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새학기의 시작
재건축 투자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결코 집값이 떨어지는 상황이 아니다.
재건축 투자라는 것은 주식처럼 단기간에 차익을 보고 빠질 수 있는 종류의 투자가 아니었고.
결국 부동산 가격은 물가상승률처럼 장기적으로 우상향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개발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몇 년이고 묻어두다 보면, 손해를 볼 일은 거의 없는 구조였으니.
경험이 많은 투자자라면 단기적으로 출렁이는 집값에 일희일비할 일은 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닳고 닳은 투자자라도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으니.
그것은 어떤 내‧외부 요인에 의해 사업이 엎어지는 것이다.
개발과정에서 조합의 어떤 비리가 드러나거나, 외부 소송에서 패소하여 조합의 설립인가가 취소된다거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러한 사고는, 경험 많은 투자자들까지도 패닉에 빠지게 할 상황인 것이다.
사고가 터져 개발이 무산되는 것은 투자자의 가치판단과는 전혀 무관한 재앙이었고.
그렇게 되면 수년에서 많게는 십 년이 넘게 쌓아온 개발차익이 실현되기도 전에 증발해버리는 것이었으니까.
재엽이 지금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당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들, 큰일 났어.]
“무슨 일이에요, 엄마?”
[우리 윗집에 사는 박 교수님 알지?]
“네, 그분 잘 알죠.”
[방금 장 보러 나갔다가 그분 만나서 얘길 들었는데, 지금 조합 내부에 난리가 났나 봐.]
“조합이라면, 청담 선영이요?”
[그래. 네가 조합원인 곳이 거기밖에 더 있니?]
오래도록 재엽의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던 이웃인 박 교수는 당연히 청담 선영의 조합원이었고.
조합 임원들과도 꽤 친분이 있는 청담 선영의 토박이 주민이었다.
재엽의 어머니는 그 박 교수로부터, 개발 진행과 관련된 충격적인 소문을 들은 것이었고 말이다.
[엄마가 사실 이해를 다 하진 못했는데, 그 소송 건 때문에 재건축이 취소될 수도 있다지 뭐냐.]
“그러니까, 조합에서 평형 신청 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다고요?”
[그렇대. 비대위에서 그 건으로 소송을 걸 예정이고, 너무 확실한 사실이라서 승소하기 힘들 거라던데?]
“그게 얼마나 큰 비리인데요?”
[조합에 한 번 전화해 봐라, 재엽아. 엄마도 불안해 죽겠어, 진짜.]
재엽은 혼란스러웠다.
재건축 투자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개발이 취소된다는 게 얼마나 큰 손해인지부터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돈 잘 버는 인기 연예인이라 해도, 십억이 넘는 재건축 물건에 문제가 생긴 것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전화를 끊고 돌아왔을 때, 표정이 어두웠던 것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진짜.”
재엽의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침 오늘이 우진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는 점.
이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눈앞에 나타난 우진이, 구세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여 재엽은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를 우진에게 토시 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옮겼고.
“그러니까 그 박 교수라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고…….”
“응. 그래서?”
“이게 조합이 공중분해 될지도 모르는 큰 위기라는데…….”
“흠. 확실히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
우진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뜬금없이 재엽의 부동산 상담을 하게 된 것이다.
하여 설명을 모두 마친 재엽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리듯 한탄하였다.
“하, 진짜 이거 어쩌냐……? 당장 조합에 전화해서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하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커다란 눈만 끔뻑이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왜인지, 우진의 표정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심각하기는커녕,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나 지을법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진.
“지금은 조합도 아마 퇴근했을 거야.”
“그렇겠네.”
뒷머리를 긁적인 재엽이, 다시 우진을 향해 물었다.
“네가 볼 땐 어때? 이거 진짜 심각한 상황인 건 맞지?”
그 물음에, 우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글쎄.”
“글쎄라니……?”
“아직 몇 가지 확인해 봐야 할 것들이 있어서.”
“그래? 하긴, 오피셜이 아니라 소문이니까, 확인되기 전에는…….”
꽤 당황했는지 횡설수설하는 재엽을 보며 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에 이 사건으로 인해 피해 봤던 사람들 중에 재엽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든 것이다.
“잠깐 기다려봐 형.”
우진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홈 화면에 떠있는 시간을 확인한 우진은, 그대로 전화번호를 검색해 문자를 찍기 시작했다.
[청담선영 조합장님]
시간이 일곱 시가 넘었기에 이른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문자 한 통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합장님, 저 WJ 스튜디오 대표 서우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통화 가능하실 때 연락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자를 보낸 우진은 재엽의 건너편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답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조합장에게 문자도 넣어놨으니, 이제 재엽을 안심시켜줄 차례였다.
* * *
사실 재엽으로부터 들은 이 상황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우진이 조합장에게 줬던 솔루션은, 사단이 나는 것을 막는 방법이 아닌 이 상황을 이용하는 방법이었으니까.
[이걸 굳이 막으려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합장님.]
[물론 미리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년 초까지는 방치해 뒀다가 함정으로 써야 합니다.]
[녹취 파일만 잘 확보해 주세요. 그쪽에서 먼저 소송을 걸면, 역으로 묻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우진이 조합장에게 줬던 솔루션은 간단했다.
비대위 끄나풀인 조합원 몇 명이 양보하는 척 평형 신청 과정에서 빠지는 걸 녹취 파일로 몰래 남겨놨다가.
소송을 걸었을 때 증거자료로 제출하라는 것이다.
애초에 비대위에서 파 놓은 함정이라는 것이, 자신들이 양보한 것을 불공정 운영으로 둔갑시키는 것이었으니.
이 증거만 있다면 오히려 소송에서 역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비대위는 소송에서 패배할 테고, 막대한 소송비용과 사업 지연에 대한 피해보상을 조합에 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오히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청담 선영의 상가지분마저도, 전부 다 조합에 내어줘야 할지도 모르겠죠.]
그래서 작년에 우진이 조합장에게 솔루션을 준 것과 별개로, 이렇게 소송이 터지는 것까지는 아주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다만 여기서 우진이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소송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왜 이렇게 빨리 소문이 퍼졌냐는 것이었다.
조합의 중임들도 아닌, 일반 조합원들에게까지 말이다.
‘전생에서는 이렇지 않았어. 소송이 한참 진행될 때까지도 일반 조합원들은 모르고 있었다가……. 1심에서 패소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나서야 난리가 났었는데 말이지.’
만약 이 의문점이 아니었다면, 우진은 조합장에게 문자조차 넣지 않았을 것이었다.
청담 선영의 조합원들 사이에서 한번 난리가 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말이다.
‘뭔가 전생과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만……. 탈이 난 건 아닐 텐데.’
우진은 일단 재엽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직 비대위를 완전히 옭아매기 전인 관계로, 구체적인 뒷 이야기까지 다 설명하지는 않았다.
재엽이야 어디에 말을 옮길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부모님은 친한 조합원들에게 얘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소송이 시작되기 전에 우진과 조합장 홍식의 계획이 비대위의 귀에 들어간다면, 일망타진은 물 건너가게 될 것이었다.
“그럼 우진아, 이거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거지?”
“아마도.”
“아마도 라니! 확실해야 돼. 이게 어디 한두 푼 걸린 일이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거의 확실할 거야. 조합장님이랑 통화해 보고, 전후 사정 파악한 다음에 다시 얘기해 줄게.”
해서 우진의 설명을 들은 재엽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확답까지 듣지는 못했기에 완전히 개운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한결 가신 것이다.
“그럼 오빠, 별 탈 없는 거지?”
“우진이 말에 의하면?”
“다행이다. 얼굴 완전 까맣길래, 진짜 큰일 난 줄 알았잖아.”
“꽤 큰일이 날 뻔하기는 한 거지 뭐.”
그래서 우진과 재엽, 수하 세 사람은, 어느 정도 나아진 분위기 속에서 카페 프레스코를 나섰다.
재엽이 미리 예약해 둔 인근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기분이 조금 뒤숭숭하긴 했지만, 이 일 때문에 오랜만에 겨우 잡은 약속을 파투 낼 수도 없었으니.
기분전환도 할 겸 바로 자리를 이동한 것.
그런데 그들이 술집에 도착하기도 전, 우진의 스마트폰이 다시 울렸다.
위이잉-
그것은 바로, 조합장 곽홍식으로부터 돌아온 문자였다.
[아, 안녕하셨습니까, 서 대표님.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한 우진은, 곧바로 통화버튼을 터치하였다.
* * *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나다니, 빠르군요.]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우진은 알 수 있었다.
“역시, 계획에 무슨 차질이 생긴 건 아니었던 거군요?”
[하하,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그렇게 허투루 진행하지는 않지요.]
쾌활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님을 알아챈 것이다.
‘하긴. 그럼 그렇지.’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그것과 별개로 우진은 현재 상황이 궁금하였다.
이제 시기상 슬슬 비대위가 움직일 때는 되었으니 말이다.
“아직 소송이 시작된 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조만간 소장이 날아올 것 같기는 한데……. 이 친구들, 행동이 꽤 굼뜨군요. 허허.]
우진은 가장 궁금했던 부분부터 물어보았다.
“그럼……. 갑자기 이렇게 소문이 퍼진 것은 왜 그런 걸까요?”
그 물음에, 곽홍식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야, 저희 쪽에서 손을 좀 썼기 때문입니다.]
“손을 쓰셨다고요?”
[더 확실하게 비대위의 퇴로를 전부 다 차단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마치 우진에게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홍식은 요 며칠 동안 있던 일을 우진에게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우진은, 꽤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역시……. 이 아저씨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사실 비대위가 소송을 건다고 해도, 소송에 모든 반대파가 전부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패소할 때의 리스크 때문에, 사업 자체는 반대하면서도 소송에는 발을 걸치지 않고 관망하는 이들도 꽤 있으니 말이다.
홍식은 이번 기회에 그렇게 애매하게 걸쳐있는 반대파들까지 싹 다 끌어들여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틈을 보인 것이었다.
첫째로는 일부러 소문을 흘려 비대위가 움직일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고.
둘째로는 이 소문에 일부러 묵묵부답 대응하지 않음으로서, 하이에나처럼 기다리고 있는 비대위 인물들이 소송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이 문제를 조합에서는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별다른 대응책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다.
그 결과 평범한 입주민인 재엽의 어머니에게까지 이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었고.
오늘 우진이 이렇게 재엽의 상담을 해주게 되었던 것.
“조합장님 보기보다 무서우신 분이셨군요.”
[헛헛, 이 방법을 저희 쪽에 알려주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하하, 그것도 그러네요.”
[무튼 조만간 소송이 시작될 분위깁니다.]
“제 예상보다 한 달은 더 빨라졌군요.”
[소장 날아오고 고소인 명단 확인한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식과의 통화가 끝났을 때, 우진은 한결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전화 한 통으로, 의아했던 부분까지 전부 다 확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재엽이 형이 좋아하겠네.’
그런데 전화를 끊고 재엽에게 이야기를 꺼내려던 우진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생각해보니 이거…….’
어쩌면 곽홍식으로 인해 바뀐 이 상황을 잘 이용해서, 적지 않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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