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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134화 (134/315)

134화

지뢰 찾기

배가 고팠는지 한동안 젓가락질만 하던 우진이, 다시 꺼내 든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부장님. 패러마운트 아시죠?”

“패러마운트? 내가 설마 패러마운트를 모르겠냐? 바로 어제저녁에도 거기서 장보고 왔는데.”

“패러다이스 가셨다는 말이죠?”

“그치.”

“장보러 거기까지 갔어요?”

“와이프가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사실 한 번에 크게 장 볼 때는 거기만 한 데도 없잖냐.”

패러마운트 그룹은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규모를 가진 거대한 유통기업이었다.

박경완이 장보고 왔다는 패러다이스는 국내에서 가장 큰 대형마트 브랜드였으며.

이번에 왕십리에 짓는다는 패러필드 브랜드는, 패러다이스만큼 인지도가 크진 않지만 그래도 가파른 추세로 성장 중인 복합몰 브랜드였던 것이다.

‘미래에는 업계 최상위까지 올라갈 브랜드기도 하고 말이지.’

그래서 경완은 우진이 패러마운트를 아냐고 물은 것이 의아했지만, 우진이 ‘아느냐’고 물은 것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조금 말이 샜는데……. 부장님 패러마운트랑 일해보신 적 있죠?”

“아하, 아냐는 게 그 말이었어? 이게 본론이었구만.”

“네, 그렇죠. 그쪽에 지인 있으시면 소개 좀 받고 싶어서…….”

우진의 예상대로 경완은 패러마운트와 여러 번 일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서초구에 있는 패러마운트의 신사옥이, 천웅건설의 작품이었으니까.

사실 우진이 거기까지 알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뭔데.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데?”

경완은 젓가락으로 깍두기를 하나 집어 들더니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우진을 응시했다.

그가 말하는 모양새에서, 또 뭔가 재밌는 냄새를 맡은 것이다.

우진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패러마운트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것은 분명 설계나 시공과 관련된 일일 것이고.

그것은 박경완으로서도 아주 관심 있는 분야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이라뇨. 그러니까 제가 뭐 나쁜 짓이라도 하고 다니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흐흐. 당연히 나쁜 짓이야 아니겠지만, 뭔가 대형 사고 치려고 하는 놈같이 보여서.”

“…….”

“아무튼 뭔데? 이유를 알아야 도와주든 말든 할 것 아냐?”

경완의 호기심 넘치는 표정에,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미래를 아는 양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경완에게 어디까지 어떻게 포장해서 이야기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진은, 90%정도의 진실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기로 했다.

“부장님 브루노 아시죠?”

“그게 누구야?”

“건축가 브루노 산체스요.”

“음……?”

“왜 이번에 용산에 글래셜 타워 설계한 그 스페인 건축가 있잖아요.”

“아, 그분! 그런데 갑자기 그분은 왜?”

“이번에 그분이 패러마운트에서 공고한 왕십리 복합몰 설계 공모에 들어가시는데, WJ 스튜디오도 그 설계에 같이 참여했거든요.”

“뭐? 정말? 그래서?”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문제?”

“이 복합몰 사업에, 시공사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문제 말이죠.”

우진의 말을 듣던 경완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시공사가 먼저 정해진 사업장에서 설계공고를 하는 경우도 꽤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경완의 그러한 기색을 읽은 우진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시공사로 정해진 그 건설사가 자회사나 마찬가지인 설계사무소를 하나 밀고 있다면……. 뭐가 문젠지 아시겠죠?”

우진의 이야기는 결국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앞뒤가 바뀐 문제였다.

공모 비리라는 미래에 일어날 결과를 알기에 수집 가능했던 자료를,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사실처럼 경완에게 이야기 한 것뿐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들은 경완은, 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경완은 곰 같은 외모와 달리, 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사실상 내정자가 정해진 공모전이라는 거네.”

“그런 셈이죠.”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

살짝 얼굴을 찡그린 경완은, 잠시 말없이 냉면을 들었다.

우진도 경완을 재촉하진 않았다.

뭔가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두 사람의 냉면 그릇이 전부 비워질 즈음.

경완의 입이 다시 열렸다.

“건설사는 어디야?”

“태호건설이요.”

우진의 대답에, 경완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후우. 알 만하네, 알 만해.”

“아는 회사에요?”

“알지, 그럼 모르겠냐?”

“……!”

“한 칠팔 년 전만 해도 우리 경쟁사였는데.”

경완의 이야기에 우진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지금의 태호건설은 천웅과 비교조차 하기 미안할 정도의 중견 건설사였는데.

경완의 말대로라면 천웅도 이천 년 대 초반에는 그 수준으로 작은 회사였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전생에서도 몰랐던 내용이었다.

전생에도 이천 년대 초반의 우진은, 십 대 초중반의 꼬맹이였을 뿐이니까.

‘천웅이 진짜 급성장한 건설사였구나.’

경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일단 무슨 상황인지는 알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마른침을 삼킨 우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받아먹은 사람을 찾아야죠.”

“받아먹은…… 사람?”

“태호건설에서 뇌물 먹인 사람이, 패러마운트에 분명히 있을 것 아닙니까.”

“흠……. 그다음엔?”

“패러마운트 감사팀에 문의 넣어야죠.”

“그래서 내 인맥을 통해 실무자를 찾겠다?”

“실무자는 이미 찾았어요. 사업집행부 안지홍 팀장이었나……?”

“그럼 내 인맥은 왜 필요한 건데?”

“어느 정도 그럴싸한 증거를 잡아야죠. 대기업 감사팀에서, 정황만 가지고 문의를 받아주진 않을 테니까요.”

우진이 말을 마치자, 경완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리 긍정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지금 우진이 제시한 방법은, 그리 개운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받아먹은 게, 한 놈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경완의 말에, 우진은 멈칫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보다 곪은 부위가 클 수도 있다는 건가요?”

“맞아.”

“음…….”

“왕십리 민자사업 정도면, 수백억 이상 굴러다니는 사업이야.”

“그렇죠.”

“태호건설이 제대로 작정했으면, 최소 이십억 정도는 골고루 뿌렸을걸?”

우진의 원래 계획은 간단했다.

실무자들의 비리를 윗선으로 찔러서, 공모 비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경완의 말대로 임원급까지 어느 정도 받아먹은 상황이라면, 얘기는 쉽지 않게 된다.

증거를 잡는 것도 훨씬 더 어려워질뿐더러, 감사팀까지 먹통일 확률도 높아지니까.

그래서 우진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물론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게 생긴 것이다.

“오늘은 좀 20대 같네. 아니, 그래도 20대는 아니다. 30대 정도.”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네 계획에서, 쥐꼬리만큼 이지만 순진함이 느껴졌거든.”

“…….”

“으흐흐. 이런 건 경험해 봐야 아는 법이지.”

조금이지만 우진의 허술함을 엿본 것이 즐거웠는지, 경완은 실실 웃으며 냉면 육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우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아저씨였다.

“그래서 세속에 찌든 부장님의 의견은 뭔데요?”

“뭐 인마?”

“순수한 20대에게 가르침을 주시죠. 지적하셨으면 이제 솔루션을 주실 타이밍입니다.”

“요놈 봐라,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까지 털어가려 하네.”

“털어가는 건 아니고, 빌려 가는 겁니다. 두세 배쯤 큰 보따리로 돌려드릴 테니까, 한번 풀어 봐요 좀.”

더 큰 보따리로 돌려준다는 우진의 그 말에, 경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에게서는 이미 받은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자 그럼, 서 대표.”

“네?”

“이제부터 이 박 상무님의 솔루션을 잘 들어보라고.”

“……말씀하시죠.”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박경완이,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지금 너한테 중요한 게, 뇌물이나 비리를 잡아내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사실 공모단계에서 공정한 심사만 보장되면 되니까…….”

“그럼 굳이, 패러마운트 내부를 쑤실 필요가 있나?”

“그 말씀은…….”

“구청이나 국토교통부 쪽으로 타겟을 바꿔 보자는 거지.”

“……!”

경완이 씨익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대한민국 시민에겐, 민원이라는 아주 좋은 무기가 있잖아?”

아직 경완의 의도를 전부 이해하지 못했는지, 우진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였다.

* * *

왕십리 역사의 민자사업은, 아무리 민간자본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라 하더라도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

시민들이 이용하는 역사를 개조하고 상업공간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사업이다 보니, 공공성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업을 진행하는 기업이 가장 많은 눈치를 봐야 하는 단체가, 바로 국가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까다로운 국가기관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사업이 무리 없이 진행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국가기관에서 가장 많은 눈치를 봐야 하는 존재는?

바로 시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태클을 걸라고요?”

“그래. 내가 성동구민인데, 왕십리 역사 공사가 시작되면 출퇴근길에 너무 불편할 것 같다. 지금도 잘 굴러가는 역사를 대체 왜 공사하려 하는 거냐. 이렇게 말이야.”

경완은 그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구청 직원은 뭐라고 생각할까?”

“답답해 죽으려고 하겠죠. 사실 역사의 민자사업이 잘만 진행되면, 가장 큰 수혜를 보는 게 성동구민일 테니까요.”

“그렇지. 어디서 또 멍청한 진상 하나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할 거야.”

잠시 뜸을 들인 경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느냐? 그건 또 아니거든. 아무리 거지같은 민원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어.”

“그 다음엔요?”

“아마 설득하려 할 거야. 이 민자사업이 진행되면 얼마나 큰 규모의 복합몰이 생기고, 그로 인해 지역 경제가 얼마나 활성화되며……. 등등.”

뭔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우진의 눈이 반짝였다.

“흠. 그렇겠죠?”

“여기서 너는 뭐라고 말할래?”

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사업계획을 구체적으로 보고 싶다고 할까요? 얼마나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건축사업인지, 확인하고 싶다고요. 설계 공모도 투명하게 공시해달라고 하고.”

우진의 대답에, 이번에는 경완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오우. 뭐야. 머리가 왜 이렇게 잘 굴러가? 벌써 캐치했다고?”

“흐흐. 제가 원래 짱구는 좀 잘 굴리거든요.”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잠시 생각한 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공무원은, 순순히 안 해주려 하겠죠?”

“그렇지. 이건 아주 귀찮은 일이니까. 이게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공공사업의 비리를 척결하는, 범사회적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겠지만……. 걔 입장에서는, 진상 민원인 때문에 생긴 하지 않아도 될 일일 뿐이거든.”

“그럼 어떻게 해요?”

경완이 웃었다.

“민원을 또 넣어야지.”

“네?”

“아주 민원으로 조져야지. 될 때까지 넣는 거야. 그거 기안 한번 올리는 게, 민원 수백 통 보다는 덜 귀찮을 거거든.”

“…….”

경완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무식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부장님, 천재예요?”

“나? 당연한 걸 물어보냐. 사실 내 아이큐가 150은 넘을 텐데, 귀찮아서 테스트를 안 해본 것뿐이야.”

경완의 농담을 들으면서도, 우진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방법이었기에,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문제가 하나 있어요, 부장님.”

“뭔데?”

“이게, 민원 효력이 씨게 먹히려면 진짜 성동구민이 구청 홈페이지 통해서 민원을 때려 박아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이쪽 주민이 아니잖아요?”

우진의 물음에, 경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고.

“넌 왜 갑자기 머리가 나빠졌냐.”

“예?”

“네 눈앞에, 성동 구민 한 명 있잖아, 바보야.”

“아……!”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박경완이 살고 있는 금호동 또한, 성동구에 속해있는 구역이었던 것이다.

“우리 와이프가 민원 넣는 거 잘하는데……. 어때, 알바 한 번 시켜볼래?”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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