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67화 (267/315)

267화

사냥꾼과 사냥감

<천년의 그대> 드라마가 번외 편까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면서.

KSJ엔터테인먼트는 한창 분주하게 막바지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K전자에서 PPL 요청했던 건, 이번 주 방송에 나가는 거 맞죠?”

“맞습니다, 대표님.”

“광고비는 들어왔죠?”

“네. 지난주에 들어왔습니다.”

“이번 주가 진짜 마지막이니까, 다들 신경 좀 더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촬영은 물론 방영까지 다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KSJ엔터가 바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천년의 그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KSJ엔터의 자산으로 소화해 내기 위해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단순히 PPL 등으로 벌어들이는 수익금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드라마로 인해 일약 스타가 된 소속사 배우들을 완전히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한들, 시간이 지나면 대중에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렇게 인기가 식기 전, 민우 등의 소속사 배우들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민우야 섭외 들어온 예능만 열 개가 넘으니 골라 가면 될 것 같고……. 가능하면 재영이나 소영이도 끼워 넣어야겠어.’

그래서 KSJ엔터의 대표이자 거의 모든 영업을 직접 하는 소정은, 요즘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다.

물론 물리적으로 바쁘고 힘든 것과 별개로, 언제나 활력은 넘쳤지만 말이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리고 있는 상황에서, 힘이 넘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임 감독님 오셨지?”

“네, 대표님.”

“식사는 예약해 뒀고?”

“넵. 그……. 지난번에 한식집으로 예약해 뒀습니다.”

“좋아. 그럼 난 다녀올게.”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대표님!”

“유정 씨도 밥 맛있게 먹어!”

<천년의 그대> 제작진과 점심 약속을 가기 위해, 오늘도 기분 좋게 대표실을 나선 소정.

“대표님, 왜 이렇게 늦어요?”

“아니, 오전 회의 끝나고 바로 튀어 왔구만. 늦긴 뭘 늦었다고 그래요?”

“갈비탕 시켜놨어요. 괜찮죠?”

“오늘은 비냉이 좀 땡기긴 했지만……. 뭐 좋아요. 갈비탕도 맛있지.”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기분 좋은 상황에서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동업자’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결과물을 함께 만들었으며, 그 누구보다 그녀에게 큰 의지가 되는 사람.

“음, 오늘도 이 뉴스 또 나오네.”

“뭐요?”

“그……. 서우진 대표님 뉴스요.”

“아…….”

함께 고생하여 달달한 과실을 따 먹어야 할 이 시점에,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고생 중인 우진이 항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건축가협회서 어제 고소장 날렸나 보더라고요.”

임수호 감독의 말에, 소정이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고소장이요?”

“네. 설계 공모에 참여한 스무 개 설계사무소 대표로 서 대표님 고소했다던데…….”

“……!”

“잘 좀 해결됐으면 좋겠네요. 진짜 고생 많으시겠네…….”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셀럽이 된 우진의 비리 스캔들로, 근 일 주일 동안 떠들썩한 언론과 네티즌들.

우진을 욕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마음이 아프고 왠지 모르게 미안한 소정이었다.

‘우리 서 대표님 상처 많이 받으시겠는데…….’

소정은 우진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아니,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별개로, 우진이 그럴 위인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다.

‘아마 나였더라면 화를 참기도 힘들었겠지.’

그래서 소정은, 우진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도 오히려 우진은 의연하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의 귓전으로, 유인건 피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이거, 이번 주 방영분 때문에 저희까지 불똥 튀는 건 아니겠죠?”

“불똥이요?”

눈을 살짝 치켜뜨는 소정을 보며, 유인건 피디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다른 뜻은 아니고……. 만에 하나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거죠. 이번 주 수요일 방영분에 서 대표님 카메오로 나오잖아요?”

“…….”

“만약 서우진 대표가 비리로 진짜 엮여 들어간다면, 저희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유인건의 말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소정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잘라버렸으니 말이다.

“그럴 일 없고,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

“서 대표님 덕 많이 봤는데, 뭔가 상황이 더 악화된다면 오히려 저희가 도와드려야죠.”

“그, 그야 그렇지만…….”

“대책이라는 게 뭔데요? 서 대표님 출연 장면을 편집이라도 하자는 건가요?”

소정의 차가운 목소리에, 유인건 피디는 물론 임수호 감독까지도 당황했다.

사실 유인건 피디의 이야기가 정 없어 보일 수도 있는 건 맞았지만, 두 사람이 생각할 때 못 할 이야기를 한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임수호 감독도 우진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우진이 출연하는 장면을 편집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진에 대한 여론이 더 안 좋아진다면, 우진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방영분이 논란이 될 여지는 충분했다.

아삭-

소정은 말없이 깍두기를 하나 집어 먹었고,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임수호 감독이, 멋쩍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소정의 반응으로 볼 때, 두 사람이 생각했던 제안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자, 이 얘긴 그만하시고, 원래 하려던 프로모션 이야기나 좀 시작해 보시죠.”

“네, 좋아요.”

“그럽시다.”

임수호 감독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화제는 완전히 전환됐지만, 소정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였다.

‘오늘 퇴근하면, 전화라도 한번 드려봐야 하나…….’

마음 같아서는 오랜만에 성수동으로 퇴근해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었지만, 우진이 지금 얼마나 바쁠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음식점 구석의 TV에서는, 속보가 새로 떠오르고 있었다.

[<속보> WJ 스튜디오의 서우진 대표, 감사결과 비리 사실 전혀 없어.]

[대형 로펌에 컨택한 WJ 스튜디오. 건축가협회를 ‘무고죄’로 고소]

* * *

무고죄란.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고발하는 죄이다.

한 마디로 쉽게 정의한다면 ‘허위신고’인 셈.

타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이 범죄는 사법적으로도 꽤 중범죄에 속하는 것이었다.

씌워진 누명의 정도에 따라 죄질도 달라지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강제추행’ 같은 강력범죄와 법정형이 비슷할 정도였으니까.

우진이 처음 팠던 함정이 바로 이것이었다.

건축가협회에서 확신을 가지고 우진을 먼저 고소하기 전까지, 참고 인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 건축가협회에서 훼방을 놓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우진의 목적은 그들이 허탕을 치고 물을 먹게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감사가 시작되고 언론플레이까지 하는 행태를 보고 있자니, 우진도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민사소송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많은 자원을 소모해야 하는 일인지 잘 아는 우진이었지만.

그런 귀찮음을 감내하고라도 이번 기회에 참초제근을 결심한 것이다.

하여 건축가협회에서 고소장이 날아왔을 때, 우진은 두 주먹을 불끈 쥘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왔네.”

우진의 말에, 진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네 말대로 됐네. 어떻게 사실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고소까지 때릴 수 있지?”

우진이 피식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뭘?”

“지능문제라니까.”

“하하.”

“어떻게 이 정도까지 좁은 시야를 가지고, 건축가협회 회장까지 했는지…….”

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소송을 준비하였다.

무고죄로 역고소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건축가협회에서 걸어온 소송에서 승소를 하는 게 순서였지만.

이렇게 특별(?)한 경우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재무실장님.”

“네, 대표님.”

“이제 감사팀에 계좌 보여줘도 될 것 같습니다.”

우진의 이야기에, 재무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답했다.

“드디어…… 됐습니까?”

“네, 그동안 버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하하, 제가 뭘요. 대표님께서 고생하셨지요.”

우진이 버티고 버티는 동안 감사도 거의 막바지인 시점이었고.

우진의 스페인 계좌가 깨끗하다는 사실만 입증되면 우진의 무죄는 곧바로 증명되는 상황이었으니.

우진이 법원에 행차할 필요도 없이, 감사원을 통해서 ‘무고’가 입증되어버리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건축가협회의 언론플레이 덕에 이번 사건에는 범국민적인 관심이 모여 있었고.

때문에 국가 감사원에서 ‘무고’를 증명해준 것이 언론에 보도되는 순간, 건축가협회에서 고소를 강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것이 ‘무고죄’를 명분으로 한 우진의 역고소가 곧바로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윤 실장님. 보도자료 뿌릴 준비 다 끝나셨죠?”

“네, 대표님. 준비는 지난주에 다 끝났습니다.”

“윤 실장님께선 참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핫, 별말씀을.”

“이제 한번, 판을 뒤집어 보죠.”

사실 인맥이라면, 우진도 건축가협회 못지않게 빵빵하게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사냥감이 덫을 밟는 것을 기다려야 했기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미리 준비해놓은 화력은, 오히려 건축가협회의 언론플레이를 아득히 넘어설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정계나 공직계에는 권주열의 인맥이 더 많을지언정.

방송가와 언론 쪽에는 우진의 인맥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그래서 우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언론은 일제히 건축가협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이번 사건만 가지고 언론플레이를 했느냐?

우진은 그 정도로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번 성수지구 통합설계 때 정리해뒀던 히스토리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건축가협회에서 자행해 온 수많은 불합리한 행태들을 언론을 통해 폭탄투하 해버린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우진에게 고소장이 도착한 시점으로부터 고작 한나절 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진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딸깍-

우진이 준비해 뒀던 마지막 메일을 언론사에 쏘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에서 우진의 서류업무를 돕던 진태가 탄성을 터뜨렸다.

“와……. 이걸 이렇게까지 준비해 뒀던 거야?”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끝장을 본다고 했잖아.”

“진짜 끝장을 봤네.”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아마 저쪽에서는 어떻게 대응도 못 할거야.”

“그렇겠지?”

“내가 감사에 언론공격에 멘탈 터졌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우진의 이야기에, 진태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진태가 옆에서 보기에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는지 신기한 수준인데.

우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격까지 준비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예상할 수 없을 터였다.

“흣차.”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트를 둘러 걸친 우진이, 가방을 챙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국내에서 손에 꼽을 만큼 커다란 로펌의 실무자와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로펌은 어떻게 컨택한 거야?”

진태의 질문에, 우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재무실장님이 도와주셨지.”

“그런 대형 로펌이 그냥 연락한다고 움직여?”

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연락했겠어? 떡밥을 같이 던졌지.”

“떡밥?”

“이게 사실, 이길 수밖에 없는 재판이잖아.”

“그렇……지?”

“거의 공짜 수임료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어?”

“아하.”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진태를 향해, 우진이 한 마디 덧붙였다.

“황종호 어르신 인맥을 조금 빌리기도 했고…….”

진태와 함께 사무실을 나선 우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사를 통해 몇 번 접했었던, 탐욕이 득실거리는 권주열의 얼굴.

‘아마 한두 시간 내로, 그 사람 귀에도 소식이 들어가겠지.’

업계 안에서만큼은 항상 절대 갑의 위치에 있던 협회장 권주열이, 이 역풍을 마주했을 때 어떤 표정이 될지 우진은 너무 궁금했다.

가진 것이 많고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직면했을 때, 더욱 크게 절망하고 좌절하는 법이었으니까.

“네 변호사님. 지금 막 시동 걸었습니다.”

그리고 우진이 로펌으로 출발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우진의 예상보다 더 빨리 이 소식을 접한 권주열은, 뒷목을 잡고 자리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혀, 협회장님!”

“밖에 누구 없어?”

“119 불러! 빨리!”

골든 프린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