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짧지만 강렬한
우진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컨퍼런스가 시작되는 시간이 아침 9시였으니, 거의 새벽 여섯 시부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컨퍼런스가 열리는 AA스쿨 자체는 제이든의 집이 있는 켄싱턴에서 멀지 않았지만, 긴장된 탓인지 눈이 일찍 떠졌다.
제이든과 석현은 밤늦게 들어와서인지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고, 우진은 그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방에서 나와 씻고 짐을 챙겼다.
어차피 둘을 깨울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브루노 쪽에서 T.O를 받은 소연과 달리 컨퍼런스 입장 자격이 없었으니까.
쏴아아-
서늘한 초겨울 아침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하자, 우진은 정신이 조금 더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말리고 조금은 단장도 하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우진은 어제 랜트했던 자동차에 미리 노트북 가방을 가져다주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고, 그곳에는 우진보다도 먼저 준비를 다 끝낸 소연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이든의 어머니 수진과 함께 말이다.
“오빠, 일찍 준비했네?”
“눈이 떠지길래.”
“나도 그랬는데.”
수진은 우진에게도 커피를 한 잔 내려줬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자 정신이 더욱 또랑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모닝 빵에 버터를 발라 아침을 해결하였다.
“오늘 컨퍼런스에 간다고 했죠?”
수진의 물음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어머님. 조금 일찍 나오기는 했는데, 여덟 시에는 출발할까 해요.”
“호호. 잘하고 와요. 제이든의 동기라고 들었는데, 벌써 EAC에도 참석하고 정말 대단해요.”
수진의 칭찬에, 우진의 표정이 머쓱해졌다.
“제이든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죠, 뭐.”
수진이 빙긋 웃었다.
“제이든이야, 앞으로도 기회가 많이 있겠죠.”
“하하, 그럼요.”
“제이든이 우진을 Boss라고 부르던데.”
수진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우진의 표정이 더욱 멋쩍어졌다.
“그, 가끔 그러더라고요.”
“우리 제이든, 잘 부탁해요. 우진을 잘 따라다니면, 제이든도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지도 모르죠.”
우진은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고, 묘한 기분이 되었다.
사실 전생에서 제이든은 우진이 동경하던 스타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제이든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한 것이다.
‘제이든은 어차피 타고 난 녀석인데…….’
물론 그런 묘한 느낌과 별개로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수진의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낯간지러운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빈말은 아닌 게 느껴졌으니까.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면서 담소를 나누다 보니, 또 한 30분 정도는 금세 흘러갔다.
그리고 소연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 교수님이랑 브루노는 방금 출발하셨대.”
“그래? 두 분 숙소가 어디 쪽이지?”
“프림로즈 힐(Primrose Hill) 인근이라고 하셨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소연의 말을 듣던 수진이 입을 열었다.
“하이드 파크 북쪽이에요. 여기서 대략 30분 정도 거리죠.”
“엇, 그럼 그쪽에서 AA스쿨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음……. 자가로 오신다면 40분에서 50분 정도?”
그녀의 말을 들은 우진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리도 슬슬 출발해야겠네.”
“그렇겠지?”
“조금이라도 먼저 가서 도착해 있어야 하니까.”
무려 아침까지 챙겨준 수진에게 감사 인사를 한 우진과 소연은, 서둘러 제이든의 집을 나섰다.
물론 두 사람이 출발할 때까지도, 제이든과 석현은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 * *
런던 중심가의 대로를 구불구불 지나자 라는 도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우진은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조금 좁은 길로 우회전했고, 그곳에는 주거지역으로 보이는 테라스 하우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18세기의 상류층 귀족들이 거주했을 법한 디자인의 테라스 하우스들.
그 사이로 차를 운전하여 들어가자, 조금은 평범한 디자인의 벽돌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로 길쭉한 필지에 지어진 회갈색 벽돌구조.
아치 모양으로 생긴 까만 문들과 하얀 창틀을 가진 아기자기한 창문들.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는 이 건물이었고, 우진과 소연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커다란 대학 캠퍼스들을 상상했던 두 사람에게, 비교적 작은 규모의 AA스쿨은 의외였으니 말이다.
“여기야, 오빠?”
“그런가 본데?”
“잘못 온 건 아니겠지?”
건물의 앞 도로는 그리 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차량들이 일렬로 빼곡히 주차되어 있었다.
겨우 자리를 찾은 우진은 차를 주차해 둔 뒤, 입구를 찾아 조금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현관을 찾아 도착한 우진은, 이곳이 그 AA스쿨이 맞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AA스쿨의 풀 네임이 양각된 현판이,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왔으니 말이다.
“제대로 찾아왔네.”
“다행이다.”
“한국의 대학교랑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네.”
“AA스쿨 자체가 캠퍼스의 개념은 아니지 뭐. 건축 아카데미라고 보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니까.”
마치 중세 유럽의 저택처럼.
까맣게 도색 된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부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진과 소연이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30분.
컨퍼런스의 시작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AA스쿨의 내부는 무척이나 분주한 분위기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음……. ‘컨퍼런스홀’이라고, 대강단 같은 장소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컨퍼런스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에 정신을 차린 소연이, 재빨리 가방을 뒤져 미리 받았던 표찰을 꺼내 들었다.
“EAC의 게스트로 초대되어왔습니다. 여기 이 오빠도 마찬가지고요.”
“아하, 그러시군요!”
소연이 표찰을 꺼내 들자, 우진도 품속에 넣어두었던 표찰을 꺼내 목에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표찰을 확인한 영국인 남자는, 꽤나 놀란 표정이 되었다.
소연이 꺼낸 표찰은 단순한 게스트 표찰이었지만, 우진의 표찰에는 분명히 VIP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까.
‘VIP라고……? 이 어린 동양인이?’
EAC에서 VIP 표찰을 내어 주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지도를 가진 최고의 건축디자이너이거나, 해당 년도 컨퍼런스에서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발표자일 경우.
EAC는 일반적인 디자이너가 초대받기도 어려운 컨퍼런스였지만, 수년간 초대받는 디자이너들 중에서도 VIP 표찰을 목에 걸어 본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관계자가 놀란 것은 당연하였다.
게다가 AA스쿨에서 컨퍼런스를 진행하는 관계자들 또한, 단순한 진행요원이 아니었다.
‘교수님께 여쭤봐야 하나? VIP라면 분명히 아실 텐데…….’
지금 우진과 소연에게 다가온 남자는 AA스쿨의 학생이었고, 때문에 우진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 것이다.
하지만 잠시 당황했던 남자는 이내 다시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을 안내하였다.
궁금증이야 곧 컨퍼런스가 시작되면 풀릴 것이었고, VIP를 조금이라도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은 곤란했으니 말이다.
“VIP셨군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두 분, 이쪽으로 오시지요. 컨퍼런스 홀은 3층입니다.”
우진과 소연은 남자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고, 3층에 도착하자 커다란 로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내를 마친 요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컨퍼런스는 저 안쪽의 대강당에서 진행됩니다. 컨퍼런스 시작 10분 전까지 입장 부탁드리며, 그 전까지는 로비에 케이터링된 다과를 편히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친절하게 안내해준 남자를 향해 우진과 소연이 고개를 숙여 보였고, 이어서 안내받은 대로 로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로비를 향해 시선이 옮겨진 소연은,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와, 뭔가 멋지다……!”
층고가 무척이나 높은 로비에는 정말 고급스럽고 다양한 핑거푸드들이 케이터링되어 있었고.
그보다 더 다양한 수 많은 디자이너들이 여기저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빵 조금만 먹을걸.”
우진의 말에, 소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맛있어 보이는 거 많다.”
“배는 안 고프지만, 그래도 맛은 좀 봐야겠지?”
“히히, 당연하지. 언제 이런 자리에서 이런 음식들을 또 먹어보겠어?”
소연과 테이블 한쪽 끝에 자리 잡고 선 우진은, 슬쩍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얼굴이 익숙한 유명한 건축디자이너를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낯선 이들이었고, 그래서 우진은 조금 아쉬웠다.
‘컨퍼런스가 끝난 뒤에도 연회가 있다고 했으니, 인맥을 좀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네.’
기분 좋은 상상을 한 우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만약 발표를 멋지게 성공시킨다면 분명 많은 디자이너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자연스레 유럽의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인맥을 쌓은 뒤 내년의 컨퍼런스에 또 초대받는다면, 일 년 뒤 이 자리에서는 이렇게 뻘쭘하게 서 있지 않아도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 그때.
놀랍게도(?) 누군가 우진의 이름을 불러왔다.
“오, 우진! 도착했군요!”
꽤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우진과 소연의 고개가 동시에 휙 하고 돌아갔고.
“앗! 마테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두 사람은 대번에 표정이 밝아졌다.
우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늘 이 자리에 그를 초대한 장본인인 마테오였던 것이다.
둘은 반가운 표정으로 가볍게 포옹하였고,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브루노와 함께 온 것 아니었나요?”
“아, 비행기는 함께 탔지만, 숙소는 따로 잡아서요. 브루노도 곧 도착하실 겁니다.”
재밌는 것은, 두 사람이 영어로 꽤 능숙하게 의사소통을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진과 마테오의 영어 실력이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에 가능한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최근 들어 우진의 영어 실력이 꽤 늘어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문법 다 틀린 거 알지, 오빠?”
“말만 통하면 된 거 아니냐.”
“한국 가면 같이 영어공부 좀 해. 영어 회화 교양이라도 들을까?”
“그럴 시간 없습니다요.”
마테오와 대화하기 시작하자, 양상은 그 전과 조금 달라졌다.
마테오는 브루노에 거의 비견될 정도로 인지도 있는 스페인의 건축가였고.
때문에 우진이 그와 대화하기 시작하자, 호기심이 생긴 꽤 많은 사람들이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우진의 목에 걸려있는 VIP 표찰도 한 몫 했고 말이다.
“마테오, 이 친구가 이번에 자네의 스타디움 디자인을 도와줬다는 그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인가?”
“그렇다니까. 지금은 한국에서 브루노와 함께 복합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친구라네.”
“오, 맙소사!”
“우진, 우진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스물셋. 아, 아니. 스물둘입니다.”
우진은 한국 나이로 스물셋이었지만, 만 나이로 따지면 이제 생일이 지나 스물둘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우진의 나이를 들은 주변 디자이너들은, 기겁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믿을 수 없군요. 하하하. 스물둘의 나이에 EAC에서 VIP 표찰을 목에 걸다니.”
우진은 마테오 덕분에, 몇몇 디자이너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이 스페인의 디자이너들이었기에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손발 다 써가며 대화하다 보니 뜻은 얼추 통할 수 있었다.
“역시 바디 랭귀지는 위대해.”
우진의 한 마디에,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말이다.
“이제 슬슬 들어갈까?”
이어진 우진의 말에, 소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빠 먼저 들어가 있어. 브루노 거의 도착하셨다니까, 오시면 난 같이 들어갈게.”
“그래. 어차피 자리도 다를 테니까.”
대화를 나누던 디자이너들과 짧게 인사한 우진은, 조심스레 컨퍼런스 홀 안으로 들어갔다.
진행요원에게 표찰을 보여주자 우진은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고, 그곳은 아예 우진의 이름이 명시된 그의 지정석이었다.
우진이 발표자기 때문에, 아예 자리가 정해져 있던 것이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좌석 사이로 들어간 우진은, 안내받은 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흐음……?”
바로 옆자리의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 우진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까만 중절모를 쓴 백발의 노신사.
우진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는, 바로 어제 하이드파크에서 만났던 에단 클라크였던 것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