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달콤한 열매
올해로 스물다섯.
A여대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 이소윤은, 국내 유명 디자인 잡지사인 <아르티카>에 올해 입사하였다.
그녀는 언론 정보학을 전공했지만, 항상 건축과 디자인을 동경했었고.
그렇기에 전공도 어느 정도 살릴 수 있으면서 자신이 좋아하고 동경하는 분야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는 회사인, <아르티카>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아르티카>는 디자인 잡지사 중에 인지도도 높으면서 신입 초봉도 손에 꼽는 회사였다.
때문에 입사 경쟁률은 무척이나 치열했고, 공채에 합격한 소윤은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입사 첫 달이었던, 올해 3월까지만 해도 말이다.
“후우, 외근이라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버스를 타고 왕십리로 향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다크서클이 걸려 있었다.
사실 일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야근은 그야말로 밥 먹듯 당연한 것이었고, 처음 입사했으니 배울 것도 수북이 쌓여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멋진 디자이너와 스튜디오를 인터뷰하며 개인적인 지적 만족을 채운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었다.
그 약발이 떨어지는 데 까지, 정확히 두 달 정도가 걸렸을 뿐이었다.
“어디보자……. 여기서 내리면 되겠지?”
끼익-!
마을버스에서 내린 소윤은, 목적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늘 그녀가 취재하기로 한 현장은 바로, 세계적인 건축디자이너 ‘브루노 산체스(Bruno Sanzchez)’의 복합 상업공간.
대기업 패러마운트사의 자본이 들어간 민자사업인 ‘왕십리 패러필드’가, 그녀가 오늘 취재하기로 예정되어있던 건축물이었다.
소윤은 잠시 주변을 둘러본 것으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고, 덕분에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녀가 버스에서 내린 장소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멋들어지는 왕십리 역사 건물의 파사드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그래도 오늘 현장은 역에서 가까워서 좋네.”
하여 조금 가벼워진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걷던 소윤은, 잠시 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큰길을 따라 쭉 걸어 코너를 돌자, 건물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신역사의 아름다운 위용이 커다랗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우, 우와.”
건축 중이던 역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실물로 확인한 위용은 그녀의 머릿속에 있던 것과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고, 어느새 우중충하던 표정이 좀 더 걷힐 수 있었다.
‘지하철 역사가 멋있어 봐야 얼마나 멋지겠나 했는데…….’
터덜터덜 힘없던 소윤의 걸음걸이에도 조금 더 힘이 생겼다.
하여 패러필드 건물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소윤은 기계적으로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 * *
사실 처음 패러필드의 취재를 맡았을 때만 해도 소윤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었다.
브루노는 소윤이 가장 좋아하는 건축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브루노의 취재가 불발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디자인의 건축물이라 해도 디자이너 인터뷰를 할 수 없다면, 취재자의 입장에서는 막막하기 그지없는 게 당연했다.
건축물에 담긴 디자인 철학부터 시작해서 설계 과정과 프로세스 등.
잡지에 소개할 수 있는 핵심 컨텐츠들은, 인터뷰어가 임의로 지어낼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분량을 축소시키거나 취재 계획을 캔슬할 수 있느냐.
당연히 그것도 아니었다.
브루노라는 디자이너의 이름값과 패러필드라는 건축물의 화제성 때문에라도, 이 내용을 허투루 다룰 수는 없었던 것이다.
패러필드가 준공되는 시점에 맞춰 <아르티카>에서도 소개를 해야, 화제성에 편승해 잡지 매출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오늘도 하루 종일 소설 써야겠네.’
만약 사진만 예쁘게 찍어서 스크랩 형식으로 포스팅을 만든다면, 편집장에게 불려가 최소 한 시간 정도는 욕을 먹어야 할 것이었다.
[소윤 씨. 우리 잡지가 무슨 소윤 씨 개인 블로그인 줄 알아요?]
[대학교 과제도 이렇게는 안 하겠어. 성의가 없잖아, 성의가!]
날카로운 편집장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귀에 아른거리는지, 소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멋진 건축물을 봐서 조금 나아졌던 기분은, 금세 다시 우울해졌다.
“으, 어떻게든 되겠지 뭐.”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패러필드의 안쪽으로 들어간 소윤은, 뭔가 취재할만한 특별한 컨텐츠가 없나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아직 준공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건물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패러필드는 복합몰이기 이전에 왕십리 역사였고.
때문에 왕십리역을 이용하는 시민들을 위해서라도, 공사가 끝난 구간은 최대한 개방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저쪽으로 한 번 가볼까……?’
크로스백에 다시 카메라를 집어넣은 소윤은, 반지하로 이어져 있는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렇게 삼분 정도 안쪽으로 들어섰을까?
기이잉- 쿵-!
그녀의 귓전으로, 조금 묵직한 기계음이 들려오기 시작하였고.
“어……?”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 소윤은, 처음 패러필드에 도착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크게 동공이 확대되었다.
‘저게 대체 뭐지?’
복합몰의 중심에 뻥 뚫려 지하로 패여 있는 널찍한 중정(中庭)과, 널찍한 최하층의 로비에 설치되고 있는 거대한 구조물.
유리천장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빛의 흐름을 사방으로 반사시키는, 아름다운 파빌리온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대, 대박! 단순한 조형물은 아닌 것 같은데……?’
소윤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같은 표정이 되어, 허겁지겁 로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이어서 로비 난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카메라를 꺼내 들어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더 가까이 내려가고 싶지만, 최하층은 아직 통행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건 분명 유명 건축가나 설치미술가의 작품일 거야. 대체 누구지? 그 사람이 누군지라도 알아내면 쓸 거리가 좀 더 생길 것 같은데…….’
소윤은 이 구조물이, 분명 브루노와 친분이 있는 대단한 디자이너의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크레인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100퍼센트 설치가 완료된 상황도 아니었건만, 미완성 상태의 모습만으로도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빛이 떨어져 내리는 공간과 굴절될 각도를 전부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 새하얀 빛의 흐름을 따라 점진적으로 늘어서 있는, 수백, 수천 개의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 패널들.
그 아름다운 빛의 향연에 홀린 소윤은, 그 흐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섬세하게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을 어떻게 잡지에 실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찍는 것도 아니었다.
소윤은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오롯이 작품에 집중하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이 환상적인 공간을 최대한 아름다운 그림으로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래서 난간에 자리를 잡은 채로, 소윤은 거의 십여 분 동안 촬영에 집중하였다.
파빌리온이 세워진 최하층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지만, 성능 좋은 카메라 덕에 거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확대하여 촬영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멋진 공간이나 디자인 작품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취미였던 소윤은, 전문 사진가가 아닌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촬영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대박이다……. 대체 이걸 어떤 식으로 만들었을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취재에 대한 부담감도 잊은 채, 이 아름다운 공간 자체에 완전히 몰입한 소윤.
그런데 잠시 후.
소윤의 그 몰입은 갑자기 깨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리던 중, 확대된 렌즈 위에 웬 젊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어, 어엇?!”
처음에는 이 조형물을 설치하는 작업자 중 한 명으로 생각하여 그냥 지나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시 남자의 얼굴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었다.
‘잠깐. 이 남자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카메라 렌즈를 남자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소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어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소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박! 심봤다……!!”
남자의 정체가 바로, 최근 한국 건축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하나인 ‘서우진’이었으니까.
* * *
어떤 분야의 디자인을 막론하고, 당연히 처음은 머릿속으로 영감을 떠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떠올린 영감은 곧 아이디어 스케치로 이어지며.
그 스케치가 구체화되면 그것이 실물(實物)로 이어지게 된다.
건축디자인에서 첫 번째 실물은 설계도와 투시도였고.
그런 측면에서 우진은 이미 자신이 디자인한 파빌리온의 실물을 오래전에 확인한 셈이었다.
3D모델링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투시도와 그것을 바탕으로 석현이 제작한 축소판 모형만으로도, 우진은 충분히 완성된 파빌리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실제의 사이트(Site)에 완전히 시공된 파빌리온은, 우진이 투시도에서 봤던 그것과 거의 일치하였다.
가상의 삼차원 공간 속에서 우진이 디자인했던, 빛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패턴과 모듈들.
그것은 우진이 처음 상상했던 대로, 완벽히 구현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모형(假模型)이나 투시도로도 미리 확인할 수 없던 부분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파빌리온의 조형성의 원천이나 다름없는 ‘빛’의 흐름이었다.
물론 3D랜더링을 통해 어느정도 빛의 반사나 굴절을 재현해볼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실제의 빛과 완벽히 동일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파빌리온 설치를 시작하기 전, 우진이 가장 불안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브루노가 설계한 공간에서 쏟아지는 빛의 흐름들이, 과연 우진이 생각했던 그대로 파빌리온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부분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진의 그런 걱정들은, 기우에 불과하였다.
미리 제작된 파빌리온의 마지막 파츠를 와이어에 걸어 끼워 넣은 순간.
기이잉- 척-!
마치 수천 피스의 거대한 퍼즐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천장을 타고 내려온 새하얀 빛줄기가, 파빌리온의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마치 비온 뒤에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운무(雲霧)같았으며.
그것을 발산해 내는 우진의 파빌리온은 수천 조각으로 세공된 아름다운 보석 같았다.
그것은 상상했고 재현했던 모습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었으면서도,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완벽한 모습이기도 했다.
우진이 디자인한 파빌리온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빛’이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넣은 후에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와…….”
모든 작업이 끝난 뒤 그 자태를 감상하던 석현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석현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파빌리온이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우진 또한 석현의 옆에 가만히 서서 완성해 낸 파빌리온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런 그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정확히 보름 뒤면 이 파빌리온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었다.
마감 공사가 한창인 왕십리 패러필드는, 5월 마지막 주에 대중에게 오픈될 예정이었으니까.
우진은 그날이, 몹시 기다려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