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163화 (163/315)

163화

Parametric Design

디자인은 재현이 아니다.

아무리 정밀한 알고리즘으로 파동이라는 것을 그대로 재현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디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복제의 영역에서 경이로움을 연출해낸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분야가 있긴 하지만, 그것을 작품이라고 할지언정 누구도 디자인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진이 파동에서 가져온 것은, 모티베이션일 뿐이었다.

파동이 퍼져나가는 형상(形狀)의 영역에서의 모티브를 가져왔고, 나아가 그 형상이 만들어지는 원리에서부터 모티브를 가져왔다.

그렇게 가져온 모티브를 재해석하여 우진의 의도가 담긴 파동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더 이상 파동의 재현이 아닌 디자인의 영역이 되었다.

“파동이란 어떤 매개체를 통해 에너지가 전달되는 현상입니다. 서로 다른 힘이 같은 매개체 안에서 만날 때 그것은 간섭을 일으키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힘이 전달되기 힘든 먼 거리까지 나아갔을 때에는 자연스레 소멸되기도 합니다.”

일단 우진이 스크린 위에 띄워 보인 모델링은, 다른 학생들의 작업물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다른 차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의 퀄리티를 떠나서 손으로 빚어 만든 모델링과 일정한 규칙성과 알고리즘을 이용해 만들어낸 모델링은 연출하는 느낌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 두 가지 중에 뭐가 더 뛰어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과와 오렌지 중에 뭐가 더 맛있냐는 질문과 비슷한 것이니까.

하지만 평생 오렌지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오렌지를 맛보여준다면, 그 순간만큼은 달콤하고 새콤한 맛에 매료될 것이다.

익숙한 사과의 맛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동을, 오렌지에서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진이 가져온 모델링은, 아직까지 이러한 종류의 작업물을 보지 못한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2011년인 이 시점에 비주얼 스크립트 알고리즘을 이용한 디지털 모델링의 개념은, 국내는 물론 해외 잡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진의 발표가 이어지는 동안, 강의실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조운찬 교수를 제외한 모두가, 그저 멍하니 우진이 가져온 작업물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파동의 이러한 성질은, 세상의 많은 이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파장을 가지고 있고, 그 파장이 관계 속에서 섞이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진은 준비했던 말을 담담히 이어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조운찬은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우진에게 놀란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아직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비주얼 스크립트로 이만큼이나 완성도 높은 모델링을 뽑아 왔다는 것에 대한 감탄이었으며.

두 번째로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뛰어난 모델링을 가져온 것을 넘어, 그것이 확실한 모티베이션과 디자인적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 대한 감탄이었다.

‘어디서 따로 디자인 방법론에 대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닐 텐데…….’

사실 비주얼 스크립트에 대해 연구한 지 꽤 오래된 조운찬의 기준에서, 우진이 가져온 모델링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그가 컴퓨터를 켜고 한두 시간 정도만 알고리즘을 짜보면, 충분히 비슷한 모형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운찬에게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모델링에 담긴 우진의 프로세스였다.

“그래서 제 디자인의 모티브가 ‘파동(Wave)’ 이었다면, 주제는 ‘관계(Relationship)’입니다. 서로 다른 파장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형성되는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변수인 환경.”

우진은 레이저 포인트를 들어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자신의 작품을 가리켰다.

동심원의 형태로 퍼져나가는 다섯 개의 파동.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패턴.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은, 우진이 알고리즘 사이에 끼워 넣은 보이지 않는 어떤 새로운 힘이었다.

파동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일정한 규칙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우진이 가상으로 그어놓은 곡선의 언저리에 다가가면 이제까지의 규칙을 무시하고 소멸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파동의 알고리즘에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던 모델링을 이루는 점(vertex)들이, 우진이 만들어놓은 가상의 선에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평면에 붙도록 만든 것.

그 라인을 따라 레이저 포인트를 움직여 보인 우진이, 담담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이 자연스런 관계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또 하나의 요소인 환경(Environment)입니다.”

결과적으로 우진이 만든 유기적인 형상의 모델링은, 동심원으로 퍼져나가는 파동들을 마치 지우개로 일부분 지워낸 듯한 모양새였다.

파동이 생겨나는 원리와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관계의 형성이라는 어떤 사회적 현상을 디자인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모델링은, 더 이상 파동의 재현이 아닌 디자인이 되었다.

우진의 피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피티라기보단 작업물에 대한 간결한 설명 같은 것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학생들이 받은 충격은 꽤나 큰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중간발표가 시작된 이래로, 처음으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 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는 아니었다.

다만 학생들의 진심이 담긴 담백한 박수 소리들.

우진은 멋쩍게 웃었고, 잠시 후 조운찬 교수의 강평이 이어졌다.

그 시작은, 당연히 칭찬이었다.

“훌륭한 작품이구나, 우진아.”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래스하퍼로 작업한 거지?”

“맞습니다.”

“아직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잘도 써먹었구나.”

“알고리즘 구조를 짜는 과정에서 컴공과 친구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칭찬이 멋쩍은 우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했지만, 조운찬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글쎄. 프로그래밍에 익숙하다고 해서 꼭 그래스하퍼를 잘 다룰 수 있는 건 아닌데……. 어쨌든 고생했구나.”

운찬은 우진이 만들어온 작업물을 스크린에 그대로 띄워놓은 채, 이런저런 설명을 부연하였다.

아무래도 그래스하퍼 라는 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조운찬이다 보니, 우진이 감으로 만들어놓은 알고리즘에 대해 좀 더 세세하게 학생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마침 다음 주부터 시작될 수업 내용이 비주얼 스크립트와 관련된 과정이었으니, 우진이 가져온 이 작업물은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아주 훌륭한 에피타이저였다.

하여 십여 분 정도의 추가설명을 마친 뒤, 조운찬은 다시 우진을 응시하였다.

“그런데 우진아.”

“예, 교수님.”

“네가 이번 작업물을 만들면서 활용한 이 모든 알고리즘과 디자인 방법론 말이다.”

“넵.”

“그게 곧 패러메트릭 디자인(Parametric Design)이라는 건, 혹시 알고 작업한 거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운찬의 질문에, 우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파라미터(Parameter)의 사전적 의미는 매개변수이다.

그리고 ‘패러매트릭 디자인’에서 이야기하는 파라미터 또한, 그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념이다.

하지만 다소 이론적인 개념보다 더 직관적인 의미에서 파라미터를 얘기해 보자면, 그것은 모델링에서 어떤 형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두루마리 휴지만 한 크기의 원통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원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원의 반지름과 원통의 높이라는 수치 값. 그리고 원통이 만들어질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가 필요하다.

패러매트릭 디자인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각각 파라미터라고 정의하며, 이 파라미터의 수치를 변화시킴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원통을 다양한 좌표에 만들어낼 수 있다.

원통이라는 기본적인 형태의 카테고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규정되어 있지만, 파라미터의 수치를 변화시킴으로써 수많은 다른 원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러매트릭 디자인의 기본 개념이자 출발점이며, 이번에 우진이 과제로 작업한 모델링의 디자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중간과제에 대한 평가가 전부 끝난 뒤 조운찬 교수의 교수실에 따라간 우진은 이러한 설명들을 들을 수 있었고, 덕분에 패러메트릭 디자인의 개념에 대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동경하고 추구하던 디지털 건축을 공부하기 위한 방향성을, 생각보다 빠르게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다 보니 제가 원하던 방향의 디자인을 하게 됐던 거네요.”

“그렇지.”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더니……. 하하.”

우진의 멋쩍은 웃음에, 운찬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저 뒷걸음질이라기엔, 꽤나 정확한 방향성이던걸?”

“그런가요?”

따뜻한 녹차 라떼를 한 모금 홀짝인 운찬이, 빙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오늘 네 발표를 듣고 확실하게 깨달았다.”

“뭘요?”

“네 디자이너로서의 성향 자체가, 이쪽 방향에 확실하게 맞다는 걸 말이야.”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그것을 정말 심도 있게 파헤치며 공부하기 위해서는 성향이 어느 정도 맞아야만 한다.

특히나 그 분야가 아직 많이 연구되지 않은 새로운 분야라면 더더욱 그렇다.

알고리즘을 짜고 패러미터를 조절하며 자신만의 디자인 방향성을 만들어가려면, 그 과정 자체에 흥미를 느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운찬은 우진의 이번 과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패러매트릭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성립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결과물을 도출해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진의 성향이 이쪽 분야에 아주 잘 맞는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장기적으로 운찬과 함께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며 공부할 동료로서, 아주 합격점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

운찬의 그런 마음을 느낀 우진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전생에는 막연히 동경의 대상이기만 했던 디지털 건축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았으니까.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우진의 말에, 조운찬이 되물었다.

“다행이라니?”

“사실 제가 계획하고 있던 것들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인한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는지……. 조금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근거 없는…… 자신감?”

이해할 수 없는 우진의 말에 운찬은 고개를 갸웃하였고, 우진이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왕십리 패러필드에 저희 스튜디오에서 작업해 올리기로 했던 파빌리온 말이에요.”

“아, 그거야 기억하지.”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그 파빌리온을 욕심냈던 게, 이 패러매트릭 디자인을 접목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거든요.”

“오호……?”

운찬의 두 눈에 흥미가 어렸고, 우진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막상 저질러 놓고는 조금 걱정했었죠.”

“잘 못해낼 까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히 능력도 없으면서 디지털 건축 흉내 낸다고 도전했다가, 망신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이죠.”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진은 꽤 후련한 표정이었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어디에도 쉽게 할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이면에는 항상 이런 실패에 대한 걱정도 있는 법이었는데, WJ 스튜디오의 오너라는 무게를 어깨에 지고 있는 우진은 이런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운찬 교수는 우진에게 있어 스승이었고, 제자로서의 우진은 얼마든지 이런 얘기를 해도 된다.

그래서 우진은 마음이 좀 편해졌다.

“우진아.”

“예, 교수님.”

“디지털 건축은, 세계적으로도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한 분야야. 특히 국내에서는 완전히 생소한 개념이지. 흉내? 지금 시점에서 흉내 낼 대상이 있기는 하냐?”

우진에게는 디지털 건축에 대한 미래의 지식이 있지만, 그 또한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뿐이다.

전생에 우진은 그 분야에 대해 관심 정도만 있었을 뿐, 전혀 공부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건 그렇……죠.”

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조운찬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니라 누가 하더라도……. 이 시점에서 디지털 건축에 대한 시도는 어쩌면 무모한 것일 수도 있어. 대중의 공감을 받지 못하는 디자인은 빛을 발하지 못하는 법이니 말이지.”

우진은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킨 조운찬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누군가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겠냐.”

“맞는 말씀입니다.”

조운찬이 씨익 웃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도전하기 아주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국 디지털 건축 역사의 첫 페이지에, 네 작품이 그려질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운찬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우진의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