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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221화 (221/315)

221화

시민들이 원하는 한강

[그, 그게……. 서동준 의원님도 어쩔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직속 후배이긴 한데, 원체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아니, 말도 잘 안 통하는 놈이 어떻게 서울시장까지 올라갔어?”

[……. 죄송합니다.]

“니가 왜 죄송해?”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됐다. 꼴통 같은 놈, 굳이 만나서 뭐 할까.”

[그럼 일단 일정은 캔슬 할까요?]

“서울시는 됐고, 국토부 쪽이나 다시 자리 만들어 봐.”

[네, 협회장님.]

뚝-

“제기랄. 이거 별난 새끼가 서울시장이 됐네.”

주열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자, 운전 중이던 준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주열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동준이 알지?”

“아, 서동준 의원님이요?”

“그래. 내 친구잖냐.”

“알고 있습니다.”

서동준은 S대 출신의 서울시 지역구 3선 의원으로서, 주열의 학창시절 친구였다.

“이번 서울시장이 걔 직속 후배거든.”

“아……!”

“이번 프로젝트 관련해서 얘기나 좀 나눠보려고, 동준이 통해서 한번 연락을 넣어봤는데…….”

주열이 말꼬리를 흐리자, 대충 상황을 이해한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안 되셨나 보군요.”

“그냥 얼굴이나 좀 보자는데, 원칙은 무슨. 지랄.”

주열의 이야기를 듣던 준호는, 속으로 무척이나 아쉬웠다.

‘서울시장까지 엮었으면 진짜 거저먹을 수 있었는데…….’

겉으로 티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서울시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땅 짚고 헤엄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 뻔했으니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호스튜디오>의 공모 당선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고.

그러면 자신은 컨셉 설계 단계에서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될 터.

당선을 확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데다 공수까지 줄일 수 있을 뻔하였으니, 준호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괜찮은 척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시지요, 선배님.”

“무슨 걱정?”

준호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력으로 눌러 보겠습니다. 선배님께서 이렇게 판 깔아 주셨는데, 이 정도는 받아먹어야죠.”

결과적으로 서울시장과의 미팅은 결렬되었지만, 준호는 주열의 파워에 적잖이 놀라 있었다.

어쨌든 그의 인맥 안에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울시장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래서 준호는 주열의 줄을 꽉 붙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발린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럴 때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주는 것 또한 필요하다.

알맹이도 없으면서 듣기 좋은 말만 할 줄 아는 스타일은, 주열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준호였다.

그리고 준호의 이런 태도는, 주열의 마음에 쏙 들었다.

“허허. 그래. 후배 님 실력이야 내가 믿지.”

준호가 자신 있게 다시 말했다.

“해외 설계사무소들 미리 컷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긴, 내가 미리 얘기 돌려놨으니, 협회 소속 다른 애들도 들어오진 않을 테고.”

“……!”

“이 정도 깔렸으면, 준호 실력이면 받아먹을 수 있겠지.”

주열의 말이 끝난 순간, 준호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서 운전대를 잡은 그의 양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협회에 소속되어있든 다른 건축사무소들까지 암묵적으로 빠지게 된 상황이라면, 서울시의 도움 같은 것도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굵직한 건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의 설계사무소는 대부분 협회에 소속되어있었으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거의 만만한 곳들뿐이었으니까.

‘됐어!’

준호는 이미, 백억 대가 넘는 설계 공모에 당선된 기분이었다.

* * *

아직 5월.

본격적인 여름이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WJ 스튜디오의 회의실은 무척이나 후끈한 분위기였다.

스튜디오의 모든 설계인력이 전부 참여한 회의에서, 벌써 세 시간 째 열띤 토론이 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토론의 주제는 당연히 성수 전략정비구역의 통합설계 공모에 대한 건이었다.

근 두세 달 동안 WJ 스튜디오 설계 파트의 가장 큰 관심사가, 바로 이 프로젝트였으니까.

기본적인 디렉팅이야 우진이 했지만, 이제 세세한 아이디어나 구체적인 설계는 우진의 손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밖으로 바삐 오가야 하는 우진에게 그럴 만한 시간조차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우진이 몇 가지 방향성을 제시해 놓으면, 그것을 기반으로 설계팀의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설계안을 제시하는 것이 지금 WJ 스튜디오의 디자인 설계 프로세스.

그동안 WJ 스튜디오 설계 파트의 역량은 일취월장하였다.

기존 멤버들의 실력이 향상된 것도 있었지만, 외부에서 뛰어난 실력자들을 영입해 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우진의 역할은, 이들에게 정확한 설계 방향성과 디자인 철학 등을 짚어주는 것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설계팀에서 지난 일주일 동안 밤낮없이 일한 결과물들을 깔아놓고, 우진의 피드백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가 지난 회의 때도 여러 번 강조했던 부분이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주거공간을 설계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우진의 말이 이어질 때에는, 다들 집중해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는 성수 전략정비구역 조합원들이기도 하지만, 한강공원을 이용할 모든 시민들이기도 합니다.”

회의실 커다란 스크린 위에 떠 올라 있는 평면도를 레이저 포인트로 가리킨 우진이,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거주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한강공원과 최대한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우진은 또박또박 설계의 보완점에 대한 핵심을 짚었으며.

“강변북로가 지하화되면서 확보되는 광활한 면적에 아름다운 녹지와 공공시설을 설계하고…….”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해당 시설에 접근성 높은 입주민들로 하여금 이로 인한 프리미엄을 느끼게 만들면서도, 다른 곳에 거주하는 서울시민들도 성수 한강공원을 매력적으로 느끼도록 설계해야만 합니다.”

우진은 단순히 이상적인 방향성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표라고 해서 ‘이렇게 해라’라고 무턱대고 지시하기보다는, 자신이 제시한 방향에 대한 정확한 근거와 다양한 래퍼런스를 항상 같이 제시하였다.

그래서 WJ 스튜디오의 디자이너들은, 우진의 방식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이건 뉴욕 센트럴파크의 사례군요.”

“저건 런던의 하이드파크인 것 같고…….”

“뤽상부르 공원도 확실히 참고할 만하겠습니다. 영국의 리젠트 파크도 멋지고……. 하지만 한강과 완벽하게 비슷한 입지조건을 가진 공원은 세계 어디에도 찾기 힘들군요.”

“애초에 세계 어디에도 인구 천만 이상의 대도시에 한강 같은 아름답고 커다란 강이 흐르는 곳은 잘 없으니까요.”

“한강공원의 매력이지요.”

“저희가 너무 프리미엄 주거공간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수정안 좀 내보겠습니다.”

우진이 이런저런 안건들을 제시하자, 또다시 분주하게 회의가 진행됐다.

집단지성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우진이 혼자 고민할 때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들도 여럿 튀어나왔다.

“아예 커뮤니티 시설의 일부를 한강 변 쪽으로 쉐어해도 괜찮겠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한 발상 아닐까요. 팀장님?”

“프라이버시 때문에 그러시죠, 대표님?”

“당연하죠.”

“당연히 기본 커뮤니티 시설은 분리해야 합니다. 주민들 반발도 심할 거고요.”

“그럼……?”

“하지만 기존에 저희가 제안드렸던 워터파크 시설을 아예 한강공원 방면으로 절반 정도 빼버리고, 외부인에게 사설시설보다 비교적 싼 이용료를 걷어서 관리비에 보탠다면…….”

“오! 그런 방법이!”

“입주민이건 외부인이건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구도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군요. 워터파크 관리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확실히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회의는 몇 시간에 걸쳐 길게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집중도가 떨어지지 않은 채 열정적으로 회의에 임하였다.

회의 분위기가 워낙 좋기도 했지만.

다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거대한 규모의 공간을 자신들의 손으로 설계한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이었던 것이다.

“타입별 평면구성부터 시작해서 설계 퀄리티는 아주 훌륭하군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다만 외관 특화는 같이 좀 더 고민해 보십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커튼월 룩이 조금 밋밋한 감이 있지 않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작업했던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일부 적용해 봐도 좋을 것 같군요.”

“주거공간인데……. 너무 기하학적인 형태를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요.”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반적인 건물 형태는 그대로 가고……. 커튼월 느낌을 내기 위해 커튼월 룩(Curtain wall look) 디자인을 사용하는 것처럼, 패러매트릭 디자인을 접목한 특별한 패턴을 스킨 형식으로 건물에 씌워 볼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오……! 그건 멋지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4시경에 끝날 예정이었던 설계 변경 회의는, 퇴근 시간인 6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길어진 회의에도 다들 의욕적인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고.

특히 회의를 주도했던 우진은,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이었다.

‘이제 다들 도가 텄어. 설계 중간 결과물들이 생각보다 만족스럽네.’

대표실로 걸어가던 중 사업부 팀장과 마주친 우진이 그를 잡고 물었다.

“유 팀장님. 저희 공모 마감이 며칠 남았죠?”

“앞으로 3주 정도 남았습니다.”

“시간은 충분하군요.”

“하하, 공고가 나기 전부터 미리 시작했으니까요.”

“사업부 쪽에는 별문제 없죠?”

“걱정 마세요, 대표님. 유보금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공모 준비한다고 인력을 워낙 많이 투입해서……. 매출이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걱정이죠.”

우진의 말에, 유 팀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사업, 어차피 따오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흐흐.”

우진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그렇게 되게 하긴 하겠지만…….”

우진은 물론 자신이 있었지만, 말꼬리를 조금 흘렸다.

어쨌든 이번 사업을 따오는 것이, 아직 확정적인 사안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우진이 해당 프로젝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라고 해도, 더 좋은 설계를 제안하는 회사가 있으면 일은 그쪽에 가는 것이 맞았으니까.

‘그럴 일은 없게 해야겠지.’

아마 공공성 있는 설계 중에서 규모가 역대급으로 크다 보니, 해외 굴지의 설계사무소들도 많이 참여할 터.

해외의 스튜디오에서 어떤 제안을 해 올지, 그들과 어떤 경쟁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우진이었다.

‘메이저급 스튜디오들이 들어온다면 경쟁은 치열하겠지만……. 그래도 결국 승자는 우리가 될 거야. 사업장의 실정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우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이때.

자리로 돌아가려던 사업부 유 팀장이, 갑자기 다시 걸음을 돌려 우진을 향해 말했다.

“아, 참. 대표님.”

“네?”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이 하나 있는데…….”

유 팀장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따끈따끈한…… 소식이요?”

“넵.”

“좋은 소식인가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떤 소식인가요?”

“국토부에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공문?”

생각지도 못했던 유 팀장의 이야기에, 우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야만 했다.

“이번 성수 프로젝트 말입니다. 해외 설계사무소들의 참여가 제한된답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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