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2012년의 가을
12월 5일, 수요일 저녁 10시.
쏟아지는 관심 속에서, 새로운 수목드라마가 첫 방영을 시작하였다.
2012년 여름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이슈 몰이를 했던, 연예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을 받았던 드라마 <천년의 그대>.
저녁 10시가 되어갈 즈음, 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TV 앞에 앉았고.
그 사람들 중에는 당연히 우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 우진은 7시에 칼같이 퇴근하였고, 퇴근 후 곧바로 신사동에 와 있었다.
우진은 오늘 지인들과 함께, 유리아의 가로수 길 <카페 프레스코>에서 <천년의 그대>를 함께 시청하기로 오래전부터 약속했었으니까.
유리아의 카페 프레스코는 여전히 손님이 많았지만, 그래도 오픈 초기만큼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유리아는 오늘을 위해, 가장 자리가 적은 꼭대기 루프탑을 비워두었다.
“재엽 오빠, 왔어?”
“이야, 이게 다 뭐야?”
“뭐긴 저녁이지.”
“크……! 진수성찬이네.”
“내가 차린 건 아니지만, 여튼 맛있게 먹어.”
“니 돈으로 차린 거면 그게 네가 차린 거지 뭐.”
“하긴 것도 맞는 말이네.”
“야, 서우진. 넌 오랜만에 형 봤는데 인사도 안 하고 치킨 뜯고 있냐?”
“아니, 입안에 음식이 있는데 인사를 할 수는 없잖아? 빨리 와서 먹기나 해. 리아 누나가 너무 많이 시켰어.”
오늘 리아의 카페 프레스코 루프탑에 모일 사람들은 총 일곱 명이었다.
리아와 우진, 재엽과 수하.
그리고 무려 <천년의 그대> 주인공인 민우, 하영과 리아의 친한 친구이자 여배우인 윤진까지.
어쩌다 보니 하영은 오늘 모인 멤버들과 조금씩은 다 친분이 있었고, 특히 비슷한 연배의 배우인 윤진과는 꽤 친한 사이였던 탓에, 갑작스레 오늘의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수하는 언제 온대?”
“아홉 시 좀 넘으면 도착한다던데?”
“그, 윤진이랑……. 성하영 배우님은?”
“하영 언니는 민우랑 같이 올 거야. 이제 곧 도착할 때 됐어.”
“그렇군.”
먼저 도착한 우진과 재엽은 리아와 기분 좋게 떠들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고.
그러는 동안 나머지 인원들도 전부 도착해 자리에 모였다.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오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민우와 하영이 도착했으며…….
“제가 조금 늦었죠?”
“민우 왔어?”
“뭐,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도착했으면 됐지. 이쪽으로 앉아.”
“하영 배우님, 오랜만입니다. 하하.”
“엇, 재엽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선배님은 무슨, 말 편하게 해요.”
“오빠가 먼저 말 편하게 해야 언니도 편하게 하지.”
“앗, 서 대표님 와계셨어요?”
“퇴근하고 배고파서 좀 일찍 왔습니다. 하하.”
두 사람과 앞에서 만난 수하도 함께 들어왔다.
“뭐야, 재엽 오빠. 나는 안 보여?”
“재엽이 형한테 인사씩이나 바라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치킨이나 뜯어.”
“역시 우리 우진이밖에 없다니까.”
늦게 도착한 사람들도 일정이 바빠 딱히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는지.
원탁에 둘러 놓인 빈백에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아, 치킨을 비롯해 다양하게 세팅된 음식들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들 분위기에 적응하여 웃으며 맥주잔을 반 잔 정도씩 비웠을 즈음.
벽에 크게 걸려있는 스크린에, 드라마 <천년의 그대>의 인트로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어, 시작한다!”
리아의 목소리에 떠들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을 향해 돌아갔고.
그 순간 대문짝만하게 확대된 자신의 얼굴 때문인지, 민우는 조금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민우의 표정이 재밌었는지, 재엽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이야, 우리 민우 잘생겼네.”
“민우 잘생긴 거 이제 알았어?”
재엽의 농담에 다들 웃음 지었고, 그 뒤로 리아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그 이후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제 슬슬 드라마가 시작되다 보니, 모두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민우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리아가, 슬쩍 그를 향해 물었다.
“민우, 느낌 어때?”
“응?”
“드라마 말야. 대박 날 것 같아?”
리아는 별생각 없이 의례적으로 물어본 것뿐이었지만, 민우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오……?”
“드라마 진짜 재밌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민우의 이 대답에, 리아 뿐 아니라 바로 옆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윤진까지도 동시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드라마 진짜 잘 나왔나 보네?’
‘민우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평소에 민우와 친분이 있는 두 사람은 그의 성격이 비교적 소심한 걸 알고 있었는데.
드라마의 흥행 여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답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영은 눈을 반짝이며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것은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잠시 후.
<천년의 그대> 1화의 방영이 시작되었다.
* * *
한편 드라마 방영이 시작된 그 시점.
기대에 차 드라마를 시청하기 시작한 우진 일행들과 달리, 손에 땀을 쥐고 TV 앞에 앉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KSJ엔터의 대표 소정과 드라마 제작사인 미디트리(MediTree)의 관계자들이었다.
물론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인 민우나 성하영 또한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가지고 본방을 시청 중이겠지만, 제작진이 느끼는 긴장감은 그것과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일반적인 제작 스텝들이라면 모르되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드라마에 최소 수억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헤드 들이었으니 말이다.
드라마에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컨트롤타워라고 할 수 있는 강소정과.
미디트리의 대표인 유인건 피디. 그리고 우민철 KBC 전 드라마국 국장.
여기에 현장에서 직접 드라마를 촬영한 임수호 촬영감독까지.
이들은 전부 KSJ엔터 사옥에 모여있었고, <천년의 그대> 첫 방영을 숨죽여 시청 중이었다.
물론 매주 방영되는 ‘연속극’의 특성상,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가 유지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첫 방영분의 시청률과 반응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시청자가 유입되는 규모가 달라지는 것이었으니.
다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피디님, 숨 쉬고 있는 거 맞죠?”
“그러는 강 대표는, 손을 왜 이렇게 떨어요?”
“떠, 떨긴요. 누가?”
“대표님요.”
“…….”
“거 드라마 재밌게 보고 있는데, 시끄럽게 굴지 맙시다 들.”
“아니, 우 국장님.”
“네?”
“입술이 바짝 마르신 것 같은데, 드라마 제대로 시청하고 계셨던 거 맞아요?”
“흠. 크흠!”
처음 드라마가 시작됐을 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제대로 드라마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 드라마의 성패에 <미디트리>라는 회사의 존폐까지 달려 있었으니.
화면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어느 정도 스토리가 전개되기 시작하자.
다들 천천히 드라마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
촬영감독인 임수호를 제외하면 완결된 영상을 시청해 본 사람은 없었으니.
스토리를 다 알고 있다 해도, 슬슬 드라마의 재미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 연출 좋은데?”
“임 감독. 저거 자네 아이디어야?”
“흠흠. 영상 잘 뽑혔죠?”
<천년의 그대> 첫 방영분의 내용은, 남자주인공 서후가 기억이 돌아오기 전 여자주인공 인서의 환생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천년 전의 기억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끌리며, 일상적인 사건들에 휘말리는 풋풋한 스토리들.
아직 두 사람 사이의 인연에 대한 떡밥은 전혀 풀리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성 간의 끌림이 담긴 풋풋한 감성만으로도 화면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휘어잡고 있었다.
주인공인 민우와 하영의 연기가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스토리에 어느새 몰입해 시청하던 소정은, 문득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재밌어. 아니, 재밌나……? 재밌는 거 맞겠지? 난 재밌는데…….’
소정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첫 방영분의 스토리는 빠르게 흘러갔다.
문득 고개를 들어 확인한 시계는, 벌써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
60분이 넘는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소정은 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드라마가 재밌어서인지,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해서인지.
그 이유는 소정도 알 수 없었다.
“강 대표님 뭐 해요?”
“네?”
“아까부터 그렇게 폰을 만지작거리시네.”
유인건 피디의 말에, 소정은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방송국 주조정실에서는 어느 정도 시청률 데이터가 뽑혀있는 상황일 터.
친분이 있는 방송국 PD 하나에게 데이터가 뽑히는 대로 전화 좀 달라고 미리 언질을 해 뒀으니, 소정은 본능적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첫 방영분의 클라이막스가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인서에게 왜 끌리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당황하던 서후.
폭우가 몰아치는 연출과 함께 서후가 기억을 잃었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천 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 도래했고.
‘서후’의 머릿속에 잃어버렸던 기억이 하나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인서……! 인서였구나……!]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 남자주인공 서후.
민우는 그런 서후의 내면을 완벽히 연기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과거의 몇 가지 장면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크린을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인세와 천계를 잇는 문.
천신탑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년의 그대> 첫날 방영분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소정도, 이 마지막 10분만큼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였다.
민우의 감정연기부터 시작되어, 물 흐르듯 과거에 대한 떡밥이 풀리는 흥미진진한 연출.
‘서후’가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조금씩 스쳐갔던 천신궁의 신비로운 모습과,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천신탑의 모습까지.
이 장면들을 시청하는 동안 만큼은 소정 또한 모든 걱정들을 잊고 멍하니 드라마를 시청하였으며.
그래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박…….”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소정뿐만이 아니었다.
이 영상을 두 번째 보는 촬영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드라마 방영분이 끝나고 엔딩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이 때문인지, 소정은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와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님! 대박 났습니다! 대박이에요!]
[첫방 최고시청률 30퍼센트가 넘었다고요!]
[대표님.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저기, 대표님?]
그 메시지 안에, 그녀가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그 내용이 담겨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