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시민들이 원하는 한강
우진은 당황했다.
‘공문이라고? 갑자기?’
건축협회와 국토부 간의 어떤 관계 등에 대해 모르는 그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 공문이라는게……. 오늘 온 거죠?”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님. 회의 들어가 계시는 동안 내려온 공문입니다.”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팀장을 따라간 우진은 그의 모니터로 국토부에서 내려온 공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공문은 공모에 참가의향서를 보낸 업체들에 일괄적으로 들어온 메일이었는데, 분명히 국토부 장관의 직인이 찍혀있는 공식적인 문서였다.
“해당 지구 단위 개발 프로젝트는 서울시 개발계획 내에서도 상징성이 있는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우진이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건설업 내수증진과 사업 추진 차원에서 공공기관과 소통의 원활함을 위해, 해외에 본사 소재지를 두고 있는 해외 법인을 전부 공모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우진이 어이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생각할 땐 이 내용 자체가, 거의 헛소리에 가까웠으니까.
이게 정말 국토부의 생각이라면, 중국 공안 당국의 쇄국정책과 다를 바 없는 마인드였으니 말이다.
‘성수 사업장이 크긴 하지만, 건설업체뿐만이 아니고 설계사무소까지 해외 업체를 차단해 버린다는 게……. 내수증진에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소통의 원활함’이라는 부분은 더더욱 웃기기 그지없었다.
말은 그럴싸하게 써놨지만 결국 ‘한국말로 일하고 싶다’는 건데, 80년대도 아니고 뉴 밀레니엄 글로벌 시대에서 말도 안 되는 마인드였으니 말이다.
이 정도 규모의 사업장이면 사업비로 즉시 통번역 가능한 통역가들을 여럿 고용할 수 있을 텐데, 우진이 보기에 이 공문은 억지에 지나지 않았다.
‘대체 누구 머릿속에서 이런 어이없는 제안이 나온 걸까?’
물론 이 상황 자체는, 사업부 팀장이 이야기한 것처럼 WJ 스튜디오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 맞았다.
국내의 설계사무소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외 사무소들의 공모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면, 공모의 난이도는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게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좋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본능적으로 찜찜함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건지야 알 길이 없었지만.
보통 국가가 주체인 사업장에서 이런 당황스런 일이 발생할 때에는, 어떤 이권이 개입되어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대표님……?”
“넵?”
“혹시 어떤 문제라도 있는지…….”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던 우진이 심각한 표정이자 사업부 팀장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어봤고.
그에 우진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아,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조금 이상해서요.”
“하하,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죠.”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진의 말에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정말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번 공모는 무조건 당선시켜야겠습니다.”
“흐흐, 믿습니다, 대표님. 성수 사업장만 따내면, 내년에는 정말 회사 덩치를 확 뿔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사업부 팀장과 웃으며 대화를 좀 더 나눈 우진은, 찜찜한 마음을 덜어내고는 기분 좋게 대표실로 돌아왔다.
‘그래. 말 그대로……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처음 공문을 보자마자 느꼈던 것처럼 뭔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우진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누가 장난질 좀 친다고 해도, 내 쪽에도 방법이 없는 상황은 아니지.’
만약 일 년 정도 전이었다면, 좀 더 초조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만한 인맥이 없다면, 눈 뜨고 코 베이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이 건설업계였으니까.
하지만 우진의 뒤에는 이제 정책실장으로 부임할 황종호가 있었으며, 이번 사업을 주도하는 현 서울시장 구윤권이 있었다.
그들의 성향상 우진을 일부러 더 도와주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부당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막아주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일이나 더 열심히 하자.’
그래서 우진은 아직 확실치도 않은 어떤 상황에 대한 걱정을 하기 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힘을 쏟기로 하였다.
문제야 발생했을 때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면 되는 것.
미리부터 걱정하는 것은 우진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끼이익-
대표실로 다시 돌아온 우진은, 전화를 걸어 석현을 불렀다.
“석구, 대표실로 좀 올 수 있어?”
[무슨 일이야?]
“이번 성수 사업장. 외관 디자인 때문에 논의할 부분이 있어서.”
[알겠어. 10분만 줘.]
“오케이.”
WJ 스튜디오는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은 역시 디지털 건축과 3차원 설계에 대한 이해도.
우진은 남은 시간을 전부 쏟아부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디자인을 뽑아내기로 마음먹었다.
해외 스튜디오들이 배제된다는 유리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오히려 더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 * *
또다시 뜨거운 여름이 왔다.
12년의 여름은 꽤 후덥지근한 편이었고, 이런 날씨에 가장 힘든 곳 중 하나가 바로 공사현장이었다.
아직까지 WJ 스튜디오의 주력은 설계와 디자인이었지만, 건설사를 인수한 뒤로부터는 실제 시공 분야에서 또한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는 중이었고.
그래서 현재 WJ 스튜디오가 발을 들인 사업장은, 두 군데 정도가 있었다.
일단 첫 번째 사업장은 당연히 성수동에 있는 WJ 스튜디오의 사옥.
이제 첫 삽을 뜬 지 9개월쯤 지난 WJ 스튜디오의 사옥은, 건물의 윤곽이 거의 다 잡힌 상황이었다.
9월 말로 잡혀있는 준공 예정일에, 조금 빡빡하지만, 충분히 일정을 맞출 수 있을 정도.
어느 정도 덩치 있는 회사를 인수하여 소화시키는 과정이다 보니, 불협화음은 당연히 생겨났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진은 회사 인수를 깔끔하게 해내었고, 그로 인해 생긴 부채들도 이제 거의 정리가 되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수주를 따낸 것이, 바로 두 번째 사업장이었다.
두 번째 사업장은 사실, 아직 확정적으로 계약이 끝난 상황은 아니었다.
구두로는 이야기가 다 끝났지만, 어쨌든 도장을 찍고 변호사 공증까지 마치기 전까지는 언제든 엎어질 수 있는 게 사업이었으니까.
오늘 우진은, 그 ‘도장’을 찍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진태 형, 나 눈 좀 붙일게. 도착하면 깨워줘.”
“알겠다.”
진태의 차 조수석에 탄 우진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성수동 전략정비구역의 공모 마감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 날 밤을 새어 얼굴이 퀭했지만.
이런 와중에도 오늘 직접 움직이는 이유는, 오늘의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옥이야 따로 클라이언트가 없으니까 예행연습 같은 거였지만……. 이제는 진짜로 실전이니까.’
여기서 예행연습이라는 건, 건축 자체를 연습처럼 한다는 얘긴 당연히 아니었다.
다만 건축시공 전반에 대한 컨트롤을 직접 하는 것이 처음이었으니, 그에 대한 예행연습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공사 일정을 맞추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에 임기응변하는 등.
오너로서 해내야 하는 여러 가지 대처들에 대한 예행연습.
공사판이야 전생에서 질리도록 경험한 부분이었지만 컨트롤타워의 꼭대기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우진은 그 또한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현장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작용한 듯싶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기회가 빠르게 왔어. 성수 설계권을 따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시공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눈을 감은 채로도 계속해서 일 생각을 하던 우진은, 스르르 잠에 들었다.
진태의 차를 타고 향하는 곳은 이번 사업권을 가지고 있는 시행사.
지식산업센터의 부지매입과 시행을 전문적으로 하는 ‘클라우드 파트너스’라는 회사였다.
‘클라우드 파트너스’의 분양 사무실은 성수동에 있었지만, 본사는 은평구에 있었고.
때문에 성수동에서 본사까지 가는 길은, 거의 한 시간은 걸리는 여정이었다.
부우웅-
광화문 쪽을 지나 통일로 초반부를 빠져나오자, 길은 그래도 수월히 뚫렸다.
출퇴근 시간을 피했기 때문인지, 진태의 차는 목적지까지 50분 정도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끼익-
차가 멈추는 소리가 나자 반사적으로 눈을 뜬 우진이,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며 진태를 향해 물었다.
“도착했어, 형?”
“그래, 다 왔다. 거울 좀 보고, 머리 좀 정리하고 올라가자.”
“알겠어.”
조수석 거울을 열어 부스스해진 머리를 가다듬은 우진은, 차 문을 열고 주차장에 내렸다.
이어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컬러링 없는 단조로운 송신음과 함께, 잠시 후 밝은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도착하셨습니까?]
“네, 과장님! 저희 방금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그, 저희 건물 1층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거기 잠깐 계시겠어요?]
“위치 알려주시면 저희가 올라가도 되는데…….”
[아, 아닙니다. 제가 모시고 올라와야죠.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그럼 커피라도 한 잔 시켜놓을까요?”
[좋습니다! 아직 미팅 시간도 넉넉히 남았으니, 커피 한 잔 같이하시죠.]
“커피는 어떤 거로…….”
[저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회사 미팅 왔다고 말씀하시면, 따로 결제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우진의 통화음은 꽤 큰 편이었고, 그래서 바로 옆에 서 있던 진태는 대략적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진태는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 여기 클라우드 파트너스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
아무리 우진이 한 회사의 ‘대표’라고는 하지만, ‘클라우드 파트너스’와 같은 대형 시행사 직원이 이렇게 깍듯이 대접하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목소리 톤만 들어봐도, 우진을 무척이나 반긴다는 게 느껴질 정도.
그런 진태의 기색을 느낀 건지, 우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 우리 지금 쓰는 사무실 건물 있잖아. 서울숲 IT타워.”
“지금 쓰고 있는 지식산업센터?”
“응. 지금 우리 건물.”
“갑자기 그건 왜?”
더욱 의아해진 진태의 표정을 보며, 우진이 재밌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형 혹시 서울숲 IT타워 시행사가 어디였는지 기억해?”
뜬금없는 우진의 이야기에, 진태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야.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냐? 내가 직접 매입한 것도 아닌…….”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잠깐.”
“흐흐 눈치챘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진 진태가, 놀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설마 서울숲 IT타워 시행했던 시행사가 클라우드 파트너스야?”
우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빙고. 바로 그거지.”
“그럼 방금 너랑 통화했던 분은……?”
우진은 대답 대신 유리문을 밀고,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어서 간단하게 아메리카노 세잔을 시킨 우진은, 푹신한 소파 자리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진태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우진의 맞은편에 앉았고.
그런 그의 표정을 본 우진이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서울숲 IT타워 내가 매입할 때, 분양사무소에 있던 직원 한 분께 전 호실 싹 다 매입했었거든.”
“그럼 그때 그분이 바로…….”
우진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맞아. 그때는 대리셨는데, 그 이후로 잘 풀리셨는지 본사로 발령나면서 과장까지 진급하셨더라고. 클라우드 파트너스 내에서도 입지가 괜찮게 생기신 모양이야.”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