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인연의 연결고리
강소정은 강석중의 친동생이다.
그 말인즉, 그녀 또한 재벌 3세라는 이야기.
국내에서 재계 순위로 손에 꼽는 NA그룹 오너 일가의 직계혈통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실 그녀가 가족에게 손을 벌렸다면, 드라마 세트장 정도 제작비용이 빠듯할 리는 없었다.
NA푸드원의 대표인 아버지와 그 자리를 이어받을 큰오빠. 그리고 카페 프레스코를 통해 사업을 크게 확장 중인 작은 오빠 석중 정도에게만 손을 벌려도, 백억에 가까운 돈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KSJ엔터를 설립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시드머니 또한 물려받은 것의 지분이 절반 이상이었으니.
사업을 더 키워나가고 성공하는 과정에서는 가족들의 도움을 더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작은 오빠 석중이 카페 프레스코를 성공시킨 것처럼,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 해왔으니까.’
그래서 소정은 <천년의 그대>를 성공시키기 위해, 쉴 새 없이 발로 뛰는 중이었다.
<천년의 그대>는 단순히 KSJ엔터에서 투자한 드라마가 아니었다.
외부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천년의 그대>의 제작사인 ‘미디트리’는 KSJ엔터의 자회사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텅-!
“휴우. 시간은 맞춰서 온 것 같고…….”
WJ 스튜디오가 있는 지식산업센터의 주차장에 차를 댄 소정은, 옷매무새를 살짝 다듬은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늘은 지난번 석중의 집들이 날 이후, 처음 우진을 만나는 날이었다.
‘얘기가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지난번 집들이에서 우진과 나눈 이야기가 그냥 가볍게 오간 것이었다면,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회사 간의 오피셜한 미팅.
소정은 우진과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WJ 스튜디오의 문을 두들겼다.
* * *
사업체를 운영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 안에는 예상치 못했던 위기도 있을 것이며,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너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어떤 상황에 대응하는 순발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대처를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머리를 굴리고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위기가 될 뻔한 상황을 기회로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우진이 사업가로서 가장 뛰어난 부분은, 상황을 활용하는 측면에 있어서의 ‘기지’였다.
완전히 별개로 보이는 어떤 상황들 사이에서 귀신같이 연결고리를 찾고, 그것들을 활용해서 최대한의 시너지를 뽑아내는 능력.
그것은 청담 선영아파트의 일을 해결할 때나 왕십리 패러필드 사업장에서 파빌리온의 시공권을 따낼 때도 빛을 발했으며.
강소정이 사무실을 찾아온 지금 이 순간에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정 대표님 말씀대로라면……. 일단 부지는 확보가 되어 있는 상태네요?”
우진의 물음에 소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히도 그렇죠. 원래 이쪽 땅이 NA푸드원 공장부지로 활용될 예정이었는데, 인근 대부분의 부지가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대규모 공장부지 조성에 실패했거든요.”
“엇, 그린벨트면 드라마 세트장도 건축이 안 될 텐데…….”
“아, 제가 가지고 있는 부지는 그린벨트가 아니에요. 경계선에 걸쳐있죠. 회사에서 보유 중이던 땅 일부가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공장부지가 들어서긴 애매한 면적이 됐을 뿐이에요.”
“아하…….”
“큰오빠가 헐값에 매도하려 하길래, 제가 그걸 산거죠.”
“<천년의 그대> 세트장 부지로 쓰려고요?”
“네.”
소정의 말이 이어질수록, 우진의 머릿속에서는 점점 더 상황이 정리되었다.
“소정 대표님.”
“네?”
“보여주신 지도상으로 보면요. 일단 평수가 1500평이 아니네요. 대충 봐도 2500평은 넘어 보이는데…….”
“아, 면적 자체는 거의 3000평 정도 돼요. 하지만 그 면적을 굳이 다 쓸 필요는 없잖아요?”
“아, 그런 의미였나요?”
“네. 정확히는 2850평인데……. 부족한 예산으로 그 면적을 다 채울 바에는, 퀄리티를 높여서 1500평 정도로만 만드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요.”
“아하.”
“그나저나 귀신같으시네요. 지도만 보고 평수를 거의 맞추시네.”
“저야 뭐 이게 일이니까요.”
가볍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됐으니, 슬슬 준비한 카드들을 꺼낼 때가 된 것이다.
“혹시 예산을 더 늘릴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나요?”
“당연하죠. 어제까지도 자금 확보한다고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는걸요.”
우진의 목소리가 좀 더 은근해졌다.
“그럼 혹시……. 추가투자를 받으실 생각도 있으십니까?”
“음……!”
우진의 물음에, 소정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이것은 좀 더 난해한 문제였으니 말이다.
만약 WJ 스튜디오에서 투자를 해준다면, 그림이 예쁘게 그려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투자자로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우진도 더 공을 들여 세트장을 디자인해줄 테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천년의 그대> 프로젝트의 예산안은 이미 확정된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추가투자를 받는다면, 소정을 비롯한 기존 투자자들의 지분이 줄어들게 되니 말이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느낀 우진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투자는, 일반적인 투자의 형태는 아닐 겁니다.”
우진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소정이 가져온 지도를 짚었다.
“보유하고 계신 부지 전체를 세트장으로 만들면 어떻습니까?”
“더 말씀해 보세요.”
“기존에 책정해두신 예산 이상으로 초과 되는 부분을, 저희 WJ 스튜디오에서 부담하겠습니다.”
“……!”
“대신 투입되는 비용의 비율만큼, 이 세트장의 소유권을 저희 WJ 스튜디오에서 갖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진의 제안에, 소정은 살짝 당황하였다.
그의 제안이 터무니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 못 했던 방식의 제안이었을 뿐이었다.
“드라마에 대한 투자가 아닌, 이 세트장 지분에 대한 투자인 건가요?”
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드라마 자체에 대한 지분도 어느 정도 탐이 나기는 합니다만…….”
우진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들겼다.
“드라마 저작권 투자로 넘어가면, 소정 대표님이 엄청 보수적으로 나오실 것 아닙니까.”
우진과 소정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카드를 놓고, 이제 구체적인 비율을 조정해 봐야죠.”
우진이 투자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나마 언급한 이상, 이제부터는 친분관계를 떠나 완전한 비즈니스의 시작이었다.
* * *
최초에 1500평 정도 규모로 세트장 제작을 이야기했을 때.
소정이 타 업체들에 제시했던 금액은, 대략 10억이 조금 되지 않는 수준의 액수였다.
단순히 드라마 세트장 제작이라는 카테고리만 놓고 봤을 때는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특수한 디자인 컨셉과 세트장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는 확실히 부족한 돈이었던 것.
그리고 이 비용은 당연히 <천년의 그대> 드라마의 제작비용 안에 포함된다.
회당 5억.
총 20부작 드라마로 계획이 되어 있었으니, 총 100억 정도의 제작비 안에 세트장 제작비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WJ 스튜디오가 10억 정도의 금액을 투자 차원에서 투입한다면, 거의 10%에 육박하는 지분이 우진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소정은 제작비가 넉넉해져 드라마 퀄리티가 높아질 것을 생각하면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그녀를 제외한 다른 투자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지분이 줄어드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테니까.
‘설득하려면 정말 골치 아파지겠지.’
하지만 우진이 말한 방식의 투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드라마에서 세트장이란 드라마의 퀄리티를 올리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세트장으로 인한 부수입 차원에서는 투자자건 제작사건 크게 욕심내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진이 노린 것도 바로 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히 견적을 내 봐야 하겠지만……. 2천 평 정도에 제가 생각하는 그림을 그려내려면, 대충 20억 정도의 추가비용은 태워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총예산이 30억 정도 되는 거지요.”
우진의 이야기에 소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아직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경청하였다.
“저희 WJ 스튜디오에서 이 정도 비용을 들여 개발에 참여하는 대신, 이 세트장의 소유권을 그 비용만큼 가져가고 싶습니다. 차후에 이 촬영장이 관광지가 될 수도 있겠고, 다른 드라마의 촬영장으로 대여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로 인해 발생할 수익을 지분만큼 쉐어 하게 되는 겁니다.”
소정의 입장에서는 전혀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이런 부분이라면 다른 투자자들을 설득하기도 쉬웠고, 그녀의 입장에서도 나쁠 게 전혀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진의 제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론 투입되는 비용만큼 드라마 자체의 지분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려울 건 잘 압니다.”
우진이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킨 뒤 다시 입을 떼었다.
“그래서 제가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그 지분율에 대한 비율조정입니다.”
쭉 얘기를 듣던 소정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투입하실 전체 금액의 일부분은 드라마 지분으로 받고, 그 나머지는 세트장의 소유권으로 받아가겠다는 말씀이시죠?”
우진이 웃었다.
“바로 그겁니다. 드라마 지분은 2퍼센트든 3퍼센트든 가능한 선에서 주시면 됩니다. 최소 1퍼센트 이상은 드라마 지분으로 받고 싶군요.”
소정은 사업가답게,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우진의 제안은 매력적이면서도 묘한 것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드라마 자체의 지분이 세트장 소유권보다야 훨씬 가치 있었고.
그래서 세트장의 소유권을 최대한 넘기는 것으로 이 제안을 성사시킨다면 남는 장사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우진이 디자인하고 시공한 세트장이 정말 20억의 추가비용 가치를 할 것이냐는 부분이었다.
우진을 믿지 못한다기보단,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감이랄까.
그래서 소정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면서도, 완전히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을 순식간에 떠올린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서 대표님.”
“네?”
“기왕 이런 제안을 주셨으니, 차라리 WJ 스튜디오에서 드라마 세트장의 소유권을 전부 가져가시는 방향을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
“저희는 아예 세트장 제작비용을 쓰지 않고, 전체 금액을 WJ 스튜디오에서 부담하는 겁니다.”
의외의 제안에, 이번에는 우진이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소정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저희는 세트장 비용을 아끼는 대신, 세트장 부지로 매입했던 땅을 대표님께 저가에 매각하고 추가로 드라마 지분을 조금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추가 지분이라는 건…….”
이미 계산을 끝낸 소정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였다.
“최대 2~3퍼센트 정도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실까요?”
“구체적인 계약서를 작성해 봐야 하겠지만…….”
모든 그림이 깔끔하게 머릿속에 그려진 우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한번 그 방향으로 진행해 보죠.”
서로 원하는 부분을 깔끔하게 확보한 두 사업가가, 서로를 마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