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달콤한 열매
딸깍-
“여보세요.”
주열이 전화를 집어 들자, 전화통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협회장님, 저 지환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주열이 반갑게 인사하였다.
“어, 그래 김 교수. 어쩐 일이신가.”
S대학교 건축과의 명예교수인 김지환은 주열의 한 학번 후배임과 동시에, 국토교통부의 요직에 앉아있는 주열의 중요한 인맥 중 한 명이었다.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주열의 목소리가 밝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허, 제가 무슨 일이 있어야 협회장님께 연락드리는 사입니까?]
“하핫. 그야 물론 아니네만, 오늘은 목소리를 들어보니 뭔가 용건이 있어 보여서 말이야.”
[역시 예리하십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선 채로 전화를 받았던 주열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통화가 짧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김지환이가 갑자기 용건이라……. 이거 뭔가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은데.’
주열은 그런 생각을 하며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고, 김지환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선배님, 혹시 성수동 전략정비구역이라고……. 재개발 구역 알고 계십니까?]
주열은 건축가인 만큼, 부동산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다.
때문에 대규모 개발지역인 성수동의 전략정비구역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미 지구 단위로 전부 지정되어 민간에서 개발이 시작된 재개발 구역을, 국토교통부 소속인 지환이 어째서 언급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으니까.
“성수 전략정비? 그야 알고 있네만……. 거기는 왜?”
주열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자, 지환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 그 만오천 세대 규모의 정비구역에, 서울시에서 설계변경을 제안했습니다.]
이번에는 주열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오……. 그래?”
[알고 계신다니 설명이 편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에 여기 1, 2, 3지구 통합 설계변경 방향이 확정되면서, 서울시에서 설계공고를 낼 예정입니다.]
삐딱하게 앉아있던 주열은, 의자를 고쳐앉았다.
김지환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떡밥이 훨씬 더 먹음직스러웠으니 말이다.
“오피셜인가?”
주열의 목소리가 진지해진 것을 느꼈는지, 지환 또한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직 오피셜은 아닙니다만, 내부적으로는 행정절차가 전부 끝난 상황이니 확정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보통 어떤 정보가 오피셜이냐고 묻는 것은, 해당 정보의 정확도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오피셜이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는 뜻이고, 그건 확정적인 정보라는 소리니까.
하지만 주열이 지환에게 오피셜이냐고 물은 것은, 조금 다른 맥락이었다.
국토부 관계자인 지환의 소식인 이상 이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정보일 리는 없었고.
오히려 주열은 이게 이미 공식적으로 알려진 정보인지 아니면 오피셜이 뜨기 전에 먼저 넘어온 정보인지.
그 부분이 궁금했던 것이다.
때문에 지환의 대답은 그가 원했던 최상의 답변이었고.
그래서 주열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렇군.”
주열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전략정비구역 통합설계공고라……. 이 정도 규모면 공사비만 거의 1조 가까이 책정될 테고. 설계비는 못해도 백억 단위에서 시작이겠군.’
지환이 주열에게 이 정보를 준 이유는, 당연히 자신과 친분이 있는 건축가들이 이 사업에 우선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공고가 나갔을 때 가장 많이 채택되는 것은 보통 해외 유명 설계사무소의 설계안이었는데.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들과 협업하게 되는 것보다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일을 따가는 것이 그의 입장에서도 훨씬 더 좋았으니까.
한국 건축가협회 소속의 건축가들은 비단 주열이 아니더라도 전부 지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때문에 현 협회장인 주열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넣은 것이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오게 될 콩고물에도 당연히 관심이 있는 지환이었다.
[어떻게, 추천해주실만한 사무소가 있겠습니까, 선배님?]
지환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주열이 천천히 대답하였다.
“물론이네.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이라면, 나부터가 탐이 나는 수준이니까.”
[하하, 그럼 이번에는 선배님께서 직접 공모해보십니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게지, 말이. 허허. 이런 좋은 기회는 앞날이 후배들에게 밀어줘야 하지 않겠나?”
[역시 선배님께선 생각이 깊으시군요. 협회 후배님들께 존경받으실만하십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 그러는가. 허허.”
자신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협회 소속의 다른 건축사무소에 기회를 넘기겠다는 주열의 이야기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런 엄청난 규모의 설계를 직접 진두지휘하며 메인 건축가로 나서는 것 보다, 협회 소속의 다른 건축사무소에 연결시켜주고 고문 정도로 이름을 올리는 게 남는 장사였으니까.
설계비용이 백억 대가 넘는 이런 대규모 사업은 공모를 준비하는 데에만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인건비가 들어갈 텐데.
이제 예순이 된 주열에게는 그럴 만한 열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그 고생을 하느니 가능성 높아 보이는 후배 건축사무소에 일을 넘겨준 뒤, 주열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활용해 그들을 최대한 푸쉬해 주고.
설계 공모에 당선이 됐을 때 그에 대한 소정의 대가를 챙기는 것이, 크게 힘도 들이지 않고 챙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챙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주열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지환은 더 자세히 이번 공모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였으며.
어느새 모니터를 다시 켠 주열은 메모장에 그 내용들을 간결하게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심사 기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요소는, 강변북로 지하화와 연계된 공공설계 부분일 겁니다.]
“민자사업의 비중이 더 큰 사업장 아닌가? 어째서 공공설계 비중이 더 큰 겐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만, 사실 이번 사업 진행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보는 것은 전략정비구역의 조합원입니다.]
“그래?”
[서울시에서 내어준 용적률 상승폭이, 꽤 크게 책정되어 있거든요.]
“서울시가 갑이라는 얘기군.”
[정확하십니다. 심사위원단이야 공무원 반 조합원 반이지만……. 사실상 서울시와 국토부 측의 마음에 든 설계가 채택될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네.”
대략 십여 분 정도 김지환의 이야기들을 받아 적은 주열은 만족스런 표정이 되었다.
이 정도 사전정보를 미리 확보하고 시작한다면, 이번 사업은 충분히 협회에서 따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유선상으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국토부 쪽에서 암묵적으로 지원을 약속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굳이 육성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지환과 주열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나야말로 잘 부탁드리네, 김 교수.”
[하하, 저 이제 교수 아니잖습니까. 선배님만 항상 교수라고 부르십니다.]
“아직 명예교수는 맞잖은가 허허.”
[어찌 됐든, 실력 있는 사무소로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안목이라면 확실할 테지만 말입니다.]
“그래, 내 최대한 신경 써보도록 함세.”
[그럼, 다시 연락 주십시오!]
뚝-
지환과의 전화를 끊은 주열은, 종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그의 전화를 받기 전만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인터넷 기사 때문에 불쾌한 상황이었는데.
이 전화 한 번에 그 불쾌감이 싹 가신 것이다.
서우진이라는 이름은 금세 잊어버렸다.
어차피 운 좋게 반짝 떠오른 겉멋만 든 건축가는, 이 바닥에서 금방 묻힐 게 분명했으니까.
이때만 해도 주열은, 우진이 자신의 이번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 *
비단 ‘건축’이 아니라 어떤 분야가 되었더라도.
씨를 뿌리고 물을 준 뒤, 열매를 수확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다를 게 없다.
원인 없이 도출되는 결과는 어디에도 없으며, 노력 없이 얻어낼 수 있는 열매가 없다는 것 또한 너무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으니까.
하지만 그 달콤한 열매를 따내는 데까지.
그 어떤 분야보다도 더 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분야가 바로 건축이라는 분야이기도 했다.
컨셉 디자인부터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거쳐, 실제 부지 위에 터를 다지고 착공하여 하나의 건축물이 완공되는 데까지는.
아무리 작은 규모의 건물이라 하더라도, 반년 내지 일 년 이상의 시간은 족히 필요했으니 말이다.
때문에 2010년으로 회귀한 이후.
지난 2년 동안 우진이 했던 일들의 대부분은, 열매를 수확하는 것보다는 씨를 뿌리고 그것을 가꾸는 일들이 많았다.
건축모형 작업을 제외하면 우진이 가장 먼저 참여했던 사업장이 바로 마포구의 클리오 아파트였는데.
이 사업장조차도 아직 준공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규모가 작은 도담요양원 정도가, 우진이 참여하여 온전히 완공된 유일한 사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런 의미에서 2012년은, 우진에게 ‘수확의 해’라고 할 수 있었다.
조만간 완공될 마포 클리오 아파트부터 시작해서 왕십리의 패러필드, 그리고 국제 리빙페어와 WJ 스튜디오의 신사옥까지.
지난 시간 동안 뿌리고 가꾼 것들의 열매가, 차례대로 열리는 해가 바로 2012년인 것이다.
‘1차적으로 완성된 <천년의 그대> 세트장까지 생각하면, 올해는 진짜 포트폴리오가 풍성해지는 해네.’
물론 ‘열매’라는 것도 가만히 기다린다고 해서 거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건축에서는 ‘수확’의 과정 또한 많은 정성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수확해야 할 열매가 많을수록 더 바빠지는 것은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지만, 우진은 결코 힘들지 않았다.
우진이 갖고 있는 꿈에 대한 열정은, 그만큼 단단하고 견고한 것이었다.
“석구, 오늘 몇 시부터 우리가 크레인 쓸 수 있다고 했지?”
“오전 열 시부터 여섯 시간 예약해 놨어.”
“점심시간 빼면 대충 저녁 5시까지 쓸 수 있겠네.”
“그렇지.”
“그 안에 설치 가능할까?”
“해 봐야지 뭐. 아마 빠듯하기는 할 텐데,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야.”
“좋아. 그럼 우리 먼저 지금 출발하자.”
“지금 가면 아홉 시도 전에 도착할 텐데, 그 전에 가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을걸?”
“현장 실측 한 번 더 하게. 설치 시작하기 전에, 변수 없는지 최대한 확인해야지.”
“꼼꼼하긴……. 알겠어. 그럼 오 분만 줘.”
“오케이.”
오늘 우진에게 잡혀있는 일정은, 수확 예정인 그 많은 열매들 중 왕십리 패러필드의 파빌리온과 관련된 일정이었다.
브루노의 진두지휘 하에 설계된 패러필드가 드디어 준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마감 공사가 진행되기 전인 지금이 바로, 우진과 WJ 스튜디오가 패브리케이션 한 파빌리온을 설치할 시점이었던 것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석현은 오롯이 이 파빌리온 제작에 매달려 있었고, 때문에 그 결과물은 우진이 보기에도 아주 만족스럽게 뽑혀 나왔다.
그래서 우진은 오늘이 기대되었다.
브루노가 설계한 그 멋들어진 공간과 그에 맞춰 자신이 디자인한 이 아름다운 파빌리온이.
실제로 만나 조화를 이룰 때, 얼마나 멋진 공간을 만들어내 줄지가 말이다.
그래서 석현과 함께 차를 타고 왕십리로 향하는 동안, 우진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도담요양원이 서우진이라는 건축가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려 준 포트폴리오였다면.
이 패러필드의 파빌리온은, 사람들에게 그가 가진 디자인철학과 건축 색깔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될 것이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