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지뢰 찾기
우진이 브루노와 설계 공모에 관련된 회의를 한 것은, WJ 스튜디오에서 이후 연초에 한 번 정도가 전부였다.
공모 마감 날짜 자체가 1월 10일이다 보니 설계도 이미 거의 완성단계나 마찬가지인 상태였고.
때문에 우진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도 그만큼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브루노 또한, 이 이상의 어떤 도움을 바랬던 게 아니었고 말이다.
‘게다가 사실, 내 개입과 별개로 공모 비리만 아니라면……. 브루노가 최초설계로 공모에 들어갔다 해도 무조건 당선작은 그게 됐었을 테니까.’
그래서 실무진들을 몇 명 더 대동한 용산에서의 두 번째 회의가 있었던 이후.
설계 마무리 작업은 전적으로 브루노가 하기로 얘기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진은 다시 한가해 졌을까?
그건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우진은 개인적으로 더 바삐 움직여야 했으니까.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이제 공모 마감 날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일주일 정도.
그 안에 우진은, 구린내의 ‘근거’를 찾아내야만 했다.
‘대충 짐작 가는 포인트가 있기는 한데…….’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를 아는 상황에서 역추적 방식으로 추론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우진은 어떻게든 해낼 생각이었다.
브루노가 계약서까지 쓰자고 이야기한 이상, 이것은 이제 우진과 WJ 스튜디오의 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일단 가능한 모든 경로로 정보부터 수집해야겠어.’
해서 우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동구청 홈페이지에서 도시계획안 공람공고를 뒤져보는 것이었다.
이런 민자역사 사업을 진행할 때에는 계획수립 단계에서 여러 가지 공고를 올려야 했는데.
환경영향평가*[대상 사업의 사업계획을 수립하려고 할 때, 그 사업의 시행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환경영향)을 미리 조사·예측·평가하여 해로운 환경 영향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안(환경보전방안)을 강구하는 것]와 같은 공람공고를 확인하면 사업 시행자와 건설사에 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디 보자. 시행자야 당연히 패러마운트일 거고…….’
그리고 공고문을 보던 우진의 두 눈에 곧 이채가 어렸다.
세부 문서를 확인하던 도중, 태호건설의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진의 전생에서 이 패러필드를 공사하다 쫄딱 망했던 건설사이자.
패러필드의 시공비리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던 회사인 ‘태호건설’.
우진의 기억대로 이 태호건설이, 이번에도 이미 시공사로 어느 정도 확정이 나 있었던 것이다.
관공서와의 전화 몇 통으로 태호건설이 시공사임을 확인한 우진은,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 반장님. 통화 가능하시죠?”
현장소장 인맥을 통하여 태호건설 관계자와의 연결고리를 찾은 것이다.
하여 마지막으로 우진이 누른 전화번호는, 바로 그 태호건설 관계자의 개인번호였다.
그쪽으로 또다시 전화를 걸어, 내부 정보를 좀 물어보려는 것.
내부 정보라 해서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그런 중요한 부분을 외부인에게 술술 얘기해줄 직원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다만 우진이 캐낸 정보들은,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정보들이면서도 지금 우진이 알아내려고 하는 비리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태호건설에서 주로 거래하는 설계사무소가 ‘A&C팩토리’ 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사실상 십 년도 넘게 거래 중인 회사라…….]
“저희가 설계 단가를 좀 맞춰드리면 안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윗선에서 관계가 워낙 끈끈하다 보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뭐. 그렇게까지 관계가 돈독하다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일 생기면 연락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우진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치 설계사무소 관계자로서 태호건설의 일을 따려는 것처럼 자신의 의도를 포장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속에서, 확실히 냄새나는 구석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흐음……. 그 돈독한 관계라는 게 뭔지, 한번 찾아볼까?’
그것은 바로 태호건설의 주 거래처인 ‘A&C팩토리’.
이 설계사무소의 대표가 태호건설의 부장으로 근무했던 사원이자 태호건설 대표의 조카였음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바닥에서 인맥 장사야 흔하긴 하지만…….’
정황대로라면 왕십리 복합 몰 공사에 대한 설계도, 태호에서 이 A&C팩토리와 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최근에 태호건설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공사 건이 바로 이 왕십리 민자역사 사업이었으니 말이다.
작은 공사 하나 다른 설계사무소를 끼워주지 않는 태호에서, 이렇게 큰 건을 다른 사무소와 할 리 없었다.
‘그럼 공모에 당선됐던 그 거지같은 설계가 여기 거라는 말인데…….’
원했던 정보들은 어느 정도 손에 넣었지만, 그중에 아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핵심 트리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기는 하나, 아직 가장 중요한 부분이 뿌연 안개에 가려진 느낌이랄까?
설계사무소도 결국 태호건설의 일부나 다름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결국 내가 찾아야 하는 건, 태호건설이 어떻게 패러마운트의 실무진을 매수했냐는 거네.’
‘매수’라는 표현을 쓴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태호건설과 패러마운트가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했을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기엔 태호건설의 덩치가 패러마운트에 비해 너무 왜소했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거래를 할 거였으면 애초에 패러마운트에서 설계공고조차 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우진은 이 비리가, 실무자 선에서 일어난 비리일 것이라고 짐작했고.
때문에 패러마운트사의 공식 홈페이지에 개재된, 공고문을 다운받아 다시 읽어보았다.
정확히는 이 모집공고를 담당하는 실무부서와 담당자를 알아내기 위해, 서류를 뒤져본 것이다.
‘사업집행부 안지홍 팀장이라…….’
우진은 수첩을 꺼내 알아낸 정보들을 이리저리 메모하였다.
이어서 그것을 품속에 넣은 뒤 외투를 입고 채비하여,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늘 우진은 저녁 약속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이상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선, 저녁에 만나기로 한 ‘그’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 * *
우진이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종각역이었다.
천웅건설과 일을 하는 내내 뻔질나게 와야 했던, 천웅의 본사가 있는 위치.
오늘도 우진이 차를 댄 곳은 천웅건설 본사 건물의 지하주차장이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인물이 다름 아닌 박경완이었으니까.
경완이라면 왕십리 민자사업의 주체인 ‘주식회사 패러마운트’에도, 인맥이 몇 명쯤은 있을 게 분명했다.
“저 도착했습니다, 부장님.”
[그래. 1층이냐?]
“옙.”
[바로 내려가마. 먹고 싶은 건?]
“오늘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거로 하죠.”
[네가 웬일이냐? 소고기 굽자고 할 줄 알았더니.]
“소고기는 다음에 부장님한테 거하게 얻어먹어야죠. 최대한 비싸고 맛있는 데서 말입니다.”
[하여튼……. 이제 엘베 탄다.]
띵-!
그래서 경완의 퇴근 시간에 맞춰 도착한 우진은, 그와 함께 종각역 인근 조용한 한식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꽤나 진지한 우진의 표정에, 경완은 흥미로운 눈빛이 되었다.
“승진턱 얻어먹으러 온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네?”
경완의 물음에,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직 승진하신 것도 아니면서, 김칫국 왜 이렇게 원샷 하십니까?”
“크크, 김칫국이라니 인마. 이미 인사발령은 확정 났어. 대외발표를 안 했을 뿐이지.”
“오……. 그럼 이제 상무님 되시는 겁니까?”
“아니, 아직 상무는 아니고. 상무보라고 불러줘라. 후후.”
“싫습니다. 정식 발령 나시면 그때부터 불러드립니다.”
“쳇. 기분 좀 내보려고 했더니.”
“사실 박 부장님하고 부르는 게 입에 착착 감기지 않습니까?”
“아니. 별로. 박 상무가 훨씬 어울리지. 으하핫!”
두 사람이 향한 한식집은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 때문에 실없는 농담 몇 마디 하는 사이 도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룸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자, 직원이 들어와 능숙하게 밑반찬을 세팅했다.
그리고 경완과 우진은, 일상적인 대화부터 시작했다.
물론 우진이 경완을 보자고 한 데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지만, 급하게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차피 오늘 박경완과 저녁 약속 이후, 다른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화하던 중, 오랜만에 마포 사업장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요즘 마포 클리오는 어떻게 되갑니까?”
“프레스티지?”
“네. 뭐, 마포에서 제가 관심 가질 만한 사업장이 거기밖에 더 있겠습니까.”
우진의 물음에,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초공사 거의 끝나 가. 별다른 문제 없으면, 한 15개월 안에 준공 뜰 거다.”
“오, 일정 되게 빠르게 잡혔네요? 어차피 그 일정, 지켜지진 않을 것 같지만…….”
“시끄러 인마. 부정 타는 소리 할래?”
인상을 팍 찡그리는 경완을 보며 우진이 실실 웃었다.
“흐흐. 공구리 올라가는 거 보면 뿌듯하시겠습니다?”
“왜?”
“거기 부장님 댁 아닙니까.”
우진이 마포 클리오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부탁하는 말을 꺼내기 전에 경완의 기분을 먼저 띄워주기 위함이었다.
분양 당시 경완은 우진 덕에 50평대 미분양분을 주워 담았었고.
우진이 알기로 그 분양권에는 이미, 프리미엄이 9천만 원가량 붙어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째, 번지수를 좀 잘못 짚은 듯했다.
“큼, 크흠. 그렇긴 한데…….”
“네……?”
“이제 우리 집 아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경완의 대답에, 우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헐, 설마 팔았어요?”
“지난번에 어쩌다가 부동산 가서 알아봤는데, 피가 7천이나 붙었길래 냉큼 팔아버렸지.”
“…….”
“투자금 생각하면 거의 더블 먹은 셈 아니냐.”
애써 자위하는 경완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최소 세 장 붙을 거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그건 그냥 예측이잖아.”
“그래서 지금 시세가 얼마죠? 7천에 파셨으면 이미 손해 좀 보셨을…….”
우진의 팩트 공격에, 경완의 얼굴이 빨개졌다.
경완이 매도한 프리미엄은 사실 7천도 아닌 6500만 원이었는데, 아직 잔금도 다 치르지 않은 지금 시점에 이미 9천만 원까지 오른 상황이었으니까.
어쨌든 벌었다며 애써 위안해보지만,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끄러!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요즘 와이프한테 바가지 긁히는 중이니까.”
“왜요?”
“와이프는 팔지 말자고 했거든. 입주하고 싶다고.”
“아내분이 현명하시네요. 역시 부동산은 여자들이 감이 좋아.”
“넌 남자잖아?”
“전 감으로 안 보거든요. 분석을 하지.”
“젠장, 말이나 못 하면…….”
“앞으로 부장님, 뭐 팔 때 저한테 얘기하고 파세요.”
“팔긴 뭘 팔아. 이제 팔 것도 없는데.”
“지금 살고 계신 집 있잖아요. 거기도 한 5천은 올랐죠?”
“으으, 귀신이야. 귀신.”
경완은 툴툴거리며 먼저 나온 수육을 한 점 집어 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우진은 피식 웃었다.
‘사실 뭐, 잘 갈아타기만 하면 지금 매도한 것도 나쁘진 않지.’
성급한 매도로 벌 수 있던 돈이 적어졌지만, 그만큼 빨리 팔았으니 시간을 번 셈이다.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더 좋은 투자처로 갈아탄다면, 결코 손해라고 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우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잔금 받으면 뭐 할 거예요?”
“뭐하긴 뭐해. 아직 생각 안 해봤지.”
“청담 써밋 가시죠.”
“뭐?”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청담 클리오 써밋 40평대 계약하시죠. 그럼 이번의 실수, 만회 가능하십니다.”
“그거 조합장이 일반분양 평단가 3700까지 될 것 같다고 연락 왔는데……. 그 값에도 사도 돼?”
“됩니다. 무조건 됩니다. 그거보다 더 싸면 미분양 나오지도 않을 거예요.”
“흐음.”
우진이 침을 튀어 가며 열변을 토하는 사이, 각자 한 그릇씩 주문한 회냉면이 나왔다.
냉면과 같이 나온 따뜻한 육수를 한 모금 마시자, 입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 나온다.
“크으……! 쥑이네.”
마치 동년배의 그것과도 같은 우진의 찰진 탄성에, 경완이 헛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나저나 서우진.”
“예, 부장님.”
“이런 얘기 하자고 갑자기 보자 했을 것 같진 않고…….”
후루룩-
회냉면을 한 젓갈 맛본 경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용건이 뭐야? 이제 슬슬 본론이 궁금해 졌거든.”
골든 프린트