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73화 (173/315)

173화

흐름을 타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흐름은 결국, 하나로 통일된다는 말.

지금 우진의 상황이 그러했다.

패러필드에 설치할 파빌리온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성수동에 새로 짓게 될 WJ 스튜디오의 신사옥.

그리고 오늘 조운찬 교수를 통해 얻게 된, SH물산의 첨단기술사업부 인맥.

마지막으로 아직 우진은 알지 못하지만, 브루노와의 통화 이후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은 스페인의 건축가 마테오까지.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들이었으며 표면적으로 보기에도 연관성 없어 보이는 독립적인 사건이었지만.

결국 우진이 지향하는 하나의 방향성 안에서 같은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디지털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 시점에, 우진은 자신의 건축디자인 색깔을 그 안에서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잘 풀릴 줄은…….’

물론 우진의 생각과 달리 이 중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운만으로 이뤄진 일이 없었지만 말이다.

첫째로 우진이 청담 선영의 수주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나아가 투자를 성공시켜내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신사옥을 지을 부지를 매입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청담 클리오 써밋의 설계대금이 기본적으로 WJ 스튜디오를 급성장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며.

그 돈을 다시 투자하여 배 이상 불려냈기 때문에 수십억 이상이 필요한 사옥신축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두 번째로 우진이 미래의 지식과 열정으로 패러마운트사의 로비를 밝혀내지 않았더라면, 파빌리온을 디자인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또 브루노에게 이렇게까지는 신임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며.

그랬더라면 브루노는 마테오에게 우진을 소개시켜주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진이 자신의 열정과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조운찬에게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있었던 SH건설 임강석과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조운찬이 제자인 우진을 아낀다고 하여도, 일개 학부생에게 SH물산이라는 대기업을 연결해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우진이 해왔던 모든 일들은, 결국 그가 추구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왔다고 할 수 있었다.

‘임강석과 SH건설이라……. 이쪽에서 3차원 도면으로 설계된 비정형 건축에 대한 시공이 해결된다면, 디지털 건축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더 든든한 지원군은 없겠지.’

당장 우진이 진행 중인 모든 프로젝트에, 큰 힘이 되어줄 게 분명한 SH물산의 기술력.

물론 오늘 한 번 본 것으로 임강석이 우진의 인맥이 된 것은 아니겠지만, 일단 물꼬를 튼 이상 우진은 자신이 있었다.

이 또한 서우진이라는 디자이너와 WJ 스튜디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될, 하나의 포석으로 만들 자신 말이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표님.]

[이거……. 작업물 받아보시고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하하 글쎄요. 조운찬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제가 실망할 일은 아마 없지 싶은데 말입니다.]

임강석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우진의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SH건설의 시공관계자 임강석은, 우진의 작품을 진심으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 자체가 원래 디지털 건축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사업부의 입장에서도 우진과 같은 가능성 넘치는 인재를 알아두는 것이 나쁠 리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진은 오늘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제이든, 소연과 선약(?)이 있는 우진과 마찬가지로, 조운찬 교수와 임강석도 선약이 있었다.

정확히는 오늘 조운찬이, SH건설의 실무진들과 현장 점검 이후 회식 약속이 잡혀 있었고.

아무리 우진이 뛰어난 인재이며 조운찬의 제자라고 한들, 그 자리에 덜컥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회식 일정 덕분에 임강석이라는 사람이 오늘 학교에 방문했던 거라니까……. 더 아쉬워할 필욘 없겠지.’

소연, 제이든과 함께 순살치킨을 시켜 맛있게 저녁을 해결한 우진은, 아주 기분 좋게 집으로 귀가했다.

예상치 못했던 조운찬의 선물 덕에,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 우진이었다.

* * *

임강석과의 만남이 있었던 뒤로, 또 일주일 정도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우진은 파빌리온의 디자인과 설계에도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바로 WJ 스튜디오 신사옥의 디자인과 설계였다.

물론 파빌리온도 일정이 그렇게 넉넉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WJ 스튜디오의 신사옥이, 당장 8월 말 9월 초 정도에 착공 일정이 잡혀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7월 중순 안으로 기본설계는 끝나야, 8월까지 실시설계를 마무리하고.

늦더라도 9월 초에 착공이 시작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오늘도 우진은, 대표실에서 머리를 끙끙 싸매며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난달부터 우진의 옆에 붙어서, 비주얼 스크립트 알고리즘 제작을 담당 중인 석현과 함께 말이다.

“흐으…….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디자인’은, 많은 노력과 열정을 투여할수록 더 큰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분야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욕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우진이 자신의 첫 번째 사옥을 설계하고 있었으니.

쉽게 결론이 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우진아, 네가 원하는 파노라마 패턴을 완성 시키려면, 결국 2층, 3층 평면의 일부를 포기해야 해.”

“1층 층고를 아무리 높여도, 천장을 뚫지 않고는 각도가 안 나오겠지?”

“그렇다니까.”

“연면적에서 손해를 좀 보더라도, 역시 디자인 컨셉을 더 살리는 게 맞겠네.”

“난 그렇게 생각해. 면적 줄었다고 뭐라고 할 클라이언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회사 사옥이잖아? 뭐 줄어든 면적만큼 임대수입이야 줄어들겠지만…….”

석현과 얘기하던 우진이, 펜을 빙그르르 돌리며 피식 웃었다.

“줄어든 임대수입만큼 석구가 더 열일해서 벌어다 주겠지 뭐.”

“아 놔, 대표님 이거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서로 마주 보며 한 차례 낄낄거리며 웃은 두 사람은,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추 윤곽이 나오기 시작한 사옥의 디자인을 보고 있자면, 벌써부터 뿌듯한 기분이 드는 우진이었다.

‘입구부터 시작해서 로비, 그리고 계단실까지. 이런 모양으로 창이 뚫리면, 유저 동선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는 인터렉티브한 패턴이 만들어질 수 있을 거야.’

우진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설계도를 보며, 문득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골든 프린트를 연구하고 그 비밀을 알아낸 뒤, 옐로페이퍼에 그려냈던 아이디어스케치와는 확연히 달라진 파사드의 디자인.

디자인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일정 부분을 구체화 시킬 때마다 또 새로운 가능성과 여지를 만들어내었고.

설계가 7할 이상 완성된 오늘까지도,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창을 통해 실내에 떨어져 내리는 빛을 가지고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활용한 빛의 패턴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추가되었고, 나아가 ‘동선’이라는 개념이 또 추가되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채광의 방향.

유저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일 패턴의 모양.

이 요소들까지 전부 어우러져, 가변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설계로 진화한 것이다.

이런 복잡한 설계는 사실 골든 프린트라는 우진만의 사기적인 무기와 석현이라는 천재적인 조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 이전에 우진이 가진 특별한 디자인 철학과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있었기에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빨리 다 지어서 완공된 모습을 보고 싶네.’

그런데 우진이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때.

한참 마우스를 딸깍이던 석현이 문득 우진을 다시 불렀다.

“야 근데 우진아.”

“응?”

“이거 네가 얘기한 대로 정확하게 외벽에 창을 만들 수 있긴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정말 이렇게 창을 뚫으면, 네가 말한 대로 정확히 그 위치에 빛의 패턴이 만들어질까?”

석현의 물음에, 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알고리즘으로 계산한 거잖아. 정확한 거 아냐?”

석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계산이야 정확하지만, 그 전에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해.”

“그게 뭔데?”

“우리 사옥이 지어질 위치의 위도와 경도가 정확하다는 것. 그리고 주변 지형지물이라는 변수가 네가 설계한 빛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것.”

“아하.”

“아무리 설계를 잘해놔도, 애초에 다른 지형지물에 가려서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석현의 말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현장을 유심히 관찰하고 치밀하게 알고리즘을 짠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우진이 의도한 대로 건축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으니 말이다.

일단 석현이 말한 변수 중 하나인 지형지물부터가 실제로 건축이 올라가기 전에 완벽하게 고려하기 힘든 부분인 게 사실.

물론 석현이 골든 프린트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걱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이 많은 석현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현장에서 직접 실측 수도 없이 한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만들어 줘.”

“조금이라도 각도가 어긋나면 패턴 찌그러지는 거 알지?”

“글쎄, 안다니까”

“시공도 걱정이네.”

“현장에 내가 매일 나가볼 거니까 걱정하지 마셔.”

“휴우. 알겠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또 지났다.

석현과 우진은 계속해서 의견을 조율하며 설계를 수정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과정에서 골든 프린트의 존재를 모르는 석현은, 우진의 정확한 계산에 여러 번 놀라야 했고 말이다.

“와 씨, 진짜 네 말 대로네?”

“그렇지?”

“서우진 공간지각능력 미쳤네. 이걸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계산해서 맞춘다고?”

“정확한 계산까진 아니고, 감이지. 감.”

“뭐가 됐던!”

그때마다 우진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골든 프린트가 알려준 솔루션을 석현에게 납득시키려면, 그때마다 천재인 척(?)해야 했으니 말이다.

시간 낭비 없이 완벽한 설계를 뽑아내기 위해서 필연적인 과정이었지만, 조금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이런 과정들 속에서 두 사람이 얻은 것은, 그저 사옥 설계도면이 완성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알고리즘을 활용한 실제적인 설계는 두 사람 모두 처음이다 보니, 이 설계 과정에서 수많은 노하우가 쌓인 것이다.

하여 이렇게 일주일 정도가 더 지났을까?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드디어 WJ 스튜디오 신사옥의 기본설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기본설계가 완벽하게 나왔다는 것은, 완공됐을 때 사옥이 어떤 모습일지 투시도를 정확하게 뽑아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 이거 최종파일이다.”

“오케이. 이거로 렌더 뽑아볼게.”

“으, 진짜 그림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네.”

“아무리 렌더를 잘해도, 실제 시공된 거랑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 알지?”

“내가 무슨 바보냐?”

그래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모델링 파일을 랜더링 프로그램으로 옮긴 우진은, 구조물 하나하나에 생각해뒀던 재질을 꼼꼼하게 맵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맵핑 작업이 끝난 뒤.

우진은 대표실 컴퓨터에 맵핑된 파일을 띄워서, 랜더링 버튼을 클릭하였다.

딸깍-

[Rendering…….]

하지만 두 사람이 그 즉시 랜더 컷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거 얼마나 걸려, 우진?”

“글쎄. 꽤 오래 걸릴걸? 최소 다섯 시간?”

“뭐라고? 네 컴퓨터 그래픽카드 좋잖아.”

“그래도, 설정을 워낙 쎄게 때려 박아놔서…….”

우진이 설계한 건축물은 빛의 세심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아주 중요한 디자인이었고.

때문에 컴퓨터가 그 모든 빛의 설정을 계산해서 랜더컷을 뽑아내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단 오늘은 퇴근하자.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 완성되어 있겠지 뭐.”

“그래. 지금이 일곱 신데, 열두 시까지 기다릴 수는 없겠지.”

“열두 시에 다 된다는 보장도 없어.”

그래서 두 사람은 우진의 컴퓨터를 그대로 켜둔 채, 대표실 불을 끄고 일단 퇴근하였다.

이제 둘이 퇴근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동안, 우진의 컴퓨터가 열심히 일해 줄 것이었다.

우우우웅-

우진과 석현이 떠난 자리.

열심히 돌아가는 쿨러도 소용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우진의 컴퓨터.

그리고 그렇게 밤이 깊어갈 즈음.

대표실에 울려 퍼지던 요란한 소리가, 이내 조용히 잦아들었다.

위이이잉- 툭-

또, 그와 동시에…….

스하아아아-!

우진의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도면 위에서, 황금빛 아지랑이가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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