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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306화 (306/315)

306화

SGBC

어떤 나라, 그 안에서도 어떤 지역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축물.

보통 우리는 그것을 랜드마크(Landmark)라고 부른다.

[자하 하디드의 걸작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동대문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

[DIA건설, 세계적 디자인 그룹 ALuna와 손잡고, 랜드마크 건설 ‘포부’.]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의 정수? 서우진이 설계한 마곡 컨벤션 센터. “강서구의 랜드마크가 될 것.”]

랜드마크의 사전적 의미는, ‘멀리서 보고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되는 대형 건물 등의 지형지물’이다.

즉, 그 건축물만 봐도 이곳이 어딘지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랜드마크인 것이다.

에펠 탑을 보면 프랑스 파리가 떠오르는 것처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하면 미국의 뉴욕이 생각나는 것처럼.

버킹엄궁전이나 빅벤을 떠올리면, 곧바로 영국의 런던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리고 남산타워의 실루엣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랜드마크라는 것은, 건축가에게 있어서 로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설계한 건축물이 해당 지역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건축가의 인생에서 영광스럽지 않은 일일 수 없었으니까.

‘내 이름을 걸고 지은 건축물이 서울의 상징이 된다면……. 그것만큼 행복하고 가슴 벅찬 일도 없을 거야.’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것은 우진에게 또한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었다.

서울에 가장 높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고 싶다는 우진의 어린 시절 막연한 꿈에도, 그러한 부분이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출사표를 던졌다.

이제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십 년은 지나야 삽을 뜨고 착공을 시작할 수 있는, 삼성동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조 단위가 넘는 자본이 복잡하게 얽힌 이 사업장에, 직접 총대를 메고 뛰어든 것이다.

* * *

KCA인베스트먼트는, 글로벌 투자 그룹이다.

전 세계적으로 큰돈을 굴리는 대형 금융회사 중, 모기업이 한국에 있는 몇 안 되는 금융그룹.

그런데 이 KCA인베스트먼트는, 2015년 초부터 꽤 큰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SH물산과 협업하여 야심차게 준비했던 국내 프로젝트인 삼성동 글로벌 비즈니스센터가, 전복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SH그룹의 집안싸움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는 그룹 내 자본싸움으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SH물산이 삼성동 사업장을 포기하는 바람에, 시행사를 자처했던 KCA인베스트먼트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사업장의 모든 지분을 시행사인 KCA가 가지고 있었다면,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삼성동 사업장의 땅값은 글로벌 투자사인 KCA인베스트먼트에게도 부담되는 수준의 거액이었고.

그래서 일부 지분을 SH그룹에서 가지고 있었던 게 문제가 되었다.

SH그룹에서 가진 지분은, 총사업비의 1/3 수준인 5천억이라는 거액.

SH물산은 이 지분을 최대한 빠르게 털고 사업장에서 나가길 원했고, 그래서 작년부터 지분 매각을 추진하였다.

KCA는 어떻게든 이 지분을 전부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했다.

SH물산에서 도의적으로 조금 싼값에 매도하겠다 하였지만, 이미 몇 년이 지나면서 땅값이 비싸진 탓에 KCA에서도 감당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SH물산에서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을 KCA에 주었지만 결국 KCA는 자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였고.

그래서 최근 SH물산의 주식 일부가 ‘동진 투자증권’이라는 회사로 넘어갈 상황이 되었다.

워낙 금액이 크다 보니 금융비용도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그래서 SH물산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것이다.

“금 년 내로 지분 매입이 전부 끝나지 않는다면, 저희는 가진 지분을 분할매도 해서라도 전부 정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되면 사업장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이사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 회사에 SH물산이 지분을 쪼개서 매도하게 된다면,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사업은 물 건너가게 된다.

사공이 여럿인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리 만무한 것이다.

시간을 두고 그들 지분을 차례로 매입한다?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동안 KCA의 자본이 조 단위로 묶여있는 자체가 천문학적인 손실이었으며, SH로부터 지분을 매입한 투자사에선 산값보다 훨씬 비싸게 팔려고 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SH물산이 통보한 기한이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프로젝트 총괄 이사인 송주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 남아있는 시간 내로 어떤 수를 내지 못한다면, 그가 옷을 벗는 것을 떠나 회사가 망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후우…….’

그가 만약 단순한 전문경영인이었다면, 회사가 망하고 옷을 벗게 되더라도 이렇게까지 절박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회사에 꽤 큰 지분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오너이기도 하였다.

앞이 캄캄할 정도로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송주빈 이사는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관계사 대표들도 만나보았고, 연고 없는 글로벌 투자사에도 무턱대고 들이대 보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한 주빈은, 어깨에 힘이 쭉 빠진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힘없이 이사 실에 앉아있던 그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이사님,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 오늘 잡혀있는 일정이 있던가?”

그는 다름 아닌, 최근 가장 핫한 청년 사업가이자 디자이너.

[서우진 대표님과 오찬 약속이 있으셨습니다.]

“아……! 그랬지. 내 정신 좀 보게.”

WJ 스튜디오의 대표, 서우진이었다.

* * *

송주빈은 WJ 스튜디오의 대표 서우진을, 오래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서우진의 디자인으로 지금 짓고 있는 마곡 컨벤션센터의 착공식에, 주빈 또한 참석했었으니 말이다.

LTK금융그룹은 KCA인베스트먼트의 관계사이기도 했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참여했던 그 착공식에서, 우진과 명함교환을 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주빈은, 우진과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었다.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했음에도 예의 발랐던 우진은 첫인상이 무척이나 좋게 남아있었지만.

업계가 워낙 다르다 보니 엮일 일이 또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약속은 좀 생뚱맞은 것이었다.

일단 미팅을 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체 서우진이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서우진이 대체 날 왜 보자고 한 걸까?’

하지만 그 의문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고작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이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잠시 나누던 우진이, 폭탄 같은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송주빈을 얼어붙게 만든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저는 오늘 이사님께, 삼성동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의 설계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왔습니다.”

삼성동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

줄여서 SGBC라고 불리는 이 사업장에, 설계자가 아직 선정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서우진 정도 되는 실력자가 설계권을 원한다는 건, 시행자의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단, 사업장의 진행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일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건…….”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송주빈은,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우진이 어디까지 알고 온 것인지.

정말 사업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와서 설계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 청년에게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지면서,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진쯤 되는 인물이 가볍게 이런 자리에 왔을 리 없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고.

송주빈의 눈에 비친 우진은,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주빈은 차분히 설명하였다.

그로서도 SGBC가 우진의 디자인‧설계 하에 멋지게 지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혹시 서 대표님께선,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어디까지냐는 말씀은…….”

“프로젝트 상황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진은 주빈의 예상대로, 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빈은 대화가 이어질수록,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까지나 많은 부분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 자리에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상황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지금 설계권을 논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잘 이해해야 정상이었으니까.

“서 대표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사업권 자체도 표류 중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서 대표님 정말 좋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

“설계권을 WJ 스튜디오에 드리려면 일단 뭔가 계획이 확실해져야 하는데, 시행사도 갈갈이 쪼개진 이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진행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괜히 서 대표님까지 엮이시면, WJ 스튜디오에도 정말 골치 아픈 상황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주빈의 그 의아함은, 우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우진이 얼마나 철저하고 치밀한 사람인지 그가 미리 알았더라면.

반대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방법이 있기 때문에 움직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차분한 목소리로 우진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을 때.

“당장 삽을 뜰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동진 투자증권에서 헐값에 매입하려 하는 그 지분, 저희 WJ 스튜디오에서 대신 매입하겠습니다.”

“네……?”

주빈의 동공이 격렬히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문제가, SH물산이 사업장에서 손 떼면서 생긴 것 아닙니까. SH그룹에서 지분을 팔아버리면, 시행사가 여러 곳으로 쪼개지고……. 그 많은 사업자들이 원하는 사업 방향성이 같은 방향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SH그룹에서 매각 중인 지분 절반을 제가 사겠습니다. 나머지 절반 정도는 KCA인베스트에서 매수해 주십시오.”

송주빈 이사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SH그룹 지분의 절반이라 함은 2400억 정도다.

이 또한 어마어마한 거액임은 분명했지만, 4800억이라는 액수와 비교하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정도라면 해외 사업장 몇 군데 매각하더라도…….’

지금까지는 절반 정도의 지분을 매입하더라도 방법이 없었다.

무리해서 그 정도를 매입해 봐야 나머지가 다른 투자사에 넘어간다면.

사공이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이 나머지 지분을 가져가고 SGBC사업에 힘을 더 실어준다면?

주빈은 이 절망적이던 상황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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