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83화 (183/315)

183화

인연의 연결고리

우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벨로스톤즈의 대표 민주영이었다.

WJ 스튜디오의 설립 초기, 우진이 천웅건설의 모델하우스 외주를 맡았을 때.

최고급 대리석인 로소 레판토의 공급을 도와줬던 신생 자재업체의 대표 민주영.

그녀와 벨로스톤즈는, 그때 이후로도 WJ 스튜디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WJ 스튜디오는 갈수록 더 많은 인테리어 현장을 시공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고급 수입 자재가 필요한 현장도 제법 많았으니.

그때마다 벨로스톤즈와 협업하여, 고급 대리석과 목재들을 수입해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협업 관계에도 불구하고, 민주영을 만난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벨로스톤즈의 본사는 인천에 있었고, WJ 스튜디오가 성장하는 것처럼 벨로스톤즈도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중이었으니.

협업을 한다고 한들 그녀가 서울로 직접 건너오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얼굴을 이렇게 마주보게 된 것은, 거의 반년 만의 일이었다.

“이야, 민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후훗, 제가 뭐 못 올 곳을 왔나요?”

그래도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통화한 탓에 목소리 자체는 아주 익숙한 주영.

“하하, 그런 의미 아닌 것 아시지 않습니까. 바쁘신 분이 이렇게 갑자기 얼굴을 보여주시니, 반가워서 그러지요.”

“그런가요? 흐흐, 저도 대표님 오랜만에 뵈니 꽤 반갑네요.”

민주영과 간단하게 대화를 나눈 우진은, 차에 다시 오르는 대신 인근 카페로 향했다.

사옥 현장의 바로 옆이나 다름없는 서울숲 길에는 조용한 카페가 곳곳에 있었으니,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할 생각으로 말이다.

우진은 오랜만인 민주영이 순수하게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녀가 어째서 갑자기 찾아왔는지가 더 궁금했다.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으려나?’

그리고 민주영은, 우진의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 *

고즈넉한 분위기의 서울숲 길을 지나 카페에 들어서자, 고소한 커피향이 코끝을 찌른다.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빈티지한 카페.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과 작은 치즈케잌 한 조각이 나왔고, 그것을 한 입씩 떠먹으며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민 대표는 지난번에 봤을 때처럼, 여전히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오늘 용산에서 좀 중요한 미팅이 있었거든요. 서울 온 김에 오랜만에 서 대표님 얼굴도 뵐 겸 여기까지 온 거고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차가 밀리는 바람에 일곱 시가 넘어버렸네요.”

“미리 전화 주시지. 그랬으면 사무실에서 기다렸을 텐데요.”

“흐흐, 항상 야근하시니까, 사실 사무실에 계속 계실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은 커피를 홀짝이며, 간단한 안부 인사부터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화의 주제는 금방 일적인 부분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민 대표님, 용산에서 있었다는 중요한 미팅은 뭘까요?”

우진이 운을 떼자, 민주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궁금해하실 줄 알았어요.”

“처음부터 그게 본론 아니었나요?”

“눈치는 역시 빠르시다니까.”

주영은 치즈케잌을 한 입 떠먹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대표님 혹시 매년 코엑스에서 리빙 페어(Living Fair)가 열리는 건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저희 업체도 작년부터 거기에 출품했는데, 올해 전시에서 일이 좀 잘 풀렸거든요.”

민주영이 말하는 리빙 페어란, 매년 삼성동의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 리빙 디자인 페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인테리어 업체부터 시작해 민주영의 벨로스톤즈처럼 자재를 취급하는 업체들.

그리고 다양한 가구를 디자인하는 가구업체들까지.

말 그대로 주거(Living)와 관련된 모든 분야의 업체들이 자신들의 제품과 기술을 전시하는 곳이 리빙 페어였고.

때문에 이것은 우진도 관심이 있었던 행사 중 한 곳이었다.

‘2012년부터는 WJ 스튜디오도 참가하려 했었지.’

그래서 우진은 민주영이 운을 떼기 시작한 순간부터, 슬슬 흥미가 동하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잘 풀리셨는데요?”

우진의 물음에, 주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사실 제 자랑이기는 한데요.”

“하하, 얼마든지 자랑하셔도 됩니다. 자랑 값으로 커피 정도는 사주시겠죠 뭐.”

“히히 물론이죠.”

잠시 뜸을 들인 주영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저희가 이나트(Inart)라는 가구회사랑 콜라보해서, 저희 자재 전시부스 옆에 프리미엄 가구 전시를 했는데요.”

우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요?”

“그게 해외 바이어들 쪽에서 반응이 엄청 좋았거든요.”

우진은 가만히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고, 민주영은 뿌듯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전시됐던 가구들은 전부 다 팔렸고, 추가 발주가 엄청 쌓였을 정도예요.”

우진은 이번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사실 리빙페어에 전시된 가구들이 전부 다 팔렸다는 사실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는데, 추가 발주가 쌓였다고 표현할 정도면 대박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저가형 DIY 가구들도 아니고 민주영이 취급하는 최고급 자재들로 만들어진 프리미엄 가구들이라면 최소 수백만 원대 이상을 호가하는 물건들일 터.

그런 물건들이 싹 다 팔려나갔다는 것은, 전례 없는 수준의 흥행일지도 몰랐다.

‘이나트가 모던하고 깔끔하게 디자인 잘 뽑아내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나트의 가구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우진은, 이 흥행의 지분 절반 이상이 민주영의 능력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기존에 이나트에서 출시하던 가구들의 디자인이라면, 깔끔하고 세련되었을지언정 특별함은 부족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단하네, 민 대표.’

하지만 민주영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훗, 너무 자랑만 해서 조금 민망하긴 한데, 본론은 이제부터에요.”

“아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습니다, 대표님. 계속하시죠.”

우진의 기분 좋은 리액션에, 민주영은 더욱 신이 난 목소리가 되었다.

“저희 쪽 부스가 워낙 크게 흥행하다 보니, 이게 주최 측에까지 얘기가 들어갔나 봐요.”

“주최측이라면……. 서울 디자인 재단이요?”

“네. 그렇죠. 잘 아시네요.”

“그래서요?”

우진은 서울 디자인 재단을 잘 알 수밖에 없다.

그곳이 바로 우진이 처음 디자이너로서 데뷔한, SPDC공모전의 주최이기도 했으니까.

“오늘 미팅이 바로 이사장님 미팅이었어요. 서울 디자인 재단에서 크게 기획 중인 리빙 페어가 하나 있는데, 이게 12년 여름쯤에 코엑스에서 열릴 모양인가 보더라고요.”

우진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리빙페어가 가을인데, 그럼 내년은 페어를 두 번 여나 보죠?”

“그런 셈이죠. 원래 매년 열리던 페어는 가을에 그대로 열리고, 여름에 오픈할 페어는 국제 규모로 엄청 크게 오픈할 모양인가 보더군요. 아마 그 시점에 코엑스에서 K-POP 관련된 공연 전시가 크게 열리는데……. 국제적인 관심이 몰리는 상황에서 디자인재단 측에서도 시너지를 내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어요.”

이야기가 꽤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아직 민주영이 하려는 이야기가 어떤 것일지 정확히 예측되지 않았다.

‘그 페어가 나를 만나러 온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그런데 우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민주영의 입에서 곧바로 본론이 튀어나왔다.

“여튼 그래서 이사장님 말로는 메인 부스가 크게 두 파트 세팅될 예정이라는데……. 이 두 곳 중 하나를 저희 벨로스톤즈에 주시겠대요.”

“……!”

“대신 이번 페어는 공간디자인 위주의 페어라서, 가구만으로 부스를 꾸미는 건 안 된다고 하구요.”

여기까지 들은 순간, 우진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성수동까지 한달음에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한테 콜라보를 제안하려는 건가?’

그리고 그 짐작은, 아주 정확하였다.

“주제에 맞춘 컨셉 부스로, 이스트 부스 1/3 규모의 공간을 저희 쪽에 줄 것 같아요. 그래서 공간디자인을 아주 기깔 나게 해 줄 업체가 한곳 더 필요하게 생겼는데…….”

말꼬리를 조금 흐린 민주영이, 눈웃음을 치며 우진을 바라보았다.

“일단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얼굴이 우리 서대표님 얼굴이었거든요.”

우진도 마주 웃었다.

“하핫, 이거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민주영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어때요. 한번 같이 해보실래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 우진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년 여름 국제 리빙페어라……. 참가해서 나쁠 거야 전혀 없겠지만,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하는 이벤튼데…….’

WJ 스튜디오의 일정부터 시작해서 우진의 개인 스케줄까지.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많았으니, 곧바로 대답부터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민하던 우진은 순간 뭔가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는지, 주영을 향해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민 대표님.”

“네?”

“그 ‘주제’라는 게 혹시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우진의 물음에 민주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고…….

“이게 결국 주체 기관이 공기관이다 보니까, 국제적으로 한국의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느낌이면 어떤 주제든지 상관없나 봐요.”

“그래요?”

“하지만 제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죠. 한번 정해지면 이스트 부스는 전부 다 비슷한 컬러로 디자인 컨셉을 맞춰줘야 할 테니까요.”

“그럼 민 대표님 쪽에서 제안을 하고, 디자인 재단이랑 회의를 해야겠네요?”

“아마 그런 방식으로 진행될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 우진은 몇 가지 퍼즐 조각이 한 데로 모이는 느낌이었다.

“한국의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컨텐츠라…….”

“그래서 저는 전통건축 느낌의 컨셉도 조금 생각해 봤어요. 자재 수입 업체인 저희 기업 색깔이랑은 좀 안 맞기는 한데……. 해외에서 수입한 자재로 전통의 느낌을 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일 테니까요.”

“맞는 말씀이시죠. 이국적인 자재를 활용해서 한국적인 디자인을 뽑아내는 프로젝트가, 어쩌면 이 전시의 컨셉에 오히려 더 잘 들어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진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민주영은, 좀 더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지난 일 년 동안 WJ 스튜디오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전부 다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때문에 이번 프로젝트를 꼭 우진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 대표가 공간디자인을 맡아 준다면, 진짜 그럴싸한 작품이 하나 탄생할지도 몰라.’

그리고 주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 순간.

우진은 이미 마음을 정한 뒤, 한 걸음 더 나아간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럼 민 대표님.”

“네?”

“저희는 이 프로젝트에, ‘컨텐츠’를 더해보는 건 어떨까요.”

뜬금없는 우진의 이야기에, 아리송한 표정이 된 민주영.

“컨텐츠 라면…….”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우진이, 은근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로 주최 측에서 원하는 주제라는 게, ‘한류(韓流)’라는 단어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요.”

지금 우진의 머릿속에 떠올라 있는 한 사람은 바로 KSJ엔터의 강소정 대표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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