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64화 (164/315)

164화

작은 건축

제이든은 오랜만에 우울했다.

“석현은 너무해.”

“뭐가?”

“Boss만 너무 편애한다고.”

“내가 언제?”

“나도 Parametric Design을 분명 잘할 수 있었을 거야.”

“정말?”

“석현이 도와줬다면 말이지.”

“흠…….”

“왜 나한테는 저렇게 멋진걸 알려주지 않은 건데?”

“그야, 네가 싫다고 했으니까.”

* * *

유리아의 카페 프레스코 루프 탑.

여느 때처럼 모델링 공부를 위해 노트북을 들고 이곳에서 만난 제이든과 석현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바로 어제 있었던 디공디 수업.

정확히는 우진에게만 좋은 것(?)을 알려준 석현을, 제이든이 원망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What?! 내가 언제! 제이든은 그런 적 없어!”

“아냐. 분명히 그랬어. 재현해줘?”

“……!”

억울한 표정의 제이든을 마주 보며, 석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제이든을 연기하였다.

“석현……. 제이든에게 이런 복잡한 수식은 필요 없어. 제이든의 모델링 실력은 이미 완성됐으니까.”

“제이든이 그랬다고?”

“그래. 제이든이 그랬어.”

“젠장! 제이든은 쓸데없이 관대해.”

“그럴 때는 관대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어리석다고 하는 거야, 제이든.”

찌그러진 찐빵마냥 구겨진 제이든의 표정을 보며, 석현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제이든을 놀리는 것은, 언제나 삶의 활력소였다.

“그나저나 우진은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우진에게 또 뭘 가르쳐주려고.”

“가르쳐주긴 뭘 가르쳐줘. 같이 만들어보고 싶은 알고리즘이 있을 뿐이야.”

“Holy! 그런 게 있으면 나도 같이 만들어야지!”

“완성된 디자이너인 제이든에겐, 딱히 필요 없는 잡기술일 뿐인걸?”

“Bloody Hell!!”

잔뜩 흥분상태가 된 제이든과, 그런 제이든의 반응이 너무도 재밌기만 한 석현.

그들이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사이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가 나왔는지 부저가 울렸고.

제이든은 툴툴거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디저트를 가져왔다.

언제나처럼 초코 쉬폰 케익을 주문한 제이든은, 그것을 엄청난 속도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이다.

“제이든, 왜 이렇게 뿔이 났어?”

석현의 물음에 제이든이 대답했다.

“제이든에게는 뿔이 없어.”

“……. 케잌 먹는 걸 방해해서 미안해 제이든.”

순식간에 디저트는 물론 커피까지 전부 다 흡입해버린 제이든은,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뒤늦게 우진이 도착하였다.

“다들 와 있었네. 그럼 시작해 볼까?”

* * *

오늘 우진이 석현‧제이든 듀오와 만난 것은, 꽤나 중요한 일 때문이었다.

‘디지털 건축을 향한, WJ 스튜디오의 첫걸음이라고 해야 하나?’

5월이 된 지금. 왕십리 패러필드의 설계변경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브루노가 디자인했던 기존의 설계안을 기준으로, 패러마운트 사의 실무진들과 설계조율이 거의 끝나가는 것이다.

설계에 대한 최종 조율이 끝난다는 말은, 이제 모든 구조가 픽스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것은 곧, 메인 로비에 들어갈 파빌리온의 설계를 드디어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였다.

파빌리온이 들어갈 구체적인 위치와 공간의 크기, 주변에 위치하게 될 매장들과 구조물들의 디자인 등.

이 모든 것이 이제 준공될 때까지, 변동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패러필드의 예상 공기(공사기간)는 일 년 정도……. 파빌리온은 준공예정일로부터 한 달 정도 전쯤 설치해야 할 테니, 늦어도 올가을까지는 디자인‧설계를 끝내야 해.’

그리고 우진은 이번에 디공디의 중간과제를 준비하면서, 석현과 제이든에게서 꽤 큰 가능성을 보았다.

우진이 원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과 디지털 건축에, 두 사람의 능력이 크게 도움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파빌리온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알고리즘과 솔루션을 조운찬 교수에게만 의존하려 했었지만.

생각보다 뛰어난 포텐을 보인 두 사람 덕에, 자체적인 연구개발 계획까지 세울 수 있게 됐던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운찬 교수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교수님의 지원을 더 극대화시킬 수 있게 된 거지.’

우진이 생각하는 석현과 제이든의 역할은 조금 달랐다.

석현의 역할이 알고리즘을 짜고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제작’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건축업계에서는 디자인된 결과물을 실제 건축물로 현실화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한다.]에 대한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제이든의 역할은 컨셉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더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조형을 그려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은 이 두 사람을, 장기적으로 키워볼 생각이었다.

제이든이야 아직 학생인 데다 브루노의 스튜디오에서 인턴 중이기에 본격적으로 고용할 수는 없지만.

석현의 포지션은 슬슬 모형 파트의 총 책임자에서 빼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진.”

“응?”

“오늘 우린 뭘 하려고 모인 거야?”

제이든의 물음에,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음……. 파빌리온 디자인 설계의 시안을 짜기 위한, 디자인 기술 R&D(연구개발)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네.”

“Research and Development?”

“뎃츠 롸잇.”

“제발, 그렇게 구린 발음으로 영어를 모독하지 말아줘, Boss.”

“뭐, 뜻이 통했으면 된 거 아냐?”

어깨를 으쓱한 우진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비전에 대해 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에 석현은 아주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경청하였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이 댓 발은 나와 있던 제이든 또한, 어느새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진의 말대로라면……. 이 제이든 님이 WJ 스튜디오의 디자인 기술연구소장이 되는 거야?!”

“연구소장은 석현이지.”

“Holy! 그럼 제이든은?!”

“음……. 너는 디자인 총괄 디렉터를 해보는 게 어때?”

“디자인…… 총괄 디렉터?”

“WJ 스튜디오 디자인 R&D팀의, Chief Director가 되는 셈이지.”

“젠장! 멋지잖아?!”

우진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흥분한 제이든이 방방 뛰기 시작했다.

물론 총괄 디렉터니 하는 감투야 우진이 대충 즉흥적으로 지어서 얘기한 거지만, 이런 부분에서 단순한 제이든에게는 그게 엄청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반면에 이 프로젝트 자체에 흥미를 느낀 석현 또한, 제이든만큼 흥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진이 네가 나한테 기대하는 부분은……. 비주얼 스크립트를 활용해서, 다양한 패턴이나 구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알고리즘을 R&D하는 거지?”

“빙고! 바로 그거지.”

“재밌겠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게 거기서 끝은 아니야.”

“음?”

“디자인이 끝난 유기적인 모델링 파일을 실제 공간에 시공하기 위한……. 패브리케이션 솔루션까지도 네가 해 줘야 할 일이지.”

우진은 석현의 성향에 대해서 누구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디지털 건축과 모형제작이라는 분야가 일견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석현이 흥미를 느끼고 집요하게 팔 만한 공통분모는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설계해서 만들어낸 부품들을 조립하여, 처음 상상했던 형태가 깔끔하게 만들어졌을 때의 그 희열.

우진도 석현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석현의 취향을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크……! 좋아, 좋아. 아주 좋아. 그런데 그럼, 이제 내가 하던 모형 파트 관리는 그럼 누가 해?”

“그거야 팀장급 세 분 중에 한 분한테 인수인계하면 되지. 송 팀장님이 모형 실력은 제일 좋으신 것 같던데, 그분한테 넘기던가.”

“아냐. 송 팀장님이 손재주는 좋은데, 일머리는 좀 부족하셔.”

“그래?”

“그 부분은 내가 내일 출근하는 대로, 모형 파트 회의 열어서 결정해서 보고할게.”

“좋아. 그러자고.”

두 사람의 호응이 좋은 탓에 더욱 신바람이 난 우진은 계속해서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되자, 이제 주제는 패러필드에 설치될 파빌리온으로 넘어갔다.

우진은 가장 먼저, 테이블 위에 가져온 설계도면을 쭉 펼쳐 올렸다.

파빌리온이 설치될 위치를 기준으로 세밀하게 디자인한 설계도면들을 먼저 두 사람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우진이 원하는 파빌리온 디자인에 대한 방향성을, 둘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난 이 메인 로비를 중심으로……. 패러필드라는 공간 안에 있는 시설들의 상호작용을 파빌리온의 디자인 안에 표현하고 싶어.”

“네가 중간과제로 했던 파동 모델링과 비슷한 맥락이네?”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만, 사실 어떤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건 패러메트릭 디자인의 공통점이라고 보는 게 맞지.”

“하긴……. 같은 알고리즘 안에서, 패러미터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변칙적인 패턴이 만들어지는 게 곧 패러메트릭 디자인이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제이든의 앞에서, 우진과 석현의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파빌리온의 디자인 방향성에 대한 기본 틀은 우진이 생각해 둔 것이 있었기에, 그것을 디자인으로 표현할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토론의 주가 되었다.

그렇게 저녁쯤에 시작된 디자인 회의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속에서 우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파빌리온의 디자인이 흐릿하게나마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5월의 어느 날은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브루노는 요즘 정신없이 바빴다.

패러마운트 사와의 실무조율 과정도 녹록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본격적인 시공 준비가 시작되자 일이 더욱 많아진 것이다.

처음 설계조율 과정이 브루노와 패러마운트 사이의 일대일 조율 과정이었다면.

시공사로 선정된 천웅건설까지 개입된 시공 준비 과정은 삼자 조율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얼마나 의사소통이 잘 되느냐에 따라 완공된 건축물의 퀄리티가 달라진다는 걸, 브루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브루노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작은 설계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검토하고 소통하는 중이었다.

“하, 이제 어느 정도 문서 작업이 끝나가는군.”

에어컨을 틀기는 애매하지만, 슬슬 더위가 느껴지는 5월 초의 날씨.

이마에 흘러내리는 한 줄기 땀을 닦은 브루노가 중얼거리자,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소연이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어요, 브루노. 그래도 이제 두세 번 정도만 주고받으면 끝날 것 같아요.”

제이든과 소연이 브루노의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한 지도, 벌써 2개월이 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배운 소연은, 꽤 중요한 일들까지 맡고 있었다.

학부생에 불과한 소연이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브루노와 천웅건설의 실무 소통 과정에서, 꼼꼼하게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며 한몫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그래요. 고마워요, 소연. 덕분에 이번 주 안에는 설계 픽스가 나올 것 같군요.”

열심히 일한 것과 별개로, 덤벙대는 제이든에게는 결코 맡길 수 없었던 실무적인 일들.

그래서 브루노는 소연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영어 실력까지 훌륭해서 소통에 문제가 없을 정도라는 점 또한, 높은 가산점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고 말이다.

‘인턴 기간이 끝난 뒤에, 소연에게는 조금 더 적극적인 제안을 해봐야겠어.’

브루노의 눈에 소연은, 학부를 졸업하고 조금 더 경험을 쌓는다면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만한 인재였다.

물론 2개월 만에 이 모든 것을 판단하기에는, 조금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자, 그럼 다들 퇴근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Boss.”

“고생하셨어요, 브루노.”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든 브루노는, 소연의 자리를 지나치다 문득 물어보았다.

“내일은 제이든이 출근하는 날이죠?”

K대의 산학협력 시스템은 주 5일 출근제가 아닌 정해진 시간을 채우면 되는 방식이었고.

그래서 요일마다 소연과 제이든이 번갈아 출근하고 있었다.

“맞아요, 브루노. 오늘 작업한 사항들, 제이든에게 인수인계해 놓을까요?”

소연의 물음에, 브루노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 제발. 그럴 필요는 없어요, 소연.”

“프흐흐. 제이든이 지난번처럼 메일을 오발송 할까 봐 그러시는 거죠?”

“음……. 아주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요. 제이든에게는 그가 잘하는 일을 시킬 생각이에요.”

소연과 짧은 대화를 마친 브루노는, 기분 좋게 내려가서 그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한국에 법인을 처음 내면서 구입 했던 한국산 중형 세단은, 벌써 몇 년째 브루노의 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흠. 다음 주에는 우진과도 미팅을 한번 해야겠군. 슬슬 파빌리온 디자인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말이지.’

머릿속으로 다음 주간의 일정을 정리하며, 브루노는 익숙하게 핸들을 움직였다.

복잡한 서울시 도로에서 운전하는 것도, 제법 능숙해진 브루노였다.

‘오늘 저녁은 배달음식을 시켜볼까…….’

머릿속에 다양한 저녁 메뉴가 떠올라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인 브루노.

그런데 브루노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그때.

위이이잉-!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그의 스마트폰이, 갑자기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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