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부정(否定)하는 것과
부정(不正)한 것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조합원인 김 씨는, 오늘 시청에 방문하였다.
오늘 시청에서, 미래에 그의 집이 될 설계에 대한 발표가 있었기 때문.
사실 그는 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개발사업에 무척이나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낙후됐다고는 하지만 이 성수지구는 그의 수십 년 인생이 담긴 삶의 터전이었고.
이 모든 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들을 들여온다는 자체가, 일흔이 넘어가는 김 씨에게는 부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1지구에 지분이 있던 그는 작년 겨울까지만 하더라도, 비대위에 속하여 개발사업을 지속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곽홍식’이라는 인물을, 만나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선생님께선, 이 개발사업을 왜 반대하십니까?”
“그야, 내 삶과 추억이 담긴 이 공간이 망가지는 것을 보기 싫어서요.”
“추억이 왜 망가진다고 생각하십니까?”
“…….”
“낡은 것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불편한 것을 더 편리함으로 교체하는 과정……. 이 또한 추억의 일부라고 생각해주실 수는 없으시겠는지요.”
이제까지 조합설립 추진위원회라는 곳에서 설득을 위해 나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의 논리만을 들이댈 뿐이었다.
이제까지 개발되어 온 다른 지역의 사례들을 가져오면서, 김 씨가 가진 집이 신축되어 새 아파트가 되면 얼마나 비싼 값에 팔릴지에 대한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하던 것이다.
물론 개발사업에 돈의 논리가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당장 김 씨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지분이 작은 사람들보다 손해를 보는 것이 못마땅하여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김 씨는, 이렇게 자본의 논리만 들이대는 사람들에게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개발은 진행될 거고, 동의서를 주시지 않으면 어르신께서만 손해를 보십니다.”
“일 없다니까.”
“현금청산까지 계속 버티시렵니까?”
“내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끝까지 개발을 거부하고 있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온 홍식이라는 인물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낡은 추억은 결국 오롯이 선생님만의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지요.”
“으음…….”
“하지만 변화와 새로움까지 추억의 일부로 포용해 주신다면, 그것은 자녀분들께 또 다른 추억이 되어 남을 것입니다.”
“허허.”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리고 나자, 사업성과 관련된 부분들까지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강 건너 청담 선영아파트,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신축에 들어갔다지요?”
“아직 공사 중이긴 하지만……. 여기 브로셔를 보시면, 이렇게 멋진 아파트로 짓고 있습니다.”
“허어…….”
“그리고 제가 이곳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합장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성수 전략정비구역도, 선영아파트 못지않게 멋진 곳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
“한번 믿고 맡겨줘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곽홍식의 나이가 김씨와 크게 차이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의 말에서 진정성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김씨는 결국 동의서에 싸인을 하였고, 홍식을 신뢰해 보기로 하였다.
청담선영아파트 자리에 새로 지어질 클리오 써밋 아파트처럼.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재개발 또한, 그런 멋진 건축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기에 김 씨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기도 했다.
이제껏 살아왔던 낡은 성수동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새롭게 탈바꿈될 미래의 성수동에도 그만한 애정이 생겼는데.
어떻게 보면 오늘 이 자리는, 홍식이 말했던 그 미래의 아름다운 성수동을 미리 엿볼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서우진이라. 저 친구가, 곽 조합장이 얘기했던 그 친구로군.’
게다가 우진에 대해 미리 조금 들었던 바도 있었으니, 김 씨는 무척이나 기대하고 발표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김 씨는 그 기대했던 것 이상을, 오늘 이 자리에서 보고 있었다.
우선 처음 눈에 들어온 조감도부터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최대한 많은 세대가 한강 뷰를 확보할 수 있게 단차를 조절함과 동시에, 한강에서부터 남산타워까지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에 어우러지도록 다양한 높이로 건축물들을 구성했습니다.”
그 설계와 프레젠테이션에서 느껴지는 사용자에 대한 배려 또한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정말 저렇게 설계가 된다면, 조합원들은 대부분 전망 좋은 고층을 분양받을 수 있겠어.’
물론 단지 커뮤니티 시설을 외부로 개방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조금 거부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강변북로 지하화로 인해 넓어진 한강공원 부지와 재개발 조합에서 기부채납하게 될 부지를 연결하여……. 대규모 복합문화시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커다란 규모의 워터파크를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설명을 듣기 시작하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울시와 구체적인 논의가 더 오가야 하겠지만, 이 워터파크의 운영은 아파트에서 관리하는 방향으로 민영화하게 될 것이며……. 공공부지를 할애하여 짓는 만큼, 거주민뿐 아니라 모든 서울시민들에게 오픈될 예정입니다. 물론 무상으로 오픈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아파트에서도 운영비용 이상을 충당해야 운영할 이유가 생길 테니까요.”
“자전거 대여소나 널찍한 카페 라운지 등, 한강공원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만한 몇몇 커뮤니티 시설들 또한 이렇게 외부 오픈 방식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들의 운영으로 발생한 수익은 아파트 관리비로 충당될 수 있겠지요.”
“물론 공공성을 띈 시설들이 될 예정이므로 단가는 비교적 싸게 책정될 겁니다. 때문에 모든 아파트 관리비 이상이 충당될 정도의 다이나믹한 매출이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입주민들의 관리비 부담을 현저히 줄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단지 규모와 워터파크 등 시설의 예상 매출액을 계산해 보면, 각 세대에서 부담해야 할 평당 관리비가 2천 원대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지표 또한, 무척이나 보수적으로 잡았음을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게다가 조합원분들께서는, 이 모든 시설들을 외부인보다 압도적으로 저렴하게 이용하실 수 있겠지요.”
“서울시민들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책임하에 쾌적하게 운영되는 시설들을 싼값에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좋고, 조합원분들께서는 그것으로 관리비 부담을 줄이실 수 있어서 좋으니. 이 또한 상생과 조화의 맥락에서 제안 드리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제안 드리는 이 설계들은……. 오로지 강변북로 지하화와 연계된 이번 성수지구 통합설계 프로젝트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제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재개발 재건축 사업장도, 이렇게까지 공공성을 띌 수 있었던 곳은 없었으니까요.”
사실 아파트 거주민의 입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커뮤니티 시설을 공유하는 것이 싫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건축부지의 대부분이 한강공원과 이어진 공공부지 비중이 높은 데다 관리‧운영으로 인한 수입이 아파트 관리비 충당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까지 데이터로 보여주니…….
거부감이 희석되는 것도 당연하였다.
‘평당 2천 원이면……. 30평대 기준으로 6만 원 수준 관리비잖아?’
게다가 우진의 설계는 무조건적으로 커뮤니티의 공공화를 지향하고 있지도 않았다.
애초에 공공화됐을 때 효율적일 만한 시설들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단지 내의 공간으로 들여 넣어 프라이빗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으니까.
심지어는 워터파크에서 단지로 이어지는 동선을 짜는 과정에서도 외부인은 접근할 수 없게 설계함으로서, 단지 내부로 외부인이 유입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하였다.
“한강공원에서 서울숲으로 직접 이어지는 생태 육교를 설계했으며, 이는 단지 산책로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도록 동선을 조정하였습니다.”
“단지 커뮤니티와 한강공원의 공공시설들이 조화를 이루되, 주거지의 프라이버시를 해치지 않으면서 최대한 장점만 가질 수 있도록 동선을 고민하였습니다.”
물론 우진의 프레젠테이션만 듣고 김 씨와 같은 일반인이, 이 모든 설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게 맞다.
하지만 김 씨는 적어도 한 가지를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서우진이라는 디자이너가 이 공간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사용자의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했고 정성을 들였으며 심혈을 기울였는지.
피티를 듣는 동안, 그 진정성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와 닿은 것이다.
‘정말 저 설계대로 지어질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김 씨 뿐만 아니라 다른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로 마련된 지정석에 앉은 백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은, 우진의 프레젠테이션을 거의 넋 놓고 듣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처음부터 워낙 수준 높은 프레젠테이션을 봐서인지, 다음 발표 순서들까지 기다려질 정도였다.
‘처음부터 이런 수준의 설계라니……. 다음 발표도 점점 더 궁금해지는구먼.’
‘모든 설계가 이런 수준이라면, 어떤 설계에 표를 던져야 할지 모르겠군.’
그런데 이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또 다른 관객석에서는 다른 종류의 고민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 *
‘하, 이거 처음부터 너무 쎈데.’
국토교통부의 실무담당자 유 사무관은, 한 시간에 가까운 프레젠테이션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발표가 끝나갈 때 즈음, 저도 모르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오늘의 행사가 끝난 뒤 설계사무소 선정 때문.
‘과장님께서 분명 <이호설계사무소>를 밀어줘야 한다고 하셨는데…….’
처음 이 부탁을 받았을 때에는, 솔직히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종류의 공공사업에서 설계사무소 선정은 그가 여러 번 해봤던 업무였고.
그때마다 느꼈던 것은, 어떤 사무소든 ‘고만고만하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사업에서도 당연히 비슷한 수준의 설계사무소들이 참가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만그만한 수준의 설계들 중에 윗선에서 밀어주고자 하는 설계를 선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WJ 스튜디오의 이 첫 발표를 들은 순간, 유 사무관은 직감할 수 있었다.
뒤에 이어질 프레젠테이션들이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 서우진이라는 디자이너의 설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유 사무관은 건축업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실무자였기에, 우진의 이 발표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대형 건설사 입찰 때도, 이 정도 수준의 피티는 본 적이 없었어.’
유 사무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우.”
일단 <이호설계사무소>라는 곳의 발표가 에서 보여준 프레젠테이션의 80퍼센트 정도라도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윗선에서 점찍은 내정자라면 어떻게든 밀려고 하긴 할 텐데…….’
하지만 유 사무관의 그러한 바램은, 잠시 후 산산조각이 나버릴 수밖에 없었다.
“서우진 디자이너님의 발표, 정말 너무 잘 들었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WJ 스튜디오에서 보여주신 이 설계대로 성수지구가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다면, 정말 멋진 공간이 될 것 같군요.”
우진의 발표가 끝난 바로 다음 순서가 바로 <이호설계사무소>의 순서였으며…….
“자, 그럼 다음 발표순서는, <이호설계사무소>에서 나오신 김준호 건축가님이십니다!”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단상 위로 올라온 김준호의 얼굴은, 이미 까맣게 죽어있었으니 말이다.
‘하…….’
우진의 멋진 발표 덕분인지.
컨퍼런스 홀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으며, 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고 단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김준호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또 어떤 멋진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볼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상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유 사무관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망했군.”
지금 단상 위에 올라온 이 남자는, 정상적으로 발표를 마무리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