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짧지만 강렬한
에단 클라크는 컨퍼런스에 초대받은 건축가이기도 했지만, 그에 앞서 AA스쿨의 큰 어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현재는 명예교수로 실질적인 교편을 잡고 있진 않았지만, AA스쿨에 재학 중인 사람이라면 이름 한 번 정도는 무조건 들어봤을 만큼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에단은 오늘 컨퍼런스가 시작되기 한 시간도 더 전부터 AA스쿨에 와 있었다.
오랜만에 후배 교수들과 만나 인사도 하고 제자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또 AA스쿨에서 정말 오랜만에 열린 컨퍼런스가, 잘 준비되고 있는지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던 에단 클라크는, 모든 용무를 마치고 컨퍼런스 홀에 들어와 앉아 쉬고 있었다.
어제 하이드파크에서 만났던 동양인 청년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말이다.
‘오늘의 컨퍼런스 내용이 발표되고 나면, AA스쿨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지겠지.’
만약 그가 오늘 아침.
잠깐이라도 하이드파크에서의 일을 떠올렸다면, 분명히 이런 질문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오늘 발표자로 예정된 VIP 중에, 젊은 동양인 건축가가 있냐고 말이다.
하지만 에단은 우진의 이야기들을 완전히 헛소리로 치부했었고, 그래서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에단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당황한 감정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니 말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조차 망각한 에단을 향해, 그 젊은 동양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또 뵙네요, 에단.”
“…….”
“EAC에서 저를 꼭 보고 싶다 하시더니, 이렇게 바로 옆자리에서 뵙게 되는군요.”
우진이 말을 걸어왔음에도, 에단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지정 좌석의 표찰에 쓰여 있던 이름을 확인할 뿐이었다.
[Woo Jin Seo / WJ Studio / South Korea]
그리고 할 말을 찾지 못한 에단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크흐음…….”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민망해도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지정석에 앉아계신 걸 보니, 오늘 프로젝트 발표가 있으신가 보죠?”
이어진 우진의 말에, 에단의 입이 처음으로 떼어졌다.
“어제 보시지 않았습니까. 하이드파크에 있던 파빌리온.”
“아……!”
“오늘 컨퍼런스에서 해당 작품을 소개할 예정이라오. 내 스튜디오의 작업물이니까.”
에단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딱딱했고, 그의 대답을 들은 우진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하이드파크의 그 파빌리온이, 설마 에단의 작품일 줄은 우진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아…… 그래서…….’
그제야 우진은 어제 에단의 그 굳어있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에단과 대화하는 동안 우진은 파빌리온이 가진 아쉬운 부분에 대해 꽤 많은 부분 지적하였고.
그것이 에단의 작품이었다면, 충분히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안한 것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던 에단의 태도가 이제야 이해됐을 뿐, 거기에 정당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우진이 맹목적인 비난을 했다면 모르되, 어제의 대화는 분명 합리적인 담론(談論)이었다.
‘만약 에단이 브루노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오히려 생산적인 대화로 발전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뒤, 두 사람은 각자 단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에단의 얼굴은 수치심 때문인지 살짝 붉어져 있었으며, 반면에 우진은 무표정했다.
우진은 아직 미숙한 영어를 꾸역꾸역해가면서까지, 에단과 대화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잠시 후, 컨퍼런스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이제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컨퍼런스 홀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확히 10분이 지난 뒤, 컨퍼런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EAC 컨퍼런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행사이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건축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기적으로 서로의 프로젝트를 공유하고 인사이트를 나누는 자리.
그래서 이 건축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디자이너들이 더욱 다양한 간접 경험들을 하고, 그것을 통해 지속적인 발전과 향상을 꾀하는 자리.
때문에 이 컨퍼런스에서 발표자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이 컨퍼런스에 모이는 기라성같은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최소한의 인사이트를 보여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발표자의 발표는 곧 컨퍼런스의 화두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니, 그것이 곧 그 해 컨퍼런스의 주제이며.
때문에 어떤 프로젝트들이 발표되느냐에 따라 해당 연도 EAC의 위상이 결정된다.
그래서 주최 측은, 뛰어난 프로젝트를 컨택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프로젝트들이 발표되느냐에 따라, 해당연도 EAC 주최 측의 능력을 평가받게 되니까.
“그러니까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네요, 브루노.”
“아마 우진은 EAC 역사상, 최연소 발표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컨퍼런스 홀의 한 편에서, 브루노는 오랜만에 만난 다른 스페인의 건축가와 나란히 앉아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브루노는 당연히 컨퍼런스의 VIP였지만 올해 발표자로 선정되지는 않았고, 때문에 지정석에 앉은 것은 아니었다.
브루노는 글래셜 타워가 한창 이슈가 되었던 작년 컨퍼런스에서 메인 발표자였다.
“그런데 브루노.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말씀하세요, 마누엘.”
“말씀하신 대로라면 우진이라는 그 건축가는, 따로 EAC측에 투고를 하지도 않은 것 아닙니까?”
“그랬지요.”
“브루노의 말씀대로라면 최소 진행 중이거나 완성된 프로젝트를 주최 측에 투고해야, 그쪽에서 검토하고 난 뒤에 발표자로 선정해 주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마누엘은 스페인 협회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뛰어난 건축가였지만, EAC에 초대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직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기도 했고, 실력을 인정받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누엘은 발표자 지정석에 떡 하니 앉아 있는 우진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동양의 청년이 EAC에 초대받았다는 사실만 해도 무척이나 놀라운데.
그것을 넘어 어떻게 발표자까지 될 수 있었는지 말이다.
브루노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누엘.”
“네, 브루노.”
“혹시 지난번 협회 모임에 오셨을 때, 마테오가 진행 중이던 스타디움 프로젝트를 보셨나요?”
“마테오의 프로젝트라면……. <올라스 페로시스(Olas feroces)>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마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니까요.”
“하하.”
“사실상 이번 컨퍼런스에서, 가장 메인 발표자로 선정된 건축가도 마테오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갑자기 이 프로젝트는 왜……?”
브루노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진은 사실, 그 프로젝트에 제법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건축갑니다.”
“네에……?”
마누엘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고, 브루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점진적으로 휘몰아치는 구불구불한 3차원 패널들의 설계는, 사실상 우진이 없었다면 할 수 없던 것들이니까요.”
“그게 무슨……!”
마누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브루노는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마테오의 그 작품 덕에, 올해 컨퍼런스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주제 중 하나가 디지털 건축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건축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중요한 주제 아니었나요?”
“정확히는 디지털 건축 안에서도, 그 꿈틀거리는 유기적인 면을 설계할 수 있게 만들어 준 3차원 설계기법에 관련된 부분들이죠.”
“아…….”
브루노는 컨퍼런스 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때문에 EAC 주최 측에서는, 이와 관련되어 최대한 많은 사례를 확보하길 원했습니다.”
“아하.”
“그리고 이러한 디자인적 방법론에 대해, 뛰어난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를 원했지요.”
콧잔등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린 브루노가 한 마디 덧붙였다.
“우진 덕에 설계를 완성할 수 있던 마테오는, 당연히 그에 대한 적임자로 우진을 추천했던 겁니다.”
브루노의 설명을 다 들은 마누엘은,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우진이라는 동양의 건축가가 부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호기심이 더욱 커져 있었다.
아무리 마테오가 추천했다고 하더라도, 검증되지 않은 건축가를 EAC에서 발표자로 내세울 리는 없다.
게다가 브루노까지 이 우진이라는 건축가를 크게 호평하고 있었으니, 그가 과연 오늘 발표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보여 줄지 너무도 궁금해졌다.
‘디지털 건축……. 그리고 삼차원 설계라…….’
브루노와 마누엘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마누엘도 일단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컨퍼런스의 발표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본격적인 컨퍼런스가 시작되자 EAC의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프로젝트들이 차례대로 소개되었고, 마누엘은 두 눈을 반짝이며 발표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다섯 개 정도의 발표가 끝난 뒤 기다렸던 마테오의 프로젝트가 스크린에 떠올랐다.
그 멋들어진 스타디움의 조감도를 발견한 장내의 디자이너들은, 시작부터 박수갈채를 쏟아부었다.
“Bravo!”
“멋지군. 올해의 메인 프로젝트는 이거였어.”
“마테오가 다시 부활했군.”
그리고 그 환호 속에서, 마테오의 발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2011 EAC의 총 일곱 명 발표자들 중, 에단 클라크의 순서는 네 번째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진의 등장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에단은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쳤다.
기본적으로 에단은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발표했던 노련한 건축가였으며, 이곳 AA스쿨 자체가 그에게는 안방과도 같이 편한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자리로 돌아온 에단은,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역시나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프로젝트에 호응해 줬고, 그것으로 이번 파빌리온의 조형적 가치가 뛰어남을 증명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겉멋만 잔뜩 들어있던 누구의 평가와는 다르게 말이지.’
하지만 나아졌던 그의 기분이 다시 나빠지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바로 다음다음 순서로 발표에 나선, 마테오의 프로젝트를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일단 마테오의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너무 충격적인 비주얼을 보여 주었다.
‘아니, 저게 실제로 시공이 가능한 설계라고?’
에단은 하이드파크의 파빌리온을 발표하면서, 디자인 과정에 사용된 패러매트릭 디자인과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기법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었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얼마나 복잡한 R&D 과정을 거쳤으며, 어떻게 이러한 디자인을 뽑아낼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에단의 눈 앞에 펼쳐진 마테오의 <올라스 페로시스(Olas feroces)>는, 에단의 발표를 부끄럽게 만들 지경이었다.
자신의 발표 차례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계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다양한 비정형적 곡면들이, 마테오의 설계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이건 사기야!’
현업에서 수십 년 동안 건축을 해온 에단의 입장에서, 마테오의 설계는 그저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비현실적인 설계로 보일 정도.
에단은 얼굴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초조해진 것인지 한 손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하였다.
마테오의 프로젝트가 더 뛰어나서는 아니었다.
어차피 에단은 이번 컨퍼런스에서, 그냥 평균 정도의 지지만 얻으면 성공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정황상 마테오의 이 발표가 올해 컨퍼런스의 메인 화두가 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되면 에단의 발표는 비교 대상으로 계속해서 언급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상 에단의 프로젝트는 디지털 기법을 전격적으로 이용하기보다는 기존의 설계법에 약간의 포장지로 사용한 정도였으니.
건축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떠나, 설계의 수준 차이가 너무 크게 난 것이다.
“후우우.”
에단은 평정심을 찾기 위해 깊게 심호흡하였고, 그러는 사이 마테오의 발표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갔다.
“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 툴’이 도구로써의 역할 뿐 아니라 새로운 창의력의 발원 지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마테오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에단 또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지언정 그의 목소리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이번에 제가 접한 알고리즘과 3차원 툴은, 저의 공간에 대한 인지능력과 창의력을 또 다른 차원까지 확장 시켜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마테오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 순간.
에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모든 방법론과 프로세스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
“여러분 모두가 지금쯤 가장 궁금해하고 계신 구체적인 프로세스들.”
마테오가 우진을 향해 손을 뻗었고, 우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들을 공유해주실 건축가 한 분을, 이 자리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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