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Europe Architecture Conference
우진은 전생에 당연히 비행기를 타본 적이 있었다.
관광 목적도 있었지만, 이리저리 회사를 옮겨 다니다 보니 해외로 출장 나갈 일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회귀 이후 비행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고 한창 두바이를 오가던 것은 10년도 더 된 일이었기 때문에.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의 고통(?)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쪼그린 채 잠을 잘못 잤기 때문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비명을 질러대는 전신의 근육들.
그런 그의 뒤로 캐리어를 밀고 나오던 석현이, 혀를 차며 핀잔을 주었다.
“쯧, 목 꺾어놓고 잘 때부터 알아봤다, 서우진.”
“깨워줬어야지!”
“내가 네 옆자리도 아니고 어떻게 깨우냐.”
딱딱하게 뭉쳐있는 목 근육을 꾹꾹 누르며, 우진은 천천히 비행기 밖으로 캐리어를 밀었다.
그들이 도착한 런던의 공항은 영국을 대표하는 관문 공항이자 유럽에서 가장 번잡한 공항으로 알려진, 히스로우(Heathrow)라는 이름을 가진 대형 국제공항이었다.
“영국이라니……!”
공항에 내려선 소연이, 감격한 표정으로 공항을 둘러보았다.
막 새로 지어진 인천국제공항만큼 번쩍거리는 공항은 아니었지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히스로우 공항의 전경은 그 규모와 수많은 인파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랑하였다.
소연의 탄성에, 뒤따라 걸어 나온 제이든이 슬쩍 끼어들었다.
“Welcome to London.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소연.”
“런던이 다 너네 집이냐.”
“자꾸 그렇게 꼬투리 잡으면, 소연은 우리 집에 재워주지 않을 거야.”
“……쏘리 제이든.”
언제나처럼(?) 제이든을 구박하던 소연은,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말고 사과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우진을 비롯한 제이든의 친구들은, 런던에 있는 제이든의 본가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던 것.
제이든의 말에 따르면 런던에 있는 그의 집은 한남동에 있는 제이든 하우스(?)보다도 훨씬 넓다고 했고, 게스트를 위한 방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했으니.
우진과 석현은 제이든의 방에서 신세를 지고, 소연은 게스트 룸에서 묵기로 한 것이다.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의 숙박비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에 있는 동안만큼은 제이든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제이든을 마지막으로 우진의 친구들이 전부 짐을 빼서 비행기 바깥으로 나온 뒤, 조운찬 교수와 브루노가 나란히 출구로 걸어 나왔다.
“히스로우는 오랜만이군요.”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브루노를 보며, 조운찬이 웃으며 말했다.
“영국은 올 일이 잘 없으신가 봅니다?”
“컨퍼런스가 아니면 딱히 올 일은 없지요.”
“영국의 디자이너 카나스(Kanass)와 친하시다고 들었는데…….”
“아하. 카나스 그 친구와 친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친구가 어디 영국에 잘 붙어있던가요.”
“하하. 그렇습니까?”
“거의 미국에 상주하는 친구 아닙니까.”
“저는 그분을 지난번 비엔나 컨퍼런스 때 한 번 뵌 게 처음이라, 사실 그렇게 친분이 있는 편은 아닙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히스로우 공항은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공항철도인 히스로 익스프레스(Heathrow Express)를 이용하면 2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런던 패딩턴 역에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우진의 일행 여섯 사람도, 별다른 고민 없이 우선 패딩턴 역으로 향했다.
“제이든, 패딩턴 역에서 AA스쿨까지는 얼마나 걸려?”
“흠.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차로 움직이면 15분 안쪽일 거야.”
“가깝네?”
“그러니까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우진. 오늘은 짐 풀어놓고 신나게 놀자고!”
영국에서 열리는 이번 건축디자인 컨퍼런스의 정확한 위치는 런던의 AA스쿨이다.
건축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명문 학교 중 하나인 AA스쿨이, 이번 컨퍼런스의 장소로 선정된 것이다.
그래서 영국에 도착한 우진의 첫 번째 관심사는 AA스쿨일 수밖에 없었다.
“짐 먼저 풀어놓자는 얘긴, 너희 집에 먼저 들르자는 거야?”
우진의 물음에, 제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번에는 소연이 물었다.
“너희 집도 패딩턴 역에서 가까워?”
제이든이 다시 대답했다.
“십 분이면 갈걸? 아니다. 십오 분?”
“어딘데?”
“제이든의 집은 사우스 켄싱턴 쪽에 있지.”
“사우스…… 켄싱턴?”
고개를 갸웃하는 소연을 보며, 제이든이 핀잔을 주었다.
“어차피 말해도 모를 거면서, 왜 물어본 거야?”
“생각해 보니 그러네.”
하지만 영국 지리를 전혀 모르는 우진, 소연과 달리.
석현은 아는 것이 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성을 터뜨렸다.
“제이든! 너희 집이 사우스 켄싱턴에 있다고?”
“그렇다니까.”
석현도 영국에 그리 여러 번 와본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영국축구 리그를 좋아하다 보니 런던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박. 제이든 너, 생각보다 훨씬 더 부자였구나?”
석현이 양팔을 벌리며 끌어안으려 하자, 제이든이 손사래를 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렇진 않아, 석현. 오해야.”
“우진아. 제이든이 영국에 있는 동안 밥은 전부 다 사주겠대.”
“훌륭한데?”
“석현, 항상 말하지만……. 부자는 우리 아빠지 내가 아니야.”
“어쨌든!”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세 남자를 보며, 소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은 궁금했는지, 석현을 향해 물어보았다.
“켄싱턴이 부촌인가 보네?”
“마치 한국의 강남이랄까.”
“아하……?”
“우리 앞으로 제이든에게 좀 더 잘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의 대화에 우진이 끼어들었다.
“난 이미 제이든에게 잘해주고 있었어.”
그리고 제이든이, 격노한 표정으로 이어서 끼어들었다.
“Holy! 우진은 거짓말쟁이야.”
히스로 익스프레스는, 우진의 일행을 순식간에 런던 도심으로 데려다주었다.
워낙 국제도시로서 위상이 높은 런던이어서 그런지, 2011년에도 이미 공항교통은 무척이나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해서 패딩턴에 도착한 우진의 일행은, 일단 둘로 찢어지게 되었다.
“그럼 다들 내일 다시 만나자꾸나.”
“교수님도 제이든의 집으로 오셔도 된다니까요?”
“하하. 그럴 순 없어, 제이든. 학회에서 잡아 준 호텔도 있어서,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야.”
조운찬과 브루노는 컨퍼런스 주최 측에서 잡아 준 숙소로 곧바로 이동하였으며, 우진과 친구들은 제이든의 집으로 향한 것.
컨퍼런스가 열리기까지는 아직 하루가 남아있었으니, 그때까지는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아마 브루노와 조운찬은, 각자의 일정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배웅한 우진이 제이든을 향해 말했고.
“자, 그럼 이제 우리도 움직여 볼까?”
제이든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텐션으로 신이 나서 촐싹거리기 시작하였다.
“좋았어! 엄마한테 미리 얘기해 놨으니까, 집에 가자마자 아침부터 얻어먹자고!”
제이든의 그 말에, 소연은 조금 민망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제이든의 부모님께 너무 실례인 것도 같은데…….”
네 사람이 제이든의 집으로 향한 시간은, 영국 시간으로 무려 아침 여덟 시.
우진도 뒷머리를 살짝 긁적였지만,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계획도 그렇게 다 짜 놓은 마당에 딱히 대안도 없었으니까.
해서 다 같이 택시를 탄 네 사람은 곧바로 제이든의 집으로 향했고.
제이든의 말대로 그의 집은, 정확히 패딩턴 역에서 15분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런던 도심.
그것도 부촌으로 유명한 켄싱턴의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널찍한 단독주택.
그곳에서 우진의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 것은,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동양인 여성이었다.
“Jayden!”
“Mom!!”
그리고 다음 순간, 우진은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이든의 어머니는 아주 친절하게도, 한국말로 세 사람을 맞아주었으니 말이다.
“다들 어서 와요. 제이든의 친구분들이죠?”
그제야 제이든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기억난 우진 일행이었다.
* * *
제이든의 어머니 ‘수진 테일러’는, 완전한 토박이 서울 사람이었다.
결혼 전, 한국에서 쓰던 본명은 권수진.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찾은 제이든과 친구들을 아주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서 먹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아침 한 상을 얻어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 제이든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제이든 덕에 학교생활도 재밌고, 제가 더 고맙죠.”
“맞아, 이건 우진이 제이든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지.”
“시끄러워, 제이든. 손님이랑 이야기하고 있잖니.”
“힝.”
제이든의 잘생긴 얼굴을 봤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수진은 사십 대 후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동안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그녀 또한 디자이너였다는 부분이었다.
수진 테일러는, 영국 현지에서도 알아주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얼마 전에 한국 뉴스를 봤어요. 그리고 정말 놀랐어요. 제이든이 SPDC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자랑해서 알고 있기는 했는데, 그렇게 큰 상인지는 몰랐었거든요.”
“아, 요양원 말씀이시군요?”
“네, 정말 멋진 건물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진을 비롯한 디자이너 꿈나무들은 그녀와 꽤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제이든의 어머니라고 해서 막연히 어렵게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제이든과는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제이든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 탓에, 제이든이 정말 수진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
그것은 우진을 비롯해 소연과 석현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제이든의 어머니께서 이렇게 여성스럽고 자상하신 분이라니…….’
‘제이든을 혹시 런던의 타워 브릿지 밑에서 주워 오신 게 아닐까……?’
하지만 제이든이 대체 어떻게 수진의 아들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세 사람의 의문점은.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식사가 전부 끝나고 수진이 디저트를 내오러 부엌으로 간 사이.
거의 제이든을 빼다 박은 하이 톤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귓전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니 말이다.
“Bloody Hell! 제이든!”
“Daddy!”
“집에 올 거면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아들!”
“지난주부터 전화로 대충 열다섯 번쯤 얘기한 것 같아요, 아빠.”
“그럴 리가. 온다는 말은 했지만, 오늘이라고는 하지 않았겠지.”
“아뇨. 정확히 얘기했어요.”
“흠…….”
“제이든에게 관심이 너무 없는 것 아니예요?”
“결코 그렇지 않아, 제이든. 이 아빠는…….”
제이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봐도 의문이 들던 수진과 달리, 길거리에서 만나도 제이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쌍둥이 같은 분위기를 가진 제이든의 아버지.
하지만 우진이 더욱 놀라게 된 것은, 제이든의 아버지가 제이든과 너무 똑같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잠시 후 알게 된 제이든에 아버지의 정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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