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데뷔
[<아르티카>의 편집부는 오늘 한 남자를 찾아갔다.]
[2011년 가을, 적어도 11월 한 달 만큼은 한국 건축 업계에서 가장 핫한 루키 디자이너.]
[성수동 서울숲 인근에 있는 WJ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말끔한 헤어 스타일에 깔끔한 흰 셔츠와 면바지를 차려입고 있었다.]
[20대 초반. 국내 최고의 디자인 명문 K대학교의 학부생이자, WJ 스튜디오의 대표이사.]
[<아르티카 11월호>에서 이달의 디자이너로 선정한 남자는, 바로 건축디자이너 서우진이었다.]
[Question – 본인이 디자인하고 설계한 건축물이 이렇게 완공되었는데, 심정이 어떠십니까?]
[Answer – 너무 뻔한 대답일지도 모르겠지만, 벅차고 감격스럽습니다. 건축디자이너로서의 첫발을 내딛은 셈이니까요.]
[Question – 건축디자이너로서의 첫발이라고 하셨는데, WJ 스튜디오의 대표님이시지 않습니까? 이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 소개됐던 <카페 프레스코>를 디자인 설계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이 첫 데뷔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nswer – 물론 인테리어도 건축의 일부이고, 공간디자이너로서는 이미 많은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가 모든 부분의 설계와 디자인에 관여한 완전한 건축물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요.(웃음)]
[Question – 디자인재단 홈페이지에서, SPDC공모전 발표 당시의 영상을 봤습니다. 단순히 편안을 위한 설계를 넘어 행복을 위한 설계를 생각했다고 하셨는데요. 오늘 보신 완공된 도담요양원이, 서 대표님이 생각하셨던 그 건축물이 되었을까요?]
[Answer – 최고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저의 최선이었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작업을 함에 있어, 항상 User의 행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했거든요.]
……중략……
[Question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Answer – 네, 얼마든지요.]
[Question – 지금까지 이십 대 초반, 학부생의 신분으로……. 대표님만큼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디자이너는 없었는데요, 그 비결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
[Answer – 하하, 입지전적이라니……. 너무 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단지 운이 좋아 남들보다 조금 빨리 길을 찾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Question – 너무 겸손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이 인터뷰를 보고 계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디자이너 지망생 여러분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신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표님께서 단순히 운이 좋아 성공했다고 하신다면, 그분들이 많이 아쉬워하지 않으실까요?]
[Answer – 음……. 굳이 비결이라는 걸 이야기하자면, 꿈에 대한 꾸준한 갈망과 열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처음 꿨던 그 꿈을 잃어버리지 않은 게, 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하거든요.]
공항 라운지에 꽂혀있던 잡지를 뽑아 읽던 제이든이, 예의 그 익숙한 탄성을 터뜨렸다.
“Bloody Hell!”
“왜 그래, 제이든.”
“이건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됐어, 석현.”
“뭐가?”
“11월의 디자이너가 우진이라니! 이건 틀렸다고!”
제이든의 발광에, 근처에서 음료수를 쪽쪽 빨아 먹고 있던 소연이 그쪽으로 다가왔다.
“뭐가 또 그렇게 불만이야, 제이든?”
“이것 봐, 소연. <아르티카>에서 11월의 디자이너로 누굴 선정했는지 보라고!”
우울한 표정이 된 제이든은, 들고 있던 잡지를 소연의 앞 의자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소연의 시선은 자연히 제이든이 펼쳐 둔 잡지로 향했고, 그 페이지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우진의 사진이 일면 가득히 인쇄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소연은,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 동긴지……. 멋지긴 진짜 멋지네. 20대 초반에 아르티카에서 이달의 디자이너로 선정까지 되고…….’
아르티카는 국내 디자인 잡지 중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곳 중 한 곳이었다.
업계에서 권위 있는 잡지사라기보다는,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디자인 잡지 중 하나.
건축디자인뿐 아니라 다양한 디자인을 주제로 다루는 이 잡지는 학교 과실에도 월별로 비치되어 있었고.
그래서 소연도 과제를 하다가 쉴 때면 종종 읽어보았던 잡지였다.
아마 우진이 아르티카에서 이달의 디자이너로 선정된 것을 윤치형 교수가 본다면, <아르티카 2012년 11월 호>를 과 사무실에 영구박제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서우진 인터뷰할 땐 바람막이 안 입었네?”
“소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11월의 디자이너는 다른 사람이 됐어야 했다고!”
“그게 누군데?”
“당연히…….”
“설마 제이든이라고 할 건 아니지?”
“…….”
“11월의 디자이너 선정 기준에 영국 국적을 갖고 있으며 K대학교에 재학 중이고, 한남동에 사는 21세 남자를 특별히 우대한다는 조항이 있는 게 아니라면…….”
“Bloody Hell!”
“그럴 일은 없어 제이든. 그러니까 출국수속 준비나 해.”
아련한 눈빛으로 잡지를 바라보는 제이든을 보며, 석현과 소연이 고개를 동시에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그들이 단체로 공항에 온 이유는, 당연히 영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함.
오늘은 모두가 고대하고 또 기다렸던, 유럽 건축디자인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우진 오빠는 어디 갔어?”
소연의 물음에, 제이든 대신 석현이 대답했다.
“브루노 데리러 갔어.”
“그래? 통역도 없을 텐데 괜찮으려나……? 그 오빠 영어 알레르기 있잖아.”
석현이 킥킥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그래도 꽤 나아졌어.”
“오……?”
“브루노와 협업하기 시작한 뒤로, 틈날 때 회화공부는 좀 하나 보더라고.”
제이든이 끼어들었다.
“그냥 모르는 단어 몇 개 찾아보는 수준이지.”
석현이 피식 웃었다.
“어쨌든. 저번에 보니까 일상적인 대화 정도는 잘하던걸? 그러니까 걱정 마셔.”
“뭐, 그렇다면야.”
“브루노는 대단해. 우진의 발음을 알아들을 수 있다니 말이야.”
“제이든. 캐리어나 빨리 끌고 와.”
“……소연은 제이든만 구박해.”
“두고 간다?”
“흑, 제이든은 슬퍼.”
오늘 영국으로 출국하는 인원은, 총 여섯 명이었다.
우진과 제이든. 그리고 석현과 소연.
여기에 브루노와 조운찬 교수까지, 같은 날 비행기 표를 끊은 것이다.
물론 모두가 컨퍼런스에 초대받은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제이든과 석현은 컨퍼런스에 입장할 수 없었으니까.
소연은 브루노의 회사에 남은 초대권 한 장 덕에 입장할 수 있었지만, 제이든과 석현은 그냥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제이든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우진은 아마 나와 석현을 부러워하게 될 거야.”
“어째서?”
“우리는 컨퍼런스가 열리는 바로 그날, 웸블리 스타디움(Wembley Stadium)을 직관할 예정이거든.”
“부럽군.”
“정말 부러운 것 맞지, 우진?”
“네가 부러워하게 될 거라며.”
“맞아.”
“그러니까 부러운 게 맞을 거야.”
“젠장. 한국말은 너무 어려워 석현, 도와줘!”
제이든 덕에 시끌벅적한 가운데, 출국 인원이 전부 모여 탑승수속을 밟았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출국 일정이었지만.
수도 없이 유럽을 왕래한 브루노와 조운찬을 제외한다면, 모두가 무척이나 설레고 있었다.
영국이라는 나라에 처음 가 보는 우진과 석현, 소연은 물론.
오랜만에 영국의 본가에 갈 생각 때문인지, 제이든 또한 적잖이 설렌 것이다.
비행기에 올라 조운찬 교수의 옆자리에 앉은 우진은, 반짝이는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네모난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직 인천공항의 활주로뿐이었지만, 지금 우진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리 우진이가 EAC 컨퍼런스까지 초대받다니.”
“그러게요, 교수님. 언젠가 가 보고 싶은 곳이긴 했지만……. 그게 올해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브루노가 널 정말 좋게 봐 주신 모양이다.”
“정말 감사하죠.”
“잠깐이지만 발표도 한다며?”
“네, 교수님.”
“어떻게. 영어로 할 거야?”
“일단 영어로도 준비하기는 했어요.”
“그래?”
“유창하진 못해도 미리 준비한 짧은 내용 정도는 외워서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어로 해도 될 텐데.”
“그래요?”
“애초에 국제 컨퍼런스잖냐. 영어 발표가 가장 많기는 한데, 유럽 애들은 자존심이 쎄서 그런지 영어 할 줄 알아도 꼭 모국어로 발표하더라고…….”
“유럽에 인종차별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 건방지다고 받아들이진 않겠죠?”
“영어 못한다고 하면 뭐 어쩔 거야. 하하. 뭐 십 년 전쯤의 그 고리타분한 EAC였으면 그런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최근 분위기는 그렇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요.”
조운찬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모든 승객이 자리에 착석했고.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가 곧 이륙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메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여 주시기 바라며…….]
곧 여객기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하자, 창문에서 눈을 뗀 우진은 두 눈을 살짝 감았다.
‘유럽 건축디자인 컨퍼런스라……. 내가 잘할 수 있겠지?’
눈을 감고 허리를 등받이에 기대자, 컨퍼런스에 대한 약간의 걱정과 함께 근 한두 달 동안 있었던 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착공이 시작되어 어느새 기초공사가 제법 진행된 WJ 스튜디오의 신사옥 건설현장부터 시작해서.
갑작스레 진행이 시작된 리빙페어의 콜라보 프로젝트와, 도담요양원의 준공식.
거기에 바로 엊그제 있었던 잡지사의 인터뷰까지.
‘내 손으로 벌려놓은 일들이 대부분이기 했지만……. 진짜 어떻게 갈수록 더 정신이 없냐.’
우진은 이 모든 일들이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는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WJ 스튜디오를 설립한 2010년도 상반기부터 시작해서 어느새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 2011년 지금까지.
모든 일들은 생각대로 잘 되고 있었고, 오히려 우진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우진은 가끔씩, 알 수 없는 불안감도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겁이라는 것도 조금 생긴 우진이었다.
‘뭐, 앞으로 사업이 좀 안 풀리는 날도 있을 수 있고, 뜻밖의 난관에 부딪힐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우진은 결국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걱정들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잃을 게 많아졌다는 방증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맨손으로 업계에 뛰어들었을 때는 전혀 고려할 일 없던 부분들이, 이제는 꽤 무거운 짐이 되어 우진의 어깨 위에 얹힌 것이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할 날도 오고 참…….’
결국 머리를 비운 우진은, 구름 너머로 내려앉은 노을을 보며 천천히 잠을 청했다.
우진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언제, 어떤 상황이 되든.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는 것.
최고의 건축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그 한 가지 꿈만 잃지 않는다면 되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