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74화 (174/315)

174화

좋은 사람들

다음날 출근한 우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대표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설계도면이었다.

정확히는 최근 그 설계도면 위에 항상 떠올라 있었던, 우진의 조력자인 골든 프린트.

당연히 책상 위에서 빛나고 있을 줄 알았던 골든 프린트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던 것이다.

‘골든 프린트가…… 사라졌어?’

그래서 의아해진 우진은 다른 도면들도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골든 프린트는 찾을 수 없었다.

더욱 의아한 것은, 출근길에 지나온 현장에는 여전히 골든 프린트가 빛나고 있었다는 점.

“흠.”

하지만 의문도 거기까지일 뿐, 우진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어제부로 설계는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시공뿐이었으니까.

현장의 골든 프린트는 왜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제 골든 프린트로부터 뽑아먹을 것은 전부 뽑아먹었다고 생각한 우진이었다.

그래서 우진의 관심은 곧, 절전상태가 되어 꺼져 있는 모니터를 향해 옮겨갔다.

까만 모니터가 켜지면, 그 안에 완성되어있을 WJ 스튜디오 신사옥의 3D 랜더링 투시도.

‘잘 뽑혔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우진은, 오른손으로 잡은 마우스를 가볍게 딸깍였다.

그러자 다음 순간.

지잉-

우진의 지난 한 달간의 모든 노력과 정수가 담긴 단 하나의 건축물이, 그의 눈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그리고 한참 동안.

모니터에 고정된 우진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우진은 단순히 추측 정도만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골든 프린트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진의 설계가 골든 프린트의 기준을 넘어섰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간밤에 우진의 설계도에서 사라진 골든 프린트는 완벽하게 모델링된 우진의 3D 파일로 빨려 들어갔고.

그 말인즉 우진의 최종 디자인이 골든 프린트의 기준을 넘어섰다는 말이었다.

물론 골든 프린트의 기준을 넘었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이며 완벽한 디자인은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어떤 하나의 답을 정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최고의 디자인 반열에 들 수는 있다는 의미였고, 그래서 우진이 3D랜더링을 통해 뽑아낸 조감도는 멋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직접 디자인한 우진조차도, 감격스러울 만큼 말이다.

‘됐어. 됐다고……!’

머릿속으로 막연히 상상하던 뷰가 담긴 추상적인 그림을 이렇게 구체화 시켜서 조감도로 확인하자.

우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설계를 구체화 시켜서 실시설계 도면으로 만들고.

얼른 현장에 삽을 떠서 완성된 건물로 만들어서 영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우진은 곧바로 석현을 불렀다.

석현에게 이 조감도를 보여준 뒤, 착공까지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세워 볼 생각이었다.

그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당연히 다른 WJ 스튜디오의 직원들에게도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사옥 디자인을 뽑아내는 동안 자신과 함께 가장 많은 고생을 한 석현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석구 반응이 궁금하네.’

마침 랜더컷이 궁금했던 석현은 우진의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고.

모니터에 띄워진 그림을 보는 순간, 처음 그것을 확인했던 우진과 마찬가지로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

그렇게 잠깐 동안 입을 다문 채로, 우진과 함께 조감도를 감상한 석현.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 이대로 지을 수 있겠지?”

우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 * *

8월이 됐다.

그리고 어느새 셋째 주가 되었다.

항상 이쯤 되면 느끼는 거지만, 올해 여름이 가장 더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어컨 앞에서 간단하게 브런치를 먹은 재엽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오랜만에 방송국 스케줄이 없는 오늘이었지만, 오후에는 약속이 있었다.

‘짜식들 오랜만에 보겠네.’

오늘 재엽이 만나기로 한 사람은, 리아와 수하. 그리고 우진이었다.

처음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 한 팀이 되며 친해졌던 그들은, 이제 프로그램과 관련 없이 재엽의 가장 친한 그룹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우진은 이미 몇 달 전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리아도 바빠진 해외 일정 때문에 얼마 전부터 다른 연예인으로 교체되었다.

때문에 이제 <재엽 팀>은 수하를 제외하면 완전히 다른 구성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기존 멤버인 이 네 명이 가장 편한 재엽이었다.

“어, 형. 나 오늘은 그냥 내 차로 움직일 테니까, 형은 신경 쓸 거 없어.”

[다음 주부터 바쁘니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 윤재엽.]

“오늘은 리아 수하 만나니까, 술 많이 마실 일 없습니다요. 걱정 마쇼.”

[임수하 배우님 지난번에 보니까 말술이시던데…….]

“……어쨌든 걱정 말고 형 편하게 일 봐.”

[그려.]

나가는 길 매니저와 가볍게(?) 통화한 재엽은, 차를 몰고 성수동으로 향했다.

사실 네 사람이 모두 모이기로 한 곳은 언제나처럼 신사동이었지만, 리아와 수하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차는 별로 막히지 않았고, 재엽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재엽이 사는 압구정에서 성수동까지는, 성수대교만 건너면 코앞이나 마찬가지였다.

끼익-

WJ 스튜디오가 있는 지식산업센터 주차장에 차를 댄 재엽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14층으로 향했다.

우진의 사무실에는 이번이 두 번째 오는 거였지만, 딱히 헤맬 일은 없었다.

14층의 절반 이상이 WJ 스튜디오의 사무실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우진의 대표실은 엘리베이터 바로 앞 호실이었으니까.

띵-!

그래서 어렵지 않게 우진의 사무실을 찾은 재엽은, 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는 중이던 우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하였다.

“여, 브로!”

“형 일찍 왔네?”

“점심 먹고 나서 온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디 가는 중이야?”

“아, 오늘 낮에 잠깐 행사가 있어서.”

“뭐?”

우진의 이야기를 듣던 재엽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분명히 우진이 낮 시간에 와도 된다고 해서 찾아온 건데,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그런 재엽의 기색을 느낀 우진이, 오해를 풀기 위해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 사실 형이 이렇게까지 일찍 올지 모르고, 그쪽 현장으로 바로 오라고 할 생각이었어.”

“응……? 무슨 현장인데? 내가 가도 되는 곳이야?”

우진이 씨익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WJ 스튜디오 신사옥 착공식이랄까……?”

“어?”

재엽을 잡아끌어 다시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우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반문하였다.

“내가 말한 적 없었나?”

사실 오늘 우진은, 재엽이 성수동으로 오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워놓았었다.

그를 신사옥 착공현장으로 불러서, 테이프 커팅을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없지 짜샤! 신사옥이라고? 너네 회사 건물 짓는 거야?”

“그런 셈이지.”

대형 건설사의 기공식이나 착공식처럼 거창하게 진행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지도 있는 국민 연예인인 재엽이 테이프를 끊어준다면 직원들의 사기 증진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재엽이 커팅위원 중 한 명으로 우진과 함께 테이프커팅을 해준다면, 다들 좋아할 게 분명하였다.

‘리아 누나나 수하 누나도 왔으면 남자직원들이 난리 났겠지만……. 일정이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서 우진은 재엽에게 간단히 설명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재엽은 고무적인 표정이 되었다.

“이야, 서우진. 대박이네.”

“대박은 무슨.”

“너 회사 차린 지 이제 일 년 좀 넘은 거잖아.”

“그렇지?”

“맨땅에서 시작해서 사옥 지을 정도로 회사를 키웠으면, 대단한 거지 인마.”

“흐흐, 운이 좋았을 뿐이야.”

재엽은 우진의 등을 팡 때리며 상기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착공식이면, 오늘부터 짓기 시작한다는 거지?”

“맞아. 오늘 첫 삽 뜰 거야.”

“크……! 부라더 너무 멋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흥분한 재엽을 보며,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뭘 생각하길래 이렇게 기대하는 거야?’

사실 WJ 스튜디오 신사옥 건물의 규모가 그렇게까지 큰 것은 아니었는데, 재엽의 반응을 보면 거의 강남대로나 테헤란로의 마천루 같은 대형 빌딩을 떠올리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의 생각과 달리, 재엽이 흥분한 이유는 이 행사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친한 지인이자 동생인 우진이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어떤 대리만족 같은 것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진짜 난놈이라니까. 난놈.’

사실 재엽은 어릴 적부터, 사업가셨던 아버지의 흥망성쇠를 이십 년이 넘도록 지켜 봐왔다.

그래서 이렇게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그들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재엽 또한 연예인으로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것과 또 결이 다른 성공인 것이다.

그래서 재엽은 우진의 차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하면서도 계속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신사옥은 몇 층짜리 건물이야?”

“13층이야.”

“오……! 그런데 그 정도면, 너희 직원 규모에 비해 너무 큰 거 아니야?”

“응?”

“지식산업센터 한 층도 다 못 채우잖아 너희.”

“아……. 얼마 전에 성진건설이라고, 건설사 하나 인수했거든.”

“뭐……?!”

“이제 우리도 직원 백 명은 넘어.”

“와……! 대박! 이럴 줄 알았으면 형이 사회라도 봐 주는 건데.”

“에이, 그렇게까지는…….”

“지금이라도 어때? 애드립으로 해줄게. 페이는 원래 받는 수준의 절반으로.”

“됐습니다, 고갱님.”

재엽과 함께 현장에 도착한 우진은, 현장사무실의 앞에 차를 대고 기분 좋게 내렸다.

그러자 재엽을 알아본 진태가, 반갑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였다.

“하하, 바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 오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추한 곳이라니요. 실장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십니다.”

연배가 비슷한 둘은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서 따로 사회자도 없었던 착공식의 간단한 식순을 확인한 재엽은, 테이프커팅 뿐 아니라 사회까지도 봐 주었다.

[이거, 대표님이 돈을 너무 아끼시는데요. 저 오늘 행사비도 못 받고 자원봉사 나왔습니다.]

“프하하핫.”

[제가 딱히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착공식이면 제사 같은 것도 지내고, 축하 공연 같은 것도 하고 어!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즉석에서 사회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연예인이라는 클래스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물 흐르듯 행사를 진행하는 재엽.

[여튼, 대표님. WJ 스튜디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재엽 씨.]

[WJ 스튜디오가 세계적인 건축사무소가 되고 나면, 대표님께서 제 집도 한번 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하하.”

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WJ 스튜디오의 첫 번째 착공식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성진건설과 합병된 이후로 처음 한자리에 모인 WJ 스튜디오의 전 임직원들은, 다들 진심으로 신사옥이 멋지게 완공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끝나자 시간은 대략 오후 5시 정도.

저녁에는 전 임직원들의 회식을 위해 통째로 고깃집을 대관해 두었지만, 우진은 처음부터 거기서 빠질 생각이었다.

“진태 형, 잘 좀 부탁해.”

“그래. 이 기회에 다들 친해져야지.”

“회식 다 끝나면 나한테 연락 한번 주고.”

“그런데 넌 왜 빠지는 거야?”

“내가 있으면 다들 불편하잖아. 기존 우리 직원들이야 괜찮지만, 성진 쪽에서 넘어오신 분들은 어린 대표님이 부담스러울 거야.”

재엽 리아 수하 등과 약속이 있어서 빠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회식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약속도 잡은 것이었으니까.

다만 새 식구들이 WJ 스튜디오에 융화되는 과정에서, 좀 더 거부감을 줄일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그래, 뭐. 네 뜻이 그렇다면야.”

그래서 사무실에 돌아온 우진은, 간단하게 대표실에서 짐을 챙긴 뒤 이번에는 재엽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재엽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형.”

조금 낯간지럽지만, 우진의 진심이 담긴 한 마디.

“별말씀을.”

우진은 오늘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회귀 후 우진에게 생긴 가장 큰 자산은, 미래의 지식도, 골든 프린트도 아닌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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