런 방해 요소가 없는 밀실에서 혼자서 마력 연공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귀찮은 소리일 뿐이다.
“그냥 같은 방에서 해. 서로 얼굴 마주 보면서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대꾸하며 나는 2층 침대에 올라갔다.
위층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자, 하인리히가 바로 고개를 내밀었다.
“뭘 믿고 네 녀석하고 같은 방에서 마력 연공을 하란 말이냐?”
“걱정 마.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네 말을 어떻게 믿고…….”
“마력 연공 중에 방해하면 처벌받도록 되어 있어. 그런 짓은 안 해.”
마력을 운용하는 도중에 정신이 흐트러지면 마력이 폭주할 수 있다.
큰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 때문에, 마력 연공 중에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는 큰 처벌을 받는다.
“악의를 품고 방해했다간 퇴학까지 당할 수 있는데, 내가 왜 그렇게 하겠어?”
“으음…….”
물론, 하인리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초에 이 녀석은 그런 식으로 비겁한 짓을 하지는 않는 성격이다.
“너는 아래층, 나는 위층에서 각자 마력 연공을 하면 돼.”
“알겠다.”
결국 하인리히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
잠시 뒤, 청색 엘릭시르의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나도…….’
나도 청색 엘릭시르를 마신 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위장에서 엘릭시르의 마력이 흡수되면서 전신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그동안 마시던 적색 엘릭시르보다 질이 좋아.’
단순히 마력량이 많은 게 아니다.
순도가 높기 때문에 혈맥에서 순환시키기 쉽고, 마나 하트도 잘 반응한다.
‘그동안 정체 상태였던 마력량을… 확실히 증진할 수 있겠어.’
눈을 감은 채 마력을 계속 순환시켰다.
그리고 혈맥을 따라 흐르던 마력을 조금씩 마나 하트에 정착시켰다.
한계까지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침대 아래에서 하인리히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마 하인리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
주위는 어두웠다. 오전에 시작했는데 벌써 밤이 된 것 같았다.
사다리를 타고 2층 침대를 내려가니, 하인리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끝낸 건가.’
역시 신동은 신동이다.
상당히 높은 효율로 청색 엘릭시르의 마력을 흡수하여 안정화했을 것이다.
‘나는… 청색 엘릭시르의 마력을 80% 정도 흡수한 건가.’
가슴의 마나 하트가 묵직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마력에는 무게가 없기 때문에 그냥 기분 탓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마력의 밀도가 훨씬 높아진 건 사실이야.’
나는 방에서 나갔다.
통로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 기숙사 바깥으로 이동했다.
“후우…….”
시원한 바람 속에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마나 하트를 활성화했다.
“…….”
청색 엘릭시르를 통해 손에 넣은, 정순한 마력.
그중에서 아주 약간만 빼내서, 체외로 방출했다.
마력 제어가 미숙한 사람이 마력을 체외로 흘리는 것과는 다른, 의도적인 마력 방출이다.
‘이 정도 양이면 자연적으로 회복 가능한 수준이지.’
미약한 마력을 사방으로 뻗었다.
마력의 입자 하나하나에 정신을 집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다른 마력과 충돌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검기와 검기가 부딪칠 때의 감각을 매우 미약하게 만든 느낌이야.’
존재감 있는 마력 덩어리.
마나 하트가 주위에 흩어져 있다.
기숙사 안에 둘, 실외 훈련장 쪽에 하나, 기숙사 옥상 위에 하나.
‘기숙사 안에 있는 건 루퍼스와 베리스리제, 실외 훈련장에 있는 건 세리느, 옥상 위는… 하인리히인가.’
그 직후, 옥상 위의 반응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신술을 사용해서 멀리 도약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마력을 날렸다.
그러자 하인리히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아틸리온 마력탐측술.’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은 어제 클로드 조교수에게서 얻은 능력이다.
새로운 검술을 획득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에, 12일 페널티를 감수하고 손에 넣었다.
그 효과는 말하자면 ‘레이더’라 할 수 있다.
미세한 마력을 사방으로 날리는 것으로 주위의 마력을 감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 숨어 있어도, 마나 하트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은 숨길 수가 없지.’
상대가 검기나 호신기를 전개한 상태라면 그것도 알아낼 수 있다.
여기서 더 익숙해지면 상대가 어느 정도의 마력을 지녔는지도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걸로…….’
나는 더 많은 마력을 주위에 뻗었다.
이렇게 하면 마력 소비량이 커지지만, 그 대신 더 넓은 범위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
느껴진다.
근처에 있는 세리느, 루퍼스, 베리스리제, 하인리히뿐만이 아니다.
교관들이나 교수들… 100명 이상의 그래듀에이트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거라면…….’
본격적으로 나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테오도라 발트펠트.
그녀가 보낸 자객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더라도, 내가 먼저 치고 나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 * *
그리고… 마침내 아카데미 외부로 나가는 날이 왔다.
“흠, 준비는 다 마친 듯하군.”
나와 하인리히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와 마테우스에게는 너희들을 학생 취급하지 말라고 얘기해 뒀다. 한 명의 그래듀에이트로서, 임무를 완수하고 와라.”
“알겠습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인리히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인리히, 너를 지도해 주는 것은 조금 더 나중이다. 실전 경험을 겪고, 조금 더 성장한 다음에 직접 봐주겠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러자 옆에 있던 클로드가 피식 웃었다.
“이봐, 하인리히. 처음부터 지도 교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거야? 어딜 가도 그렇게는 안 해 줘. 아예 지도 교수님 얼굴조차 안 보여 주는 클래스도 있… 커흠.”
클로드가 다급히 헛기침을 했다.
하인리히가 차디찬 눈빛으로 클로드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원래 클로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농담을 즐기는 쾌활한 성격이지만… 지난번 승부에서 하인리히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저렇게 노려보면 움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도 교수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클로드, 마테우스, 이 녀석들을 잘 부탁한다.”
“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욜스가 먼저 자리를 뜬 뒤, 클로드와 마테우스가 우리를 쳐다봤다.
“그러면 브리핑을 시작해 볼까, 학생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현장을 골랐으니,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마테우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상대는 오크들이다. 오크가 어떤 몬스터인지는 이미 학술 교육 시간에 다 배웠겠지.”
오크.
판타지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호전적인 성격의 종족이다.
여기서는 녹회색 피부를 지닌 식인 몬스터로, 인간을 ‘누런 살색’이라 부르며 사냥감으로 삼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업에서 배운 내용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다.”
“어째서입니까?”
“오크들의 상위종… 오크 챔피언과 오크 타이런트가 있기 때문이지.”
오크 챔피언.
오크 타이런트.
확실히 흑색 6반에서는 듣지 못했던 이름들이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여기서 설명해 줄게.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말이야.”
클로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오크 챔피언부터 시작할게. 이 녀석은 일반 오크의…….”
“일반 오크의 2.5배 정도 되는 체격을 지닌, 파워 특화형 오크죠.”
“…….”
내가 말을 가로채자, 클로드가 멈칫했다.
“단순히 힘만 강한 게 아니라, 무기를 잘 다루는 전사로서의 특성도 갖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있을 때는 상당히 위협적이어서 상대하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아, 그래… 잘 알고 있군. 어디서 들은 적이 있나 보네.”
클로드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오크 타이런트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을 거다. 오크 타이런트는 오크들의…….”
“오크들의 군주, 그것도 아주 지배력이 강한 독재자라 할 수 있는 존재죠. 오크 타이런트가 출현하면 오크 무리가 급속도로 강해진다고 들었습니다.”
“…….”
“일설에 따르면 마력을 운용하는 법을 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래듀에이트의 힘을 지닌 오크라고 보면 될 것 같군요.”
클로드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본인이 할 말을 전부 빼앗아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조교수님,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이론 강의는 굳이 안 해 주셔도 된다고 말입니다.”
나는 이 세계의 창조자다.
세세한 몬스터 설정 같은 건 이 사람들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
이런 곳에서 일일이 설명을 듣는 건 시간 낭비다.
“어서 출발합시다, 조교수님들.”
클로드와 마테우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내가 주도권을 잡는 편이 효율적이다.
이번 토벌 임무도 소설에 나온 사건이라, 이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
“욜스 클래스의 첫 번째 외부 활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오크 챔피언과 오크 타이런트를 잡으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