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부정(否定)하는 것과
부정(不正)한 것
차라리 첫 번째 순서가 우진이 아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조금은 더 나았을까?
이것이 발표를 마치고 내려온 준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젠장…….’
준호는 알 수 있었다.
오늘 발표는, 완전히 망가졌다.
애초에 설계‧디자인 퀄리티에서 큰 차이가 난 것도 문제였지만, 멘탈이 완전히 흔들려 버린 게 더 커다란 문제였다.
가까스로 발표를 마무리 짓기는 했으나,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아쉬운 발표였다.
준비한 것들조차도 깔끔하게 다 보여주지 못했던, 그런 발표였으니까.
마지막 이야기를 마치고 청중들을 둘러보았을 때.
그들의 표정만 봐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컨퍼런스 홀을 가득 채웠던 인원의 절반 정도가 이미 자리를 빠져나간 상황이었으며.
남아있는 사람들도 그저 심드렁한 표정이었으니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발표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자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발표가 끝났으니 박수를 쳐주기는 했지만 그뿐.
오늘의 발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조합원들 중에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준호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내색 않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아니, 본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준호의 얼굴은 이미 꺼멓게 죽어 있었으니까.
자리에 다시 앉은 준호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저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이미 당선작은 내 설계로 내정돼 있던 공모야. 결국 승자는 나라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 한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준호는 가까스로 그것을 눌러 삼켰다.
오늘의 공모를 위해 그가 쏟아부은 노력과 비용을 생각하면,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설계와 디자인에 투입된 인력들의 인건비도 인건비였지만, 권주열을 따라다니며 국토부 인사들을 접대하는 데 들어간 비용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던 도중, 겨우 붙잡아 둔 멘탈을 산산 조각내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별다른 감정조차 담겨있지 않은 담담한 우진의 목소리.
“발표 잘 들었습니다, 김 대표님. 고생하셨네요.”
그러나 그 한 마디는, 김준호의 멘탈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서울시청에서 열린 오늘의 설계 공모 발표 행사는, 이 자리에서 모든 결과가 결정되는 행사는 아니었다.
현장에 나온 심사위원들이 각자 매긴 점수가 사업 시행 위원회에 올라가게 되고.
거기서 최종적으로 ‘투명한’ 점수집계가 이뤄진 뒤 며칠 뒤에 입찰결과가 발표 나게 되는 시스템인 것이었으니까.
여기서 ‘투명하다’는 것은, 사실 조금 아이러니한 부분이었다.
애초에 외부에 공개되는 것은 각 심사위원들의 공모점수일 뿐, 그 점수가 어떤 식으로 산정되었는지는 결국 심사위원들의 주관에 달린 부분이었다.
그리고 김준호가 끝까지 믿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심사위원 열 명 중 여덟 사람이 정부 부처 관계자야. 내가 떨어질 리가 없어.’
심사위원은 총 열 명이었고, 이 중 서울시청의 직원이 4명, 국토부 관계자가 4명이었다.
민간위원인 남은 두 사람을 제외하더라도, 과반수 이상의 지지는 무조건 얻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국토부와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서울시는 어지간하면 국토부에서 밀려고 하는 설계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준호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었다.
“서 대표. 아직 이십 대라고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모든 발표가 끝난 뒤.
컨퍼런스 홀 앞에서 잠시 우진과 마주한 준호.
발표가 끝난 뒤 우진에게 들었던 한 마디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던 준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우진에게 한마디를 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는 알기 힘들겠지만, 세상에는 결코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사실들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조카뻘이나 다름없는 우진에게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했으니.
이렇게 한마디라도 하고 가지 않는다면 분해서 몇 날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던 것이다.
“불편한 사실이라……. 이를테면요?”
우진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준호의 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그 ‘불편한 사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쪽은, 우진이 아니라 준호인 것 같았으니까.
옅은 웃음까지 띄고 있는 우진의 표정을 확인한 탓인지, 이어진 준호의 말에서는 억눌린 화가 느껴졌다.
“때로는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이번 공모의 결과를 보고, 서 대표가 너무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기에 충고하는 겁니다.”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건만.
준호 마지막 한마디를 들은 우진은, 결국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준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우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오늘 공모전에 어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할 거라는 이야깁니까?”
준호가 이를 악문 채 답했다.
“역시……. 머리는 잘 돌아가시는군요.”
우진은 더욱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이 말인즉, 자신의 부정(不正)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 거지?’
때문에 우진은, 상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말의 존중조차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당황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본데…….’
그래서 우진의 표정에는, 대 놓고 준호에 대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김 대표님.”
“왜, 이제 좀 현실이 와 닿으십니까, 서 대표님?”
우진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대표님께선 본인의 부정(不正)에 대해서는 부정(否定)하지 않으시면서……. 대체 왜 현실은 부정하시는 겁니까?”
“뭐요?”
우진이 목소리를 좀 더 낮춰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듯하지만, 김 대표님께선 지금 제게 실력으로 지셨습니다.”
“……!”
“그리고 곧 한 가지 더 알게 되실 겁니다.”
아예 말문이 막혀버린 준호를 향해, 우진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어떤 외적인 역량을 동원하시더라도, 오늘의 결과는 극복하실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놓고 비웃는 우진을 보며 준호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대꾸하였다.
“그야, 며칠 뒤에 보면 알겠지.”
더 이상 나눌 대화조차 없다는 듯.
우진은 걸음을 돌리며, 준호가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김 대표님께선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세상에는 결코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사실들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 * *
김준호가 이렇게 우진의 앞에서 멍청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사실 그가 정말 바보라서는 아니었다.
일단 멘탈이 산산이 조각나 감정제어가 잘되지 않은 것도 영향이 있겠지만.
그보다 우진이 깔아둔 판들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맞았다.
애초에 이 설계 공모라는 판 자체가 우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부터 당연히 몰랐으며.
우진이 건축가협회를 등에 업은 자신 이상으로 더 강력한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오늘의 발표가 SNS를 통해 퍼져나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알지 못했었다.
└ 와, 발표 대박이다. 이게 강변북로 지하화하면서 새로 개발되는 성수지구 설계 공모라고?
└ 디자인 설계 공모가 이런 거였구나……. 대박. 멋있어.
└ 이거 보니까, 나도 건축해 보고 싶다……. 지금이라도 전과 한번 해봐?
└ 서 대표님! <우리 집에 왜 왔니> 다시 나와 줘요! 보고 싶어!
└ 조만간 한 번 나온다던데?
└ 진짜?
└ 지난주 방영분에서 떡밥 나왔잖음.
└ 오오……! 대박!
└ 와, 저기 분양 안 하나? 서우진이 지은 집에 나도 살아보고 싶다.
└ 청담 클리오 ㄱㄱ
└ 거기도 서우진이 디자인한 아파트였음?
└ 그럴걸?
└ 거긴 너무 비쌈.
└ 성수도 싸진 않을걸…….
서울시에서 라이브로 스트리밍한 영상은, 댓글만 이미 수천 개가 넘게 달려 있었다.
실시간 최대 시청자가 숫자 5만 명이 넘었으니, 조회수는 이미 십만 단위가 훌쩍 넘어 있었으며.
달려있는 댓글의 대부분은 서우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 잘생겼다 서우진!
└ 잠깐. 이거 유리아 계정 아니야?
└ 미친! 진짜다! 진짜 유리아다!
└ 리아 누나, 팔로워 신청 좀 받아줘요 ㅠㅠ
└ 언니, 서 대표님이랑 예능 한번 나와 줘요 ㅠㅠ 케미 다시 보고 싶어…….
└ 으아아! 유리아다!
대부분이 긍정적인 댓글들 가운데 간혹 부정적인 댓글이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거의 다른 발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 이게 설계 공모라고?
└ 그렇다는데? 왜?
└ 아니, 이럴 거면 그냥 서류심사에서 서우진 뽑고 끝내지.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 ㅋㅋㅋ그건 그러네.
└ 서우진 뒤로 조금 더 보다가 껐음. 두 번째 발표자는 거의 대학교 과제 수준이던데.
└ ㅋㅋ 그건 좀 과장이고. 디자인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그냥 서우진이랑 너무 비교돼서, 말도 더듬고 좀 불쌍하더라.
└ 그 뒤는 좀 괜찮은가?
└ 아니, 그 뒤 순서도 비슷함.
└ 네 번째 발표자는 아예 기권한 것 같던데?
└ 기권?
└ 발표장에 오지도 않았더라고.
그리고 한 편에는, SNS에 새로운 컨텐츠를 업로드한 서울시에 대한 칭찬 글도 있었다.
└ 서울시 SNS 관리자 열일하시네.
└ 이런 거 자주 올려주세요! 개발계획 공시 띄워둬도 일반 시민들은 잘 확인도 안 한다고요!
└ 맞아, 맞아. SNS에 이런 거 올라오니까, 개발소식도 알게 되고 좋은데?
댓글 창에는 정말 다양한 네티즌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상을 시청한 모든 사람들이, 이미 이 공모의 당선자를 서우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
└ 이거 공모결과는 언제 나온대?
└ 몰라? 근데 그건 알아서 뭐하게.
└ 궁금하잖아.
└ 궁금할 거 있나. 어차피 서우진인데.
└ 하긴. 이 발표 보고 다른 놈 뽑아주면……. 그게 말이 안 되긴 하네.
└ 다른 놈 뽑히면 서울시 심사위원 비리 조사 해봐야 함. 대체 여기서 서우진 말고 누굴 뽑냐?ㅋㅋ
때문에 이제 이번 설계 공모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눈 딱 감고 준호를 밀어준 뒤, 입을 싹 닫아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사실을, 준호는 사무실에 다시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스마트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으니까.
[김준호,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지?]
“네? 협회장님, 그게 무슨…….”
[인마, 말아먹어도 적당히 말아먹었어야지!]
“……!”
[방금 후배 놈한테 연락 왔다.]
“무……슨 연락 말씀이십니까?”
[어지간하면 작업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답이 없다더라.]
“그, 그럼…….”
[어떻게 넌, 내가 밀어줘도 새파랗게 어린놈 하나 못 잡냐?]
“시, 심사 결과가 벌써 나온 겁니까?”
[심사는 얼어 죽을. 너 때문에 내 체면까지 싹 다 구겨 먹었어! 어쩔 거야 자식아.]
권주열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끊은 뒤, 준호는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한나절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루 사이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
이제 이번 공모로 인한 손실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진 준호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