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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58화 (158/315)

158화

인과응보

치직- 치지직-

[조합장님. 물량이 부족해서 40평대 조합원은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50평대 조합원님들 배정 이후에 가능한 물량이 조금 남긴 한데……. 전원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수 없게 되어, 형평성 문제 때문에 일반분양으로 돌리기로 했습니다.]

치직거리는 약간의 잡음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을 들은 순간.

권순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하였다.

‘씨, 씨발……! 뭐야?’

법원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전부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나는 바로 저 건너편 피고 자리에 앉아있는 조합장의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지금 그의 옆에 앉아있는 비대위원 김현곤의 것이었다.

딱 두 마디의 대화만 들었을 뿐인데도, 순현은 스피커를 통해 어떤 대화 내용이 흘러나올지 아주 정확히 예상할 수 있었다.

김현곤이 저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 자체가, 바로 순현 자신이 계획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물량이 총 몇 개 부족한 거죠?]

[45평형 물건이 세 개가량 부족하군요.]

[그럼 세 명만 양보하면 다른 40평대 조합원분들은 원 플러스 원을 받으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야 한데……. 대체 누가 여기서 양보하겠습니까?]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재판장의 주름진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법원은 이 음성파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도 고요하였고.

원고 측에 앉아있는 비대위원들의 두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일단 저부터, 추가 분담금이 부담돼서……. 원 플러스 원을 양보할 생각이었습니다.]

[허허, 정말입니까?]

[아마 저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 몇 분 정도는 더 계실 것 같은데,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양보하실 분이 계신지요?]

사실 지난 1심에서 조합이 비대위에 패소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평형 신청 과정에서의 불평등이 사실은 합의 하에 이뤄진 부분이었다는 조합장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으니 말이다.

당시에 그 합의 내용에 대한 부분은 분명 합의서로 만들어서 기술하였지만, 그것을 비대위에서 몰래 빼돌렸으니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조합장 곽홍식이 억울하다 호소하여도,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재판장으로선 비대위 측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지금 그 명백한 증거가, 법원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허허, 정말 이렇게 세 분이, 양보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조합장님. 어차피 저희는 50평대로 바꾸려고 했던 상황이라, 사실 양보랄 것도 없습니다.]

[김현곤 조합원님, 임진숙 조합원님. 그리고 강철현 조합원님. 그럼 이 세분이 원 플러스 원을 양보하시는 것……. 맞으시죠?]

[맞습니다.]

[저도 맞아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치 이 소송을 위해 준비되기라도 한 듯, 너무도 명백하게 정황을 보여주는 곽홍식의 음성 녹음파일.

고요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곽홍식의 목소리에, 순현은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양보했던 조합원의 이름까지 굳이 육성으로 읊는 그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자신이 역으로 함정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악마 같은 늙은이가……!’

만약 비대위가 이렇게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더라면, 애초에 이 녹음파일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합의서에 도장까지 찍은 상황에서, 굳이 이렇게 녹음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때문에 홍식이 이렇게 미리 녹음해 뒀다는 것은, 이미 그 당시 조합 사무실 안에 비대위의 끄나풀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방증이었다.

어쩌면 그 끄나풀이 합의서를 빼돌려 비대위 측에 넘길 것까지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양보한 조합원 이름까지 한 사람 한 사람 불러가며, 음성녹음으로 남기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양보 덕에, 다른 여덟 분의 조합원들께서 덕을 보시겠군요, 허허.]

[하하, 별말씀을요. 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이렇게 처리해서, 다음 정기총회 때 안건 상정하겠습니다.]

녹음파일은 곽홍식의 목소리를 끝으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음성이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장내는 잠시 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비대위 측 인사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며.

조합장을 비롯한 피고 측 인사들은 아주 여유롭거나, 혹은 통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이 재판의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재판장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권순현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조합장 곽홍식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당했다. 완전히 당했어. 씨발, 어떻게 빠져나가지?’

순현은 당장 조합장의 웃는 낯짝에 주먹이라도 휘둘러 주고 싶었지만, 그가 그 정도로 미련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이 소송의 패소를 떠나서 더 큰 형벌이 내려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두 눈을 질끈 감은 순현은, 분노와 함께 허무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소송에서 패소하는 순간, 합의금으로 큰 몫 잡기는커녕, 반대로 조합에 손해배상을 해줘야 할 테니 말이었다.

하지만 순현과 달리, 결국 참지 못한 비대위원도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바로 저 녹음파일의 목소리 중 한 명이었던, 비대위원 김현곤.

그가 벌떡 일어서며 홍식을 향해 소리친 것이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재판장님!”

“모함이라니요, 명백한 증거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이미 멘탈이 가루가 된 현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

“우릴 모함하려 한 게 아니라면, 이런 음성파일을 대체 왜 만드셨단 말입니까!”

곽홍식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정기총회에 공시할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녹음했었을 뿐입니다. 녹음만큼 편리한 기록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 개 같은……!”

홍식의 여유로운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현곤은, 발악하듯 소리 지르며 원고석에서 뛰쳐나갔다.

물론 그것은 법원 관계자들에게 곧바로 제압당했지만 말이다.

“신성한 법정에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재판장의 묵직한 목소리에, 아무 말도 못 하며 달달 떨기만 하는 김현곤.

그런 그를 응시하던 피고 측 변호사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비대위 인사들의 귓전으로는 천둥처럼 묵직하게 들려왔다.

“굳이 음성대조를 해보지 않아도 이미 느끼셨겠지만, 저기 김현곤 원고의 목소리가 방금 이 녹음파일 안에 있었습니다.”

“계속 진행하세요.”

“애초에 저들이 주장했던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났으며, 반대로 이 소송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한 사기행각임이 밝혀졌습니다.”

원고 측을 슥 둘러본 변호사가, 재판에 쐐기를 박았다.

“이는 무고죄*[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 사실을 신고하는 죄(형법 156조).]에 해당하는 명백한 범죄이며……. 반대로 저희 피고 측에는 아무런 과실이 없었음을 다시 한번 호소하는 바입니다.”

변호사의 차분한 목소리로 마무리되었고.

원고 측 비대위원들은 침묵했다.

피고 측 뒤편에 앉아있던 배심원들은 비대위원들을 향해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고.

참관석에 앉아있던 조합원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물론 아직 재판이 끝난 것이 아니기에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기쁨은 배가되었다.

땅- 땅-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양측 주장과 증거에 대한 검증이 모두 끝난 뒤, 다시 재판을 재개하도록 하지요.”

판결을 위해 잠시 휴정이 진행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 재판의 결과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홍식이 제출한 음성파일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너무도 명백한 증거였고.

재판장이 아닌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보더라도, 이 재판의 피고는 무죄가 분명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자리에 다시 앉은 재판장은, 곧바로 판결봉을 세 번 두들겼다.

땅- 땅- 땅-!

“피고 곽홍식 외 청담 선영아파트의 조합원들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재판장의 목소리를 들은 권순현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 *

“이제 어쩌실 겁니까?”

우진의 물음에, 홍식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기는요.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르게 해 주어야지요.”

“당연히 손해배상을 청구하시겠죠?”

홍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 지연에 대한 손해배상부터, 조합원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모든 손해배상까지. 이번 소송에 이름을 올린 모든 비대위원들에게, 전부 다 청구할 생각입니다.”

일전에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재건축 사업에서 시간은 그대로 돈으로 직결된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이게 추상적인 개념이라면, 조합의 입장에서는 아주 직관적인 개념이다.

조합이 운영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보통 사업장의 수주를 원하는 건설사와 정비업체로부터 차입하여 확보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자와 함께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홍식이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나도록 비대위원들을 털어먹는다면.

아마 저들은 그대로 파산하고 말 것이었다.

최소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상가지분의 대부분을, 청담 선영의 조합에 넘겨줘야 할지도 몰랐다.

“인과응보겠지요?”

우진의 물음에, 홍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사실 서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피눈물을 흘린 것은 저들이 아니라 저희 조합원들이었을 겁니다.”

“그랬…… 겠지요.”

조합원들의 숫자는 비대위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

그랬기에 조합이 패소했을 때 조합원들이 볼 손해보다는, 지금 비대위원들이 보게 될 손해가 훨씬 큰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죄가 가벼운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어지간한 재건축 사업장들 중 비대위가 없는 곳은 거의 없었지만, 이렇게 계획적으로 공문까지 은닉해가며 부당이득을 취하려는 비대위들도 흔치는 않았으니까.

일반적인 비대위들은 이런 불법적인 집단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손해를 막고 이익을 취하기 위한 평범한 집단인 경우가 더 많았다.

“이제 뭐, 제가 더 도와드릴 일은 없겠지요?”

우진의 물음에, 홍식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만 해도 저희 조합원들은, 정말 서 대표님께 갚기 힘든 빚을 졌습니다. 이제부턴 저희가 알아서 해결해야지요.”

조합장의 진심 어린 말을 들은 우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마무리 잘 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예?”

반문하는 홍식을 향해, 우진이 나직한 어조로 한 마디 덧붙였다.

“충분한 피해보상은 받으시되, 너무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쥐를 구석에 몰아넣을 때도, 빠져나갈 구멍을 조금은 남겨 둬야 물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우진의 이 마지막 한 마디에, 홍식은 작게 웃을 뿐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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